설교자료/히브리서

[히 11:1] 믿음의 증거를 받으라

'코이네' 2024. 3. 19. 21:15

믿음의 증거를 받으라 

 

본 문 : 히브리서 11:1-5

 

 

얼마 전 미국에서는 세기의 재판이라고 하는 심프슨 재판이 열린바 있습니다. 그가 과연 자기 부인을 죽였느냐, 안 죽였느냐, 유죄냐 무죄냐를 놓고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던 재판이었습니다. 그 재판의 TV 시청률은 미국 최고를 기록하였고, 우리 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다 그 재판의 결과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바 있었습니다.

 

판결은 배심원 평결 무죄였습니다. 이유는 증거 불충분. 수많은 사람들이 둘로 나뉘어서 심프슨이 유죄다 무죄다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증거가 이처럼 중요합니다.

 

최근에 우리 나라 대법원에서도 비슷한 판결이 잇따라 내려졌습니다. "비록 유죄의 심증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법원은 피고인에게 이익이 되도록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증거, 물증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옛말입니다. 우리 사회는 증거 재판주의를 택하고 있습니다. 백마디 말보다 한 개의 증거가 더욱 중요합니다.

 

동사무소에서 생활 극빈자들을 선정해서 매달 얼마씩 도와주기도 하고 각종 혜택을 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사무소에 와서 “나는 매우 가난하고 생활이 어려우니 나를 도와주시오”라고 소리를 높여 말한다고 바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가져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증빙 서류가 있어야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현대 사회는 증거 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며 사도 신경을 입으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사도 신경에서 “믿는다”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적어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네번 이상은 믿는다는 말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과연 내가 아무리 믿는다는 말을 일주일에 네 번이 아니라 40번씩 한다 하여도 그 믿는다는 말보다는 정말로 믿고 있는 증거가 나에게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도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장 히브리서 11장입니다. 믿음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이 히브리서 11장에서 1절로 5절 이 시작 부분에 「믿음」이라는 말이 다섯 번, 그리고 「증거」라는 단어가 다섯 번씩이나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절, “… 「증거를 얻었느니라”, 3절, “「믿음으로 …”, 4절 “「믿음으로 아벨은 …「증거를 얻었으니 …「증거하심이라 …「믿음으로써 5절, “「믿음으로 에녹은 …「증거를 받았느니라”

 

이렇게 다섯 개의 짧은 절에 믿음이 다섯 번, 또 증거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 사회 모든 일에 증거, 물증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믿음, 신앙 생활에도 믿는다는 증거가 내게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선진들은 믿음의 증거를 얻었습니다. 아벨도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드린 예물이 그의 믿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아브라함 같은 사람은 천국을 향해 가는 이 땅의 나그네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 이처럼 믿음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도 말로만 믿는다, 믿는다 하고 심증으로 끝나지 말고 확실한 믿음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의 결론입니다. 이 히브리서 성경이 이렇게 믿음의 증거를 말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도 증거 주의를 채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9장에서 노아 홍수 직후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다시는 절대로 이 땅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말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증거를 주십니다. 증거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이 무지개가 언약의 증거니라” 하나님이 증거를 그렇게 좋아하십니다.

 

가인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때 가인은 혹시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면 어떻하냐고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다. 너는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하시고서는 가인에게 증거 표를 주셨습니다. “가인에게 증거 표를 주사” 말만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은 꼭 증거물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이요 부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시고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죽으시고 부활해 보이심으로 말씀에 대한 증거를 보이신 것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려 과연 믿는 자는 살고, 예수는 산다는 증거물을 우리에게 제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말만하신 것이 아니라 그 증거까지 보여주셨습니다. 갖가지 표적과 이적을 행해 보이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증거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는 증거가 붙어 있습니다. 말씀들이 다 성취되어서 이루어진 증거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증명된 말씀, 예언들이 성취되어서 사실로 인증된 말씀, 참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는 다릅니다. 그 교주들의 말이 증명되지도 않았고 인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생명이요 부활이라고 하신 후에 직접 다시 부활해 보이심으로서 자신의 말이 참임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증명의 종교입니다. 증거가 확실한 종교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다른 종교와 너무나도 차이가 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법궤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 법궤를 만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소중하게 모시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법궤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습니까?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모세의 십계명이 적혀 있는 두 돌판과 그리고 만나 가루가 들어 있었습니다. 왜 그것들을 그 속에 보관하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이 바로 증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은혜와 기적을 주었다는 증거물로 보존하라고 해서 두 돌판을 증거 판이라고 성경은 말하기도 하고, 여호와의 법궤를 증거 궤라고 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 법궤가 있는 장막을 성막, 성소라고 하지만 증거 막이라고도 합니다. 이 모든 눈에 보이는 물건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증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만큼 하나님께서는 증거물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증거를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믿음에 있어서도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 여기 히브리서 믿음의 장에서 자꾸 증거를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본장 33절을 보십시다. 믿음의 사람들을 전부다 예로 든 후에 히브리서 기자는 결론적으로 말을 합니다. 33절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이런 놀라운 승리들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믿음의 증거들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져서 이들의 믿음이 과연 증명이 된 것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믿는 사람에게는 이런 표적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런 표적이 나타나면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로 증명이 된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히브리서 11장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35절 중간부터 봅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조금 전에는 어려움의 형편에서 믿음으로 그 어려움들이 물러가 버리고 해결되는 약속의 응답을 믿음의 증거로 받았으나 여기에 나오는 또 다른 예에서 그들은 어려움 속에서 죽어 버린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렇게 죽어 가면서도 구차히 면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부활은 못 얻었어도 하늘나라에서의 부활을 믿고서 이 땅에서 죽음이 올 때 구차히 면하지 않고 담대하게 죽었으니 이 사람들도 또한 믿음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그들은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승리가 나타나지 않고 당해 버렸으나 그러나 그 어려움을 잘 감당한 것 자체가 그들에게 있는 믿음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당하나 고통 가운데서도 기쁨을 누리고 하늘 나라에서의 더 좋은 상을 생각하며 고통을 감내 하고 견뎌 버렸다는 것입니다.

 

37절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러한 숱한 어려움들이 닥쳐왔을 때에 그 어려움들이 바로 앞전의 경우처럼 해결되고 물러간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믿음으로 이 어려움들을 잘 견뎌 내고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세상이 어려움을 주었으나 이들이 세상에 진 것이 아니라 세상이 진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했다고, 세상이 포기했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또한 믿음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옥에 갇혔을 때에 옥문이 열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옥에서 구출되었습니다. 베드로의 구출을 위하여 기도했던 그 마가의 다락방의 교인들의 믿음이 대단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옥에 갇혔을 때에 옥문이 열리지 않았고 그는 결국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있어서 살아났고 야고보는 믿음이 없어서 죽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담대하게 죽어서 나중에 하늘 나라에서 더 좋은 것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죽음이 와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담대하게 죽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도 바로 그 사람 야고보에게 믿음이 있다는 징조입니다. 믿으면 응답 받는다는 이 땅의 약속은 못 받았으나 하늘 나라의 약속을 믿고서 견디어 냄으로써 믿음의 증거는 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장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증거를 이렇게 두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도 특별히 이 두 번째의 믿음의 증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이 살아 있다면 이처럼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경우처럼 약속이 이루어져서 표적으로 나타나든지 아니면 이 땅에서의 약속은 안 이루어져도 이 땅에서 행함으로 나타나든지 반드시 믿음이 있으면 이 두 가지 중에 한가지로는 증거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어떤 환우가 기도하면 고쳐 주신다고 믿고서 계속 기도를 했습니다. 믿고 기도하자 결국 약속을 받아서 응답이 나타나 치료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그 사람의 믿음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치료는 되지 않더라도 한달 두달 지침 없이 낙심치 않고 계속 기도를 하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죽었으나 그는 끝까지 믿고서 낙심치 않고 기도를 그치지 않고 그의 믿음을 이처럼 행함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도 그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낙심치 않고 불같이 기도한 사람은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4세기의 교부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크리소스틈은 로마의 시이저가 주님이 아니라, 예수께서 주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체포되어 로마의 아르카디우스 황제 앞에서 화형 당했습니다. 아르카디우스는 크리소스톰에게 내릴 형벌을 신중히 고려하면서 맨 먼저 그를 이 땅에서 추방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담대하게 말을 합니다. "폐하, 폐하께서 저를 저의 집에서 추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가 제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아르카디우스는 크리소스톰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저의 재산을 전부 다 몰수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저의 재산은 몰수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하늘 나라 아버지 창고에도 보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빼앗지 못합니다.”

 

그러자 화가 난 황제는 “나는 너를 감옥에 집어넣어 너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접촉을 일체 금지시키겠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저에게 결코 친구를 다 빼앗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친구가 되어 감옥에까지 와서 내 곁에 계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격노한 아르카디우스는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저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죽으면 하늘 나라에서 다시 부활합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크리소스톰은 장렬하게 순교했습니다.

 

왜 믿음이 있었는데 그는 살아나지 못했습니까? 크리소스톰의 믿음이 없었다고 말할 자 있습니까? 옛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놀라운 믿음을 소유하여서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풀무불 가운데서도 죽지 않고 살아난 기적이 나타났는데 왜 크리소스톰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고 죽었습니까? 그의 믿음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하늘 나라의 부활을 믿고서 한 점 흔들림이 없이 또박또박 그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니 그의 믿음은 놀라운 것입니다.

 

세기적인 화가 도레가 남유럽을 여행하던 중 그만 여권을 잃어버렸습니다. 국경선에 이르렀을 때 정부 관리 하나가 그를 가로 세웠습니다. 그때 도레가 관리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권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도 잘 아는 화가 도레입니다. 부디 나를 통과시켜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관리가 즉시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저명인사라고 소개합니다만 결코 우리가 통과를 허용치 않습니다." 도레가 간곡히 부탁을 하면 할수록 그 관리는 점점 더 완강해질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그 관리가 말했습니다. "좋소 당신이 정말 유명한 화가 도레라면 이 연필로 나를 위해 그림 하나를 그려보시오." 그러자 도레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본 관리가 외쳤습니다. "정말 당신은 도레시군요. 이제 가셔도 좋습니다. 당신이 정말 도레인 줄 확실히 알았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도 이처럼 그릴 수는 없으니까요."

 

자기 안에 그 무엇이 정말로 있다면 반드시 이처럼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개미 한 마리가 내 몸속에 들어와 있으면 내 표정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지락 거리면서 표시가 납니다. 요한1서 5장 10절에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여러분에게 이처럼 믿음의 증거가 있으십니까?

 

이 세상에는 심증과 물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도 심증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물증만 인정받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난 오래 믿었으니까 나에게 믿음이 있을 거야’ 나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믿음의 증거가 아닙니다. 매우 불안한 것입니다. 확실한 증거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증거는 심증도 아니요 물증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증거를 낸 것이 아니라 선진들이 증거를 받았다고, 증거를 얻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증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증거. 이것을 우리가 신증이라고 하십시다. 심증도 아니요, 물증도 아니요, 성경에서 말하는 증거는 신증, 하나님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목사도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서 매일 이 세상의 것만 탐내고 이 세상의 좋은 것만 탐내고 이 세상의 높은 권력만 탐낸다면 사람들이 볼 때 그 목사의 믿음을 믿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천국을 믿으면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라 증거 했다고 했습니다. 천국을 믿고 이 땅에서는 천막 생활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증거라고 하는데, 목사가 만약에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이런 행동이 나타나면 사람들의 증거를 받겠습니까?

 

이렇게 사람이 증거하는 것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은 심령을 감찰하신다고 겉에 나타난 이런 증거보다 더 정확한 증거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증거. 이것은 틀림없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증해 주시는 증거를 하나님의 보증이라고 하는데 요한 1서 5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사람도 증거를 합니다만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하시는 증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요한 1서 5장 7절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믿음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고 성령이 곧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믿음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성경 말씀은 나아갑니다.

 

성령이 믿는 자 속에 들어와서 나로 하여금 견뎌 내게 하시던가 아니면 나로 하여금 표적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시던가 이 둘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성령의 내적 증거와 성령의 외적 증거라고 합니다.

 

내가 성령 받아서 어려움을 끝까지 견뎌 내는 것은 성령의 내적 증거요, 또 성령 받아 기도해서 외적 환경이 변해 버리고 표적이 나타나는 것은 성령의 외적 증거입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마음이 기쁘고 평안하고 두렵지 않으며 감사한 것은 믿는 자에게 주신 성령의 내적 증거요, 어려움이 해결되어 버린 것은 믿는 자에게 주신 성령의 외적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두 가지 증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증거를 받아서 이렇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병이 들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서 병이 물러가든지 믿음으로 병을 승화시켜서 기뻐하며 견뎌 버리든지 이처럼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주셔서 성령의 내적 증거가 나타나든지 아니면 성령의 외적 증거가 나타나든지 반드시 둘 중 하나로 증거를 얻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버리든지 아니면 견뎌 버리든지 이 세상에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렐루야! 이것이 믿는 자입니다. 이런 성령의 증거가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나 자신을 보십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너희에게 믿음이 있는가 시험해 보고 믿음이 있는가 확증해보라”고 했습니다. 과연 내게 이런 증거가 있는가?

 

우리 한국의 믿는 자들을 한 번 살펴보십시다. 천 이 백만의 믿는 자들이 있다고 하는데 이들에게 믿음의 증거들이 다 나타나서 행함이 나타난다던가 표적이 나타난다고 하면 우리 나라가 이렇게 있겠습니까? 이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나타나지 않고 아무런 행함도 아무런 변화도 없어서 오히려 손가락질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한국의 믿는 자들이여! 너희에게 믿음이 있는가 확증해 보라. 믿으면 반드시 증거가 나타나는데 어디 증거가 나타납니까?

 

만약에 우리에게 믿음의 증거, 행함과 표적이 나타난다면 그는 옆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십시다. 내가 얼마나 옆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 내게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견뎌 내는 행함이 있는 내적 증거가 있는가? 아니면 나를 통하여서 어려운 문제가 자꾸 해결되는 표적, 외적 증거가 나타나는가? 없으면 믿음을 달라고 성령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머지 인생 믿음으로 살며 행함과 표적을 나타내며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며 사는 참 진정한 믿음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