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11:1] 믿음의 실체

'코이네' 2024. 3. 19. 21:20

믿음의 실체

 히 11:1-3

 

 

히브리서가 구체적인 적용에 들어가면서 이제 11장에 이르러서는 그 절정에 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박국서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하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적나나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히브리서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히11장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10장과 12장 사이에 있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믿음을 가지고 살던 자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으로 인해 하나 씩 둘 씩 떨어져 나가고 있는 현실을 보는 목회자의 심정은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약화되고 배교할 가능성이 점차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냥 주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자는 남아 있는 자들을 향해서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분투하며 살것을 권면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서 본문을 묵상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음이 약하여 넘어지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큰 위로의 말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뒤로 쳐저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더 이상 떨어져 나가지 못하도록 구체적인 믿음을 제시해 주고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을 소개하고 있으므로 이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마다 이 사람들처럼 믿음으로 살 것을 결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확인하시고 그 믿음을 소유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믿음은 실상입니다(1).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원어의 뜻을 보면 확신, 신임, 신뢰입니다. 이것은 언뜻 보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추상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본문에 이르기를 믿음은 단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허상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허상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기 때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믿음도 구체적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믿음을 좀더 세분해 보면 믿음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있고, 구원을 얻는 믿음이 있고, 믿음을 가진 자가 구체적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살아 있는 생활로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생각해 볼 때 믿음은 단지 추상이 아니라 실체적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믿음을 말할 때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며 하나님께 자기의 실존을 완전히 맡기는 것으로 표현을 하고 있지만(7:9참고) 신약에서는 예수를 하나니의 아들 주 그리스도로 신앙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승인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을 인정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 구약의 내용을 정리해서 조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예수님의 그리스도 주 되심을 인정하는 자들이 자신의 실존을 온전히 맡기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지 하나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의 생활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모습들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믿음은 소망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미래에 있을 일을 영적으로 이미 소유한 것으로 믿는 것이므로 반드시 소망과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망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이 믿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말하기에 앞서서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보지 못했으나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6:25-26의 말씀을 보면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새 영을 주는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 평강과 안위를 주는 하나님을 소망하고 그 하나님을 따르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약속한 것은 소망이요 그것이 확실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노아의 소망은 방주로 구체화 되었고, 아브라함의 소망은 가나안으로 떠나는 구체적인 행위를 낳았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소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당시의 성도들의 소망은 무엇이었으며 지금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무엇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 소망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믿음을 어떻게 소유하고 있습니까?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소망은 단지 육적인 것들로 내 만족을 채우는 것들과 연관되어져 있는 소망이요, 그것이 구체적으로 응답되기를 원하는 그런 믿음들은 아닙니까? 진정한 믿음은 단지 내 개인의 일들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소망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믿음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구체화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세상의 것들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황금신이 최고가 아니었습니다. 당리당약도 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한 사분오열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어떤 고난을 당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1:26에서 모세를 보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다고 했습니다. 3:13-18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사람의 감각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욕구를 잠재우는 생활을 했습니다. 셋째로 현실의 쾌락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은 곧 괴로움으로 화할 뿐입니다. 궁긍적 쾌락은 내세으 영화로운 것을 바라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진들은 소망을 가지고 그 소망이 지금 이루어진 것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허상이 아니고 실상입니다. 단지 마음 속에서 확신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 확신으로 인한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만큼 그것은 실상입니다. 이것이 살아서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실상이 아니기에 보여질 수도 없고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미래의 사실을 현재의 느낌으로 느낄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모든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실상이란 말은 휘포스타시스인데 이 말은 근거, 보증, 실체, 보증금, 권리증서란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본체란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고후 9:4,11,17에서는 확실한것으로 표현되기도 하였습니다. 실상은 단순한 상상이 아닙니다.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입니다. 현재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손으로 잡으리라는 확신입니다.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전적인 확신이요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오성을 확신시켜 대답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약속들이 장차 본질적으로 성취될 것이란 사실을 우리가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확신입니다. 믿음은 어떤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에 의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8:24,25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찌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포자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확실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10:17). 믿음은 모든 약속된 목적들을 성취하게 해줍니다.

 

 

2. 믿음은 증거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있고 들리지 않지만 소리는 나고 있는 일들이 허다함을 알아야 합니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지구가 도는 소리는 우리의 귀에 들리지는 않지만 분명히 굉음을 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볼 수 있는 한도 이외에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있는 한도 이외에는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듣고 보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나쁘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지요. 하지만 육신의 눈이 아무리 좋아도 배우지 않으면 학문적으로 풀어야 할 일들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학문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영의 눈이 뜨이지 않으면 영적인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고 이성의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믿음이 없이는 볼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있기는 한데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망원경의 강한 굴절률을 가진 렌즈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물을 보게 하는 것 처럼 믿음은 우리의 육체적 감각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을 마음으로 실감나게 해 줍니다. 모든 증거의 빛과 능력으로 영혼 앞에 레이져 광선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그림을 그려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이 있어야만 합니다. 믿음의 눈은 이성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줍니다. 보니까 증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노아에게 홍수를 약속할 때 노아와 당시의 사람들은 홍수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노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는 아직 홍수가 무엇인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홍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재로 120년 동안 배를 지었습니다. 배를 지으면서 모든 사람에게 홍수가 있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믿음은 행동이요, 증거를 보이는 것입니다.

 

증거란 말은 엘렝코스인데 이 말은 확신, 증명, 증험, 신념이란 뜻이 있어서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란 뜻도 있지만 또 이 안에는 꾸짖다, 책망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벧후 2:16, 딤후 3:16에서는 엘렝코스란 말이 책망이란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도록 책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발람에게 나귀가 입을 열어 책망했던 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좋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증거는 단순히 보여서 알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꾸짖어서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재판에 있어서 증인은 중요합니다. 증인이 없으면 무죄도 유죄가 되고, 유죄도 무죄가 됩니다. 재판에 지는듯 하다가도 증인이 나타나면 재판은 번복되기도 합니다. 우리 집사님 중의 한 분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자신은 교통신호를 지키면서 운전을 했는데 상대 차가 밀고 들어와서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상대측에서 하는 말이 자기는 신호를 지켰는데 이쪽에서 신호를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증인도 내세웠습니다. 꼼짝 없이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뒤에서 따라오던 차량이 그 상황을 보고서 증인으로 나서주는 바람에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증인은 중요합니다. 증인에게 필요한 것은 증거입니다.

 

선진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습니다(2). 믿음으로 증거를 했으며 그 증거로 인해 하나님의 증거를 얻었습니다. 증거를 얻었다는 말은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일하는 자들만이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증거하면 다른 사람도 확실히 증거를 얻게 됩니다.

 

우리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이 증거를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증거를 가진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증거를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증거를 얻기 위해서는 책망도 받아야 합니다. 때에 따라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픈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그 소리를 들을 때 원망과 미움을로 받지 말고 겸손히 순종함으로 받으면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성령의 책망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증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뒤로 물러가면 증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전진해야 합니다. 믿음은 전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