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10:19] 찢겨진 휘장

'코이네' 2024. 3. 11. 21:08

찢겨진 휘장

본문 : 히 10:19-25

 



지금까지 살펴본 히브리서의 말씀은 교리적인 부분을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교리적인 부분이 끝나고 실재적인 부분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것은 다소 사도 바울이 이 서신의 기자라는 것을 뒷받침 해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서신의 대부분이 전반부는 교리적인 부분을 취급하고 후반부에서는 실재적인 일들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로마서의 경우 11장까지는 교리를 그 이후에는 실재적 문제를 다루었고, 에베소의 경우 3장은 교리적 부분을 후반부는 실재적 부분을 취급하고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의 편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이론적인 부분을 끝내고 실재적인 부분으로 접어들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하기를 원하고 있다. 특히 이 부분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형제들아”라는 부드러운 음성을 들려주고 있다. 그 이유는 모세의 여러 제도에 아주 집착해 있는 히브리인들을 복음으로 불러내기 위한 부드러운 음성이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찢기워진 휘장의 의미와 그 찢기워짐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의 문제, 그리고 그 것을 보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한다. 



1. 예수님의 찢어지심(20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당신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셨다. 죽음이 아니고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었기에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찢어서 드리신 것이다.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동안에 성소와 지성소를 막고 있었던 휘장이 찢어졌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당신의 몸이 찢어진 것이요, 최고의 사랑이 찢어진 것이요, 최고의 신이 찢어진 것이요, 최고의 의가 찢어진 것이요, 최고의 영광이 우리를 위해 찢어진 것이다. 당신의 찢어지셔야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그의 찢어지심은 분명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한 당신의 사랑에서 기초한 것이다. 
먼저 그의 머리가 찢어지셨다. 가시 면류관은 그의 머리를 찢어지게 했다. 그의 머리가 찢어지신 이유는 우리의 머리로 짖는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다음에 손과 발이 찢어지셨다. 우리의 행위로 짖는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찢어지심이었다. 악인의 꽤를 좇아가며, 죄인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 손과 발로 짖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손과 발을 찢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옆구리가 찢어지셨다. 그의 가슴을 찢으신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없는 가슴으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찢어지신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당신의 모든 몸을 찢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원하셨다. 이것은 철저히 주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었다. 



2. 열려진 길(19-22절)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므로 지성소와 성소의 구별이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듯이 이제 예수님께서 이렇게 찢어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이 자유롭게 열려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그 길을 열어 놓으셨고 우리가 합당하게 하나님께 나가도록 만들어 주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엄격히 차단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레위인 조차도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으니 범인들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렇다면 열려진 길은 어떤 길이며 그 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휘장 가운데 열린 길

주님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길은 휘장 가운데로 열려진 길이었다. 그 동안에 휘장으로 가리워져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던 길이 이제 그 휘장이 찢어지므로 말미암아 더 이상 가릴 수도 없었고 사람이 나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그 가운데가 찢어졌기에 휘장은 더 이상 휘장으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은 아담으로 인해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은 닫혀지게 되었던 것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열리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에덴은 화염검으로 지켜지며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창 3:24). 그러나 지금은 보증자의 피로 말미암아 모두 소멸하게 되었고(슥11:9, 벧전1:19) 이제는 아무 장애 없이 주님께로 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새로운 길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열려진 이 길은 새로운 길이었다. 새로이 죽임을 당하므로 열어놓으신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새 길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구약의 성도들도 이 길을 갔기 때문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앞으로 있게 될 새로운 길을 보면서 이 길을 갔고 신약의 성도들은 이미 이루어진 새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 다를 뿐이다. 새 길이라고 하는 것은 행위언약 아래에 있었던 옛 언약과 구분되어지는 의미가 있다. 
산 길

 주님이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길은 생명을 주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이 길을 산 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으니 이것이 어찌 산 길이 아니겠는가? 지성소로 사람이 들어가면 누구나를 막론하고 죽을 수 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누구나를 막론하고 예수님께로 나가는 자들마다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산 길이 아니겠는가? 

이 길은 유대교 아래서 하나님께 나가는 길과 다르다. 동물을 의지하고 나가는 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길이다.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산 길은 영구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생명을 갖게 한다. 이 길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구주를 바라볼 때 갈 수 있다. 이 길은 그리스도를 본으로 삼고 지체 없이 기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의 자취를 따라가려고 열심히 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길이다. 

담대히 나갈 수 있다. 

주님께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입을 때에는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주님께서 아무리 그 길을 열어 놓았다고 할찌라도 죄인된 우리의 자력으로서는 나갈 수 없다. 다만 주님이 지금도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머리가 될 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의지하여야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주님을 의지하는 자라야만이 열납된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 이렇게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전제가 되어 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므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하셨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에 이제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고 하나님의 용서가 있기에 담대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으니 이제는 누구도 우리를 고소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담대하게 나갈 수 있다. 

불안하게 나가는 것이 아니요 담대하게 나갈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뻔뻔스럽게 나갈 수 있다는 말도 된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듯이 담대하게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면 하나님의 환대가 있을 것을 보면서 담대하게 나가야 한다. 주님은 겁먹어서 나오지 못하는 자보다는 주님의 피를 의지하고 담대하게 나오는 자들을 환영하신다.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가기 위해서는 첫째로 주님의 피를 마음에 뿌림을 받아야 한다. 육체만이 정결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정결케 되어야 한다. 부정한 자를 깨끗케 하기 위해 피를 제단에 뿌리듯이 더러운 심령을 깨끗케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를 마음에 뿌려야 한다. 마음이 깨끗해진 자가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된다. 

둘째로 양심의 악을 깨달음으로 나가야 한다. 셋째로 맑은 물로 씻어야 한다. 이것은 죄를 씻음받는 것을 말한다. 제사장이 제사를 위해서 몸을 씻는 것과 비교가 된다(출 29:4). 이것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생할 때 겪는 그리스도인의 최초의 경험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만족하면 안된다. 계속 정결케 될 필요가 있다. 

마치 베드로가 발을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항상 씻는 생활을 해야 한다. 매일 죄를 고백하는 것은 씻는 생활을 의미한다. 우리는 매일 용서받고 불의에서 청결케 되어야 한다. 불결한 양심은 여호와와 교제하는데 큰 장애물이 된다. 우리는 부정한 행실을 부단히 물로 씻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 경외도 없고 하나님 만족도 없다. 맑은 물로 씻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하도록 하셨다(골 1:12). 

넷째로 참마음으로 나가야 한다. 참 마음으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참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다(빌 2:5). 겸손한 마음이다(마 11:29). 온유한 마음이다(마 11:29). 새롭게 변화받은 마음이다(롬 12:2). 청결한 마음이다(마 5:8). 참마음은 속 없는 껍데기 행위를 거부한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중심이다. 이중적이어서는 안된다. 외식도 안된다. 내면적인 마음의 진실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믿음 때문이다. 잠 23:26에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달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꾸며진 아름다운 말이나 효과만을 위해서 꾸며진 감정은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다. 억지로 드려진 것도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참 마음으로 나오는 것이다. 

다섯째로 온전한 마음이다. 온전한 믿음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이요, 성경 중심의 믿음이다. 좌우에 날선 검이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으로 믿는 것이다(딤후 3:16, 17). 온전한 믿음은 성도의 연합을 이루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믿음이다. 온전한 믿음이란 소극적으로는 의심이나 유동하는 것이 없는 것이지만 적극적으로는 흔들리지 아니하는 확신을 가지고 나가는 믿음이다. 내 자신의 믿음을 견고하게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가게 해주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의 절대적 충분성을 의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온전한 믿음은 어떤 희생도 감수한다. 여러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갈 때는 키 큰 사람이 더 힘들다. 여러 사람이 같이 생활하는데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더 희생을 당하는 법이다.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다. 온전한 믿음을 위해서는 의심하지 않아야 하고(롬 4:20),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롬 4:20), 퇴보하지 않아야 한다(히 10:38). 온전한 믿음은 나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려 내 연약한 찬양이나 간구를 정결케 하고 그의 달콤한 향기를 향내나게 하며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하시는 대제사장을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 



3. 헌신해야 하는 길(23-25절)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찢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담대히 나가도록 하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이루신 예수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찢기워졌듯이 이제 그 찢기워진 휘장 사이로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찢기워진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도 그 삶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쁘신 그 분의 삶이 바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헌신의 삶입니다. 어떻게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23절)

헌신의 시발점은 우리의 믿음의 도리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는 도리란 십자가의 도를 말하는 것이요 우리의 신앙고백을 말한다. 이 믿음은 공적 고백으로 세상과 마귀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택하겠다고 하는 공적 고백이다. 예수님을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고백이다. 죄를 벗어나고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소망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소망은 산 소망이다. 이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 의심이 없어야 한다. 세상과의 사이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연약하여 우유부단하지 말아야 한다. 진리의 결정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을 포기하고 계속 이 길을 가야만 한다.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가야만 한다. 중간에 부인하면 안믿는 것보다 못하다(벧후 2:20,21). 그것이 굳게 잡는 것이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유혹으로 인해서 흔들리고 떠나갔다. 굳게 잡지 못했던 것이다. 동요와 의심과 논쟁이 수 없이 있어 왔다.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다. 부단히 믿음을 지키지 못하도록 악의 세력은 계속 공겨해 왔다. 마치 천로역정에서 순례자가 거인과 아폴리언에게 위협을 당할 때 그것을 죽여야하는지 아니면 그것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그 사이에서 흔들렸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그렇다. 그런 중에서 우리의 믿음은 어떠해야 하는가? 흔들리지 말고 믿음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한다. 복음을 잡아야 한다. 어떤 위험과 어려움과 위협과 반대가 있다고 할찌라도 믿음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한다. 이것이 헌신하는 길이다. 

끝까지 잡는 자에게 구원의 기쁨이 있게 된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끝까지 잡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믿음의 소망을 굳게 잡기 위해서는 세속의 유혹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약 1:27). 하나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한다(유 1:21). 떨어질까 조심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벧후 3:17). 

우리의 구원은 단순히 기계적인 구원이 아니다. 그리도인의 견인이란 것은 믿음과 거룩 안에 계속 거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의의 모든 열매를 부단히 맺어야 한다. 유라굴로 태풍을 만난 바울과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의 목숨을 안전하게 해주겠다는 확답을 받은 후에도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끝까지 다 했듯이 우리도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끝까지 잡아야 한다(고전 10:12). 끝가지 참고 경건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하나님의 교훈보다 이기적 생각들로 더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은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24절). 

그리스도의 찢기워진 휘장 사이로 걸어가는 헌신된 삶의 두 번째는 서로 돌아보는 가운데 사랑과 선행의 격려가 있어야 한다. 서로 돌아본다는 것은 서로를 생각해 준다는 것이다. 심각하게 관찰하고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온전히 알기까지 철저히 가늠해 보는 것을 말한다. 자칫 잘못하면 오해가 생겨서 상대를 더 곤란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와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없이 돌아보는 것은 귀찮은 간섭 밖에는 될 것이 없다. 서로 돌아보는 가운데 사랑과 선행의 격려가 있어야 한다. 서로가 사랑을 더해갈 방도를 생각하며 선한 행실을 위해서 애쓰며 형제가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을 위해서 애쓰고 기다리고 돕는 생활을 말한다. 

여기에서 격려해야 한다는 말은 부추긴다는 뜻이 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도록 자꾸 부추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행실을 말하고 있다. 교역자의 입장에서는 친히 모범을 보이므로, 현명하고 설득력 있는 영적 가르침으로, 선한 활동을 하도록, 그리고 서로에게 유익을 주도록 본을 보이는 생활을 말한다. 성도의 입장에서는 교역자를 신뢰하고 옹호하고 기도하면서 본을 보이는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형제끼리의 사랑과 친교는 곧 천국이다. 최고의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사랑의 불꽃을 붙여야 한다.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25절). 

헌신하는 사람의 세 번째의 특징은 모이기를 힘쓰는 생활이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했다. 진정한 헌신은 모이는 생활이다. 크리소스톰은 말하기를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다고 했다. 루터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면 교회를 찾으라고 했다. 교회는 이 만큼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에 모이는 일을 제외하고서는 신앙을 논할 수가 없다. 모이는 것은 그 만큼 중요하다. 

모인다는 말은 “에피 쉬나고게”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마 23:37에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모음 같이”라고 했다. 우리의 모임은 이런 모임이 되어야 한다. 엄숙하고 정기적이고 규칙적이고 복음적인 예배를 향한 모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단은 모임을 폐하려 하고 예배를 방해하려고 항상 노력한다. 예배에 불참하도록 하고 무교회주의를 주장하도록 한다. 성수주일을 못하도록 방해한다. 모임 자체를 못하게 한다. 사탄은 모이기를 폐하도록 하는 것이 습관이다. 가끔 하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는 습관화 되어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배도하도록 만든다. 때에 따라서는 고난을 무서워하게 해서 배도하게 하고 때에 따라서는 영적으로 태만하게 해서 배도하게 만들고 때에 따라서는 타락하여 배도하게 만든다. 

사단의 이런 책략으로 인해서 많은 성도들이 세상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뒤를 돌아보는 생활이요(눅9:62, 요 6:66), 뒤로 물러서는 생활이요(히 10:38), 뒤로 넘어지는 생활이다(사 28:13). 그런자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힘쓰는 생활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말세가 될수록 모이는 일은 더욱 더 힘써야 한다. 마지막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더 그리해야 한다. 성도는 더욱 모이기를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이 휘장 가운데로 걸어가는 성도의 헌신된 모습이다. 



결론을 맺는다.


주님은 당신의 몸을 찢으시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특권을 주셨다. 이제 우리는 주 안에서 다시 정죄함이 없는 특권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특권이 있는 만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감당하므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찢기워지심은 우리에게 헌신을 요구하는 초석이 된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대처해 오든지 흔들리지 말고 굳세게 믿음을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요동하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더 그리해야 한다. 그 날은 하나님의 날이요(벧전 3:12), 인자의 날이요(눅 17:26), 구속의 날이요(엡4:30), 진노의 날이요(롬 2:5), 마지막 날이요(요 6:39), 최후의 심판날이다(마10:15). 한 마디로 주님의 재림의 날이다. 그러므로 재림을 바라보는 성도는 더욱 더 깨어 경성한 생활을 해야 한다. 재림의 신앙을 가지고 주님의 찢기워진 사이를 걸어가는 헌신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기에 우리가 이러한 일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