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10:26] 너희는 생각하라

'코이네' 2024. 3. 11. 21:04

 너희는 생각하라

본문 : 히 10:26-39

 



두 사람이 같은 일을 할 때 누구에게 더 효과가 크게 나타나겠는가? 단순히 행동하는 사람보다는 보다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다. 운동선수도 단순히 시합하면 bone head play를 할 수 밖에 없다. 나는 학원에 가서 운전을 배우지 않았으나 면허증을 쉽게 딸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학원에 다닌 사람 이상으로 머리 속에 차를 그리고 연습을 했기 때문이었다. 깊이 생각하고 매일 생각하면 막상 그 일을 당하게 될 때 쉽게 적응할 수 있다. 이것은 생각하는 사람의 특징이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옮겨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길도 다를 바가 없다. 계속 생각하고 훈련하는 신앙은 그 깊이가 더 있으며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적용해 나갈 수 있다. 사도 바울 같은 이는 이런 훈련이 철저히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환경을 만나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29절과 32절을 통해서 생각하라는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다. 생각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 있는가?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은 단순히 기억하라는 말이 아니다. 환난 중에서도 그들이 어떠한 힘으로 지탱했으며 그러한 고통 가운데서도 어떤 만족을 얻었으며 고통 가운데서 어떻게 건짐을 받았는가를 생각하라는 말이다. 

특히 본문은 환난으로 인해서 배교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면서 기록한 말씀으로 그들이 중도에 포기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것이기 때문에 보다 더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날의 이겼던 모든 일을 생각하면 다른 고통도 쉽게 이길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는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1. 형벌이 얼마나 중한가를 생각하라(26-31절)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첫번째의 것은 그 형벌이 얼마나 중한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에 대한 형벌인가? 죄에 대한 형벌이다. 죄에 대한 심각성과 그 죄에 대한 형벌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알아야만 경성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특별히 생각해야 할 것은 짐짓죄를 지은 자에 대한 형벌이 얼마나 심각한가의 문제다. 
짐짓죄란

짐짓죄란 무엇을 말하는가? 본문에 기록된 것은 짐짓 죄를 짓는 것이라 했는데 나는 편의상 이것을 짐짓죄라 칭하고 설명하고자 한다. 짐짓죄란 자발적으로 기꺼이 행하는 것이다. 고의적으로 짓는 죄요, 의식적으로 짓는 죄요, 계속적으로 짓는 죄다. 이 단어의 원어는 “헤쿠시오스”인데 그 뜻은 “자원함으로(willingly)”란 뜻을 가지고 있다.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은 죄를 말한다. 특히 짐짓죄는 복음 진리를 확신하고 그 복음 진리의 능력과 탁월함을 공적으로 인정한 다음에 그 복음 진리와 복음 진리의 약속들과 그에 수반된 모든 의무들을 다 함께 명백히 버리고 포기하는 죄를 말한다. 

이 죄는 선택적 의지를 가지고 자원하여 자기 자신의 마음의 내면적 부패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난 불신앙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죄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난 일을 행하는 죄다. 다른 식의 종교를 더 좋아하고 복음보다 다른 종교를 더 우월하게 생각하므로 짓는 죄를 말한다. 이것은 참 심각한 것이다. 

어떻게 중생한 자가 떨어져 나간단 말인가? 이것은 칼빈의 기본 교리인 성도의 궁극적 견인에 저해되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말은 차라리 알미니아니즘에 해당하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칼빈은 말하기를 여기에는 중생한 자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세대주의자는 누구도 이런 죄는 짓지 않는다고 한다. 아더 핑크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은 영화롭게 되었으나 아직 완전하게 되지 않았으므로 이런 경고를 받는다고 하였다. 엄격히 말하면 이들은 구원에 참여한 자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단지 그 맛을 보고서 떨어져 나간 자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짐짓죄는 구체적으로 어떤 죄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것이다. 밟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가장 아무렇게나 다루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짐짓죄는 하나님의 아들의 존영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대하는 죄를 말한다.  

둘째로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다. 자기의 피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큰 죄다. 배교하는 자들은 황소, 염소의 피를 단순한 피로만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용된 것으로 보지 않았던 자들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효과 없는 것으로 보거나 부정한 것으로 여겼던 자들이다. 한 마디로 신성을 부정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상의 더러움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벧후 2:22의 말씀과 같이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다시 빠지는 것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율법을 범해도 그 죄가 큰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부정하는 죄는 얼마나 심각하겠는가? 

셋째로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짐짓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처음에 복음 전파자들에게 수반되었던 성경이 이해되며 그들의 지식과 능하신 이적과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을 져버리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26절)

모든 죄는 다 사하심을 얻되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있다. 마 12:31과 막 3:29에 기록된 성령훼방죄, 눅 12:10에 기록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을 수가 없다. 요일 5:16에서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나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사단의 역사로 악하게 왜곡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했다. 짐짓죄도 여기에 해당한다. 짐짓죄는 최종적으로 포기하는 것이요, 죄가 무서운줄 알면서도 지은 것이요, 영원한 배신죄다. 이것은 결국에는 파멸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엘리 제사장의 자식들의 죄가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했던 것은 그 좋은 실례가 된다(삼상 3:14). 

그들이 당하는 형벌

모세의 법을 폐한 것도 하나님의 법을 경멸하기에 지은 죄이기에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는데 어찌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밟은 자들이 용서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법을 어긴 죄도 실수로 지은 죄와 정당 방위로 지은 죄와 고의로 지은 죄의 형벌이 다른데 하물며 하나님을 고의로 져버린 자들을 어찌 그대로 버려 두겠는가? 그렇다면 짐짓죄를 범하는 자들이 당하는 형벌은 어떤 것인가? 

27절에 보면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했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신앙고백을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다 덮어주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짐짓죄는 신성모독으로 반드시 형벌을 당하게 된다. 나답과 아비후에게 불을 내려 죽게하신 하나님을 볼줄 알아야 한다(레 10:2).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에 있는 도시들을 불로 심판하신 하나님,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디도 장군에 의해서 심판하신 하나님은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심판하신다. 

이것은 주께서 갚으시는 형벌이다(30절). 주께서 친히 갚으신다는 말은 그 형벌이 치명적이린 말이다. 자기의 뜻과 자기 도취의 길에 빠져 있는 자들의 끈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지적하여 알려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게 되는 벼랑 끝마다 신실하게 울타리를 쳐 놓으셨다. 만일 그 경고들을 무시하고 그 울타리를 넘어간다면 그에게 화가 미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 그 백성을 심판하신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어찌 그 백성을 심판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원수들에 말한 것은 자기 백성들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의언약을 어기고 배척한다면 그 백성들에게도 적용시키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반드시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양면성이다. 

짐짓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형벌을 가볍게 해주는 다른 어떤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게 하는 심판은 대단히 무서울 뿐이다(31절).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은 용서받을 길이 없기에 무섭다. 단 5:5-12에서 벨사살 왕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용서의 부분을 찾을 수가 없다. 일단 경고의 기간이 끝나면 그 다음에는 용서의 길이 없다. 마치 노아의 방주가 닫힌 후에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이런 심판을 생각하는 자들의 신앙은 깨어 경성하는 뜨겁게 된다. 심판을 생각하며 뜨거운 신앙을 소유하기를 축원한다. 



2. 지난 날의 인내를 생각하라(32-36절)

 
기독교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방법 중의 또 한 가지는 지난 날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견디어 왔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예수 믿을 때 당하던 고난, 그 고난을 어떻게 이기며 지금까지 왔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히브리서 기자는 개종한 후에 무수한 고난을 참고 이겼던 것을 생각할 때 고난 속에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했다. 그 하나님을 생각하면 지금의 고난도 쉽게 견딜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지난 날의 인내를 생각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이 당했던 지난 날의 고난은 어떤 것들이었는가? 

개종한 후에 당한 고난

초대 기독교인들은 개종한 후에 많은 고난을 당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이란 “트리불룸”이란 말인데 곡식의 껍데기를 까기 위해서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도리깨를 말한다. 심한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다. 32절에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고 했는데 이는 그 당시에는 예수를 영접한 후에 성도가 어떠한 고난을 당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들이 예수님을 먼저 만나 빛을 보지 못했다면 고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당하는 고난은 신앙으로 생기는 고난이었다. 빛을 받지 못한 자는 고난도 없다. 역으로 말하면 빛을 받은 자는 반드시 고난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그들 중의 많은 숫자가 절대적으로 예수님을 필요로 해서 믿는 자들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그들에게 예수님으로 인한 고난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그들이 예수님으로 인한 고난을 받기나 하겠는가?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인해서 얼마나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고난은 대단히 중요하다. 봄에 바람이 많이 불어야 나무가 흔들리면서 뿌리로부터 물을 빨아 들이는 것과 같이 성도는 고난이 있어야 그 신앙이 성장하게 된다. 고난은 뿌리를 더욱 더 굳게 내리게 하는 하나님의 훈련 도구이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고난은 은혜를 굳게 하는 용광로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성도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땅에 속한 것들로부터 빼내시기도 하시고 또한 그 자녀들로 하여금 생명샘을 목마르게 찾도록 하기 위하여 피조물에 속한 만족의 물줄기를 말려버리기도 하신다. 이것은 성도를 더욱 더 굳게 하여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한 훈련이다. 이 훈련을 위해서 초대 교인들은 어떤 고난을 당했는가? 

첫째로 비방을 당했다(33절). 비방은 중상하고 조롱하고 꾸중하고 빈정대는 것이다. 이것들은 순전한 마음에 고통을 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비방은 악의에 찬 증오에서 생기는 것으로 경멸과 조롱이 수반된 것이다. 유 1:15의 말씀을 보면 강퍅한 말이라고 하였다. 공공연하게 조롱하고 헐뜯고 거짓으로 공격을 한다. 당시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의 권위를 예배한다고 비난을 받았다. 사람은 비난을 받을 때 자기의 명예나 평판을 중시한 나머지 같이 대항하게 된다. 그러나 초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심정과 같이 만물의 찌끼와 같은 자신을 보면서 견뎠다. 

둘째는 환난이다(33절). 환난은 상처, 고통, 핍박이 있는 것을 말한다. 환난은 육체의 고통을 가져온다. 신앙대로 살면 고통이 있다(요 15:18). 비난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환난이 있기 마련이다. 한 번은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에게 박아지를 심하게 긁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크산티페는 박아지로 물을 떠다가 남편에게 끼얹었다. 그래도 대꾸하지 않고 있자 그것을 지켜보던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크산티페가 너무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대답하기를 천둥 번개가 치면 소나기가 오기 마련인데 뭘 그러느냐고 했다고 한다. 비방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환난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세상은 말로 해서 안되면 힘으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마귀의 공격을 알고 있으면 절대로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 구경거리였다(33절). 공개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이다. 구경거리란 말은 “무대로 데리고 온다, 조소거리가 되게 한다”는 뜻이다. 초대 교회 당시의 그리스도인은 로마 당국의 박해로 인해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과 격투하다 죽임을 당하였고 사람들은 그것을 관중석에서 구경하였다. 실로 초대교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구경거리가 되었다. 

넷째로 갇히는 것이다(34절). 예수님으로 인해 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했다. 사도 베드로도 갇혔고, 야고보도 갇혔고, 바울도 갇혔다. 

다섯째로 산업을 빼앗기는 것이었다(34절). 고대 로마는 국법을 어기면 재산을 몰수하는 법이 있었다. 재산, 친척, 자식들까지도 궁지에 몰아 넣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독교인을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몰수했다. 당시는 기독교인의 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도 죄가 성립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과는 상거래를 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재산에 있어서 수 많은 불이익을 당했다. 

고난 속에서의 인내

그러나 초대 교인들은 그렇게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견디어냈다. 인내가 있었던 것이다. 인내하지 못하는 자들은 배교하고 떨어져 나갔다. 고난을 이기는 것은 인내 뿐이다. 인내는 참고 견디는 것이다. 분노하지 아니하고 짜증내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구원얻으려 하지 아니하고 평온하고 만족스런 마음으로 악을 견뎌내는 것이다. 인내는 생명을 준다. 

빅토르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란 책을 쓴 사람이다. 이 사람은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았던 사람인데 나중 풀려나온 후에 고통을 극복하는 심리학을 연구하여 “로고데라피”라는 심리학 분야를 개척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수용소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을 보았다. 그 후에 그는 말하기를 인내를 가진 자만이 견디어 냈다고 했다. 인내는 생명이다. 

그들은 자신이 당하는 것을 참았다(32절). 인내는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복이 있는 것인줄 알았고 참는 것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육신으로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지만 그 때에 인내를 가지고 참았다. 뿐만 아니라 고통당하는 자를 사귀었다(33절). 사귄다는 말은 코이노니아로 동역자 혹은 동업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자와만 사귀는 것이 아니고 고난당하는 사와 서로 사귀었던 것이다. 

비록 자기들이 지금은 고난당하고 있지만 똑같은 고난이 자신들에게 다가올 것임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고난을 슬퍼하고 직접 동정하므로 방문하고 사랑과 애정과 의무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유익과 기쁨을 나누어주는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동정하였다(34절).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했던 역사적인 사건은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증명해 준다(행 21:33). 


고난을 이기는 비결

이런 고난을 인내로 이기던 때를 기억하는 것은 신앙에 큰 유익이 된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으로 인한 어떤 고난이 있는가? 그 고난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초대 교인들이 고난을 이기는 비결을 보면 첫째로 그리스도의 담대함을 소유하는 것이었다(35절). 담대함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자세나 태도를 말한다. 굽힐줄 모르는 생각이요, 마음의 용기요, 의지의 부단성을 말한다. 대부분 중도에서 배도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은 겁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담대함이 없는 자들이었다.

담대함은 매임과 두려움에서부터 자유를 주는데 이것은 우리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유력한 신앙으로부터 온다. 시련과 환난을 만날 때 필요한 것은 마음의 담력이다. 흔들리지 말며 더욱 힘써야 한다(고전 15:58).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고난을 은혜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나중의 상급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는 확신을 가지면 나는 대적하는 자가 누구이든 개넘치 않고 담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잘못된 믿음은 담대함을 약하게 하며 잘못된 담대함은 믿음을 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에서 시작되는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담대하게 되는 비결이 무엇인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요 16:33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둘째로 약속을 생각할 때 고난을 이길 수 있다(34-36절). 끝가지 견디는 자에게 영구한 산업, 하늘의 상급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할 때 고난을 이길 수 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짐을 통하여 수반된 크고 영화로운 변화가 더 새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심을(고후 4:17) 바라볼줄 알아야 한다. 

셋째는 기도다. 고난이 올 때 이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기도로 준비하는 일이다. 영원한 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 중요하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환난에 대비하여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인내한 자를 잊지 않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를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한다. 이런 기도가 있는 자가 인내할 수 있다. 



3. 오직 믿음으로만 승리할 수 있음을 생각하라(37-39절)


성도가 생각해야 할 세번째는 믿음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의인이 그의 신앙고백 안에서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게 하는 수단이다. 믿음은 성경을 근거로 해야만 나온다. 무엇에 대한 믿음이며 그 믿음의 특징은 무엇인가? 

재림의 믿음

재림의 믿음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더 신실하게 만든다(37절). 재림을 기다리는 자가 고난을 견딜 수 있다. 막연한 재림이 아니라 잠시 후에 있을 재림을 생각해야 한다. 잠시 후의 재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당하는 환난도 잠시라고 하는 것이다. 아주 짧은 기간이다. 시 30:5의 말씀과 같이 노여움은 잠깐이요 은총은 평생이다(고후 4:17참고). 성육신을 이루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반드시 성취할 것이다. 이 예언의 최종적인 성취는 곧 완성될 것이다. 
뒤로 물러서지 않도록 하는 믿음 

믿음은 뒤로 물러서지 않도록 한다(38절). 멸망과 파괴와 소멸이 없도록 한다. 믿음은 전진하는 것이다. 믿음은 퇴보되어져서는 안된다. 퇴보되는 자는 배반하고 떠나게 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살 때라야만이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 있다.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관계를 가져야 한다. 침륜에 빠지면 안된다. 합 2:4의 말씀과 같이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

믿음은 궁극적으로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 구제하고 보호해 준다. 육체는 몸을 아래로 살찌게 하지만 믿음은 영혼을 구원한다.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순종하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옛날 순임금 때의 일이다. 하루는 신하들에게 구덩이에다가 물을 길어 부으라고 했다. 그 때 모든 신하들은 임금이 쓸데 없는 일을 한다고 수근수근대며 임금님을 비난하여 물을 길어 붓지 않았다. 그러나 한 충성스런 신하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찌 거역하리요 하면서 온종일 혼자서 부지런히 우물물을 길어 구덩이에 부었다. 자꾸 붓다보니 우물의 물도 없어졌다. 두레박에 물이 오르지 않았으므로 우물 밑을 보았더니 황금덩이가 번쩍이고 있었다. 신하는 이 금덩이를 가져다가 왕에게 드렸더니 왕의 말이 “순종하는 신하에게 내리는 황금덩이 상이니 그대가 가질 것이니라”고 하였다. 순종은 중요하다. 자기 이론에 맞지 않아도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최종적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 



결론을 맺는다.


우리는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형벌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할줄 알아야 한다. 지난 날의 인내가 어떠한지를 생각해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만 승리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는 자가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생각하는 자가 큰 상을 얻는다. 하늘의 면류관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뒤로 물러가는 자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싫어하신다. 아니 경멸하신다.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침륜에 빠져서는 안된다. 생각하고 끝까지 주님을 섬기는 충성스런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