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12:1] 참 그리스도인의 인격 _김종일 목사

'코이네' 2024. 4. 8. 17:52

참 그리스도인의 인격

히브리서 121-3

 

 

 

저희 아버지는 세상 떠난 뒤에도 참 유명하십니다. 그저 농사 짓던 노인을 미국 유학생 사회에서까지 알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 아버지 이름이 난 것은 좋은데 덕분에 제가 손해를 많이 봅니다. 서울 시내 각 교회에 초빙받아 가면 저를 소개할 때 김용기 장로의 아들 김종일 목사라고 합니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안 그러겠지 했는데 여전히 고() 김용기 장로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만큼 유명합니다. 그 아들도 유명할 것 같지만 큰 나무 밑에서 작은 나무 자라는 것 보셨습니까 ? 큰 나무 밑에서는 작은 나무가 잘 안 자랍니다. 한데 큰 인물 밑에서 작은 인물이 커 간다는 말은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제가 살아온 인생살이를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태어난 때가 알고 보면 사실 굉장히 좋은 때입니다. 저는 일제 시대 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과 함께 다니는 공립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학교에 오래 다녔으면 일본 냄새가 났을 텐데 다행히 2학년 여름 방학 때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 사람이 지프 타고 지나가면 영어는 한마디 할 줄 모르면서 껌과 초콜릿은 잘 얻어먹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6.25사변이 났습니다. 저는 대학교 두 달 반 다니다가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팔자가 사나워서 최전방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때 압록강에서 머리도 감았습니다. 압록강에서 머리 감은 세대니까 꽤 살 만한 때 산 셈입니다.

저희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저도 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좋은 때 태어난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평했듯이 저도 좋은 시대에 태어났으면서도 사실 좋은 줄을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 예수만 바라보는 삶 ***

 

앞서 읽은 말씀을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운동 선수가 골인해야 할 목표 지점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봅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그 예수를 그리스도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 일이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저희 가나안 농군학교 안에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500명쯤 모입니다. 교회에서 날씨가 좋다는 것은 맑은 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날이 청명하면 교회에서는 안 좋은 날씨지요. 바람이 슬슬 불고 비고 한두 방울 떨어지면 교회에 많이 모입니다. 아주 청명하면 멀리멀리 나가고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안방에서 텔레비젼에게 예배드리는 판국입니다. 교인들이 예배드릴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자고 다짐하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설교도 자기 마음에 들 때는 듣지만 보통은 듣는 둥 마는 둥닙니다. 마지막에 목사가 축도하고 나면 옳다 됐다 하고 교회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어디로 가겠어요 ? 오늘은 냉면을 먹으로 갈까, 불고기를 먹으러 갈까 하면서 여기저기 음식점으로 막 흩어집니다. 주일 지나 월요일날 일터에 나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내 신분이 높아질까,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부유해질까입니다. 내 신분과 권력과 이익을 위해 무한 투쟁을 개시합니다. 월요일 아침부터 토요일 퇴근할 때까지 예수는 잊고 지냅니다. 그러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가슴을 치기 시작합니다. 지나간 일주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교회 와서 주여, 이 죄인이 지나간 일주일 동안 죄와 더불어 살고 죄와 더불어 먹었습니다.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다가 목사가 마지막에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아멘 하면 또 냉면 집이냐 불고기 집이냐 그럽니다.

10년을 예수 믿어도 20년을 예수 믿어도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개꼬리 3년 묻어도 황모(黃毛) 안 된다 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도 맨날 그 타령입니다. 그 결과 마침내 한국 기독교가 이 역사를 개조하는 추세 세력으로 발돋음하고도 남음이 있는 때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실행을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199453일에 국가 연례 조찬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김대통령이 내로라 하는 교계 인사들에게 한 말이 개혁이 제일 안 된 데가 종교계입니다. 였습니다. 기도회 참석자들이 몸둘 바를 모를 일이었습니다. 대통령 말씀이 끝나고 난 뒤에 그리스도인의 의식 개혁에 관한 주제 강연을 제가 했습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용기를 다해서 떠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바라본다고 하면서 다른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저는 성경에 언급된 지도자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아부라함형()이고 또 하나는 모세형입니다.

 

첫째/ 아브라함형

아브라함은 수많은 종과 가축과 재물을 소유한 엄청나게 유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의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입니다. 분명히 하나의 지도자상입니다.

둘째/ 모세형

모세는 사실 고아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부모 품이 아닌 공주의 아들로 왕궁에서 자랐으니까 말입니다. 그런 그가 애굽의 왕족 신분과 권력과 금은 보화를 다 내버리고 자기 민족과 더불어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였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자기 민족과 더불어 눈물과 한숨과 고통을 나눈 사람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였습니다.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1:7). 모세가 명한 대로 행하라는 말씀은 하나님도 모세를 아끼셨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아브라함도 훌륭하지만 우리 나라에 필요한 지도자는 모세형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어떤 사람입니까 ? 히브리서 1138절에 보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치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치수는 무엇입니까 ? 히브리서 1123-26절까지가 모세에 대한 기록입니다. 모세가 만약 애굽 궁중에만 있었으면 세 가지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왕족이라고 하는 높은 신분과 막강한 권력과 무진장의 금은 보화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치수입니다. 믿음의 치수는 무엇입니까 ? 모세가 세상을 내버리고 출애굽해서 자기 백성과 더불어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헐벗고 굻주리고 고통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동포들로부터도 지탄 받고 원망을 들었지만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을 향해 그 백성들을 이끌고 묵묵히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애굽을 떠납니다. 이것이 믿음의 치수입니다.

 

우리 나라에 한 가지 좋지 않은 사상이 있습니다. 개혁을 하려고 해도 개혁이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복()을 너무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무지하게 좋아합니다. 우리는 매맞아 죽을 짓을 하면서도 복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변에 복 자가 새겨진 물건이 얼마나 많습니까 ? 숫가락에도 밥그릇에도 방석에도 장롱에도 복이 넘칩니다. 또 흔히 쓰는 말도 보십시오. 복덩방, 복부인, 복바가지, 복조리, 복떡, 복이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 술집도 복자 들어간 집이 많습니다. 복 받는 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복에 대한 가치관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소위 복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어떤 때입니까 ? 명예와 권력과 부()를 얻었을 때입니다. 교육의 목표도 복 받는데 있습니다. 애들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 일류 대학 가서 미국 유학까지 마쳐야 한자리 차지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영재 교육이다 조기 교육이다 해서 코흘리개를 속셈학원에 보냅니다. 엄마들은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를 붙잡고 영어를 배워라, 컴퓨터를 배워라, 피아노를 배워라, 그림을 배워라 하며 들들 볶아 댑니다. 학교에서 힘 빼고 학원에서 시달리고 나면 얼굴이 노랗게 뜹니다. 그러면 저녁 때는 신경질만 남습니다. 인간의 치수가 점점 작아지고 있습니다. 저희 동네에서도 영어 조기 교육의 덕을 보기는 했습니다. 미국 사람이 왔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그때 국민학교 4학년 짜리가 나서서 통역을 했습니다. 미국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서 마을 이장하고도 얘기하고 농군학교도 소개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미국에서 살다 왔냐고 하니까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웠답니다. 그 미국 사람이 놀라면서 앞으로 세계에서 한국이 영어 제일 잘하는 나라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일제 시대 때 국민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저 어릴 때와 요즘 아이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15년 전 일인데 막내딸이 국민하교 5학년 산수 문제를 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원래 수학책을 보기만 해도 생()의 의욕을 상실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까짓 국민학교 5학년 산수를 못풀까 ? 하며 가르쳐 주려고 보니까 집합 문제였습니다. 저는 집합을 배우지 못한 세대입니다. 검은 것은 글씨고 하얀 것은 종이인 터라 언니한테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일본 유학까지 갔다왔다는 아버지가 이런 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저는 영어도 일본인 선생한테 배워서 발음도 실력도 엉망입니다.

현대 학문의 성과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지만 과연 우리 한국 사회가 얼마만큼 나아졌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도덕성이나 윤리나 인간 됨됨이나 가치 의식이 과거에 비해 수준이 높아졌습니까 ? 비록 영어 아닌 것을 영어라고 배운 그때와 국민학교 4학년 아이가 미국 사람이 놀랄 만큼 영어를 잘하는 이 시대, 과연 어느 쪽이 더 살기 좋은 사회이고 어느 쪽이 정말로 진리가 살아 있는 사회라고 생각합니까 ? 제 생각으로는 그때가 훨씬 나았습니다. 그때는 범죄율도 낮았고 이웃간에는 따뜻한 인간미가 넘쳐흘렀습니다. 신앙도 순수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점점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본능적인 경향에 항거할 줄 아는 데 있습니다. 본능적인 것에 항거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힘이라면 오늘날 왜 그리 많은 교육을 받고서도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름니까 ? 박한상 군이 미국 유학생 전부를 욕 먹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 딸도 지금 미국에 가 있습니다만 미국 유학했다고 다 부모 찔러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이 오염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강 물도 오염되었고 서울 공기도 대기 오염이 심해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런데 환경보다 더 오염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인 인간의 영혼입니다. 인간의 정신 상태가 오염되어 도덕 수준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이 인격 도야나 진리 탐구에 있지 않습니다. 공부가 오염된 탓입니다. 오로지 명예와 권력과 이익을 얻기 위해 공부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

 

*** 나의 신앙과 삶 ***

 

본문으로 택한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개의치 않는 삶을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살아온 삶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째/ 일 복 터진 어린 시절 저는 아버지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다섯 살 때부터 사람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13:24)는 원칙에 따라 조금만 아버지 뜻을 거스리면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회초리를 안 맞으려면 덮어 놓고 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섯 살 때부터 일을 했습니다. 일도 막노동입니다. 국민학교 4학년이 되니까 본격적으로 일을 시켰습니다. 특히 방학이면 더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데살로니가후서 310절을 암송하라고 하셨습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일 안 하고 밥 안 먹으면 죽는 일만 남는 겁니다. 죽음을 택할래, 일을 택할래 이렇게 나오는데 국민학교 4학년이 무슨 자살할 마음이 있어서 그것도 비참하게 굻어 죽겠습니까 ? 군소리도 못 하고 그냥 밭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더운 여름인데 점심 먹고 낮잠이라도 자고 나가면 어디 농사를 망친답니까 ? 오죽 더우면 학교도 쉬겠습니까 ?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이런 여유가 없었습니다. 점심 밥상 물리면 이내 일터로 전진입니다. 저는 속으로 어떤 놈이 방학 제도를 만들었어 ? 차라리 학교가는게 낫지 이 방학 때문에 내가 죽겠다 고 투덜 거렸습니다. 우리 고향은 팔당댐이 있는 양주군으로 성루에서 28km밖에 안 떨어져 있습니다. 그곳 개척지에서 500미터만 가면 강이 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다 강에서 신나게 노는데 나만 팔자가 사나워서 아버지 밑에서 땀 뻘뻘 흘리며 일하였습니다. 방학 초기에는 친한 아이들이 저를 부르러 옵니다. 이 아이들도 우리 아버지가 무서우니까 숨어서 내 이름만 부릅니다. 놀러 가자는 거지요. 저는 일부러 대답을 안 합니다. 아버지가 친구들의 소리를 듣고 어떻게 자비를 베푸실까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잠자코 있으면 아버지는 너 귀까지 먹었니 ? 저 소리 안 들리니 ? 뭐라고 대답해야 할 것 아니야 ?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십니다. 이것이 가란 말입니까, 가지 말란 말입니까 ? 저는 아버지의 마음을 다 읽었습니다. 제가 성이 나서 {못가}하고 소리 치면 곧바로 아버지의 준엄한 경고가 떨어집니다. 이런 못난 놈. 네가 못 간다 고 하면 이 아버지 체면이 뭐가 되니? 내가 너를 붙들어 묶어 놔서 못가는 줄 알 것 아니냐 ? 이왕이면 주체적으로 안 간다고 그래. 저는 국민학교 4-6학년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 놀아 본 적이 없습니다. 일만 했습니다.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기 위해 서울 올라갈 때도 참 아찔했습니다. 너 시험 잘 치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테니 안심하고 시험 쳐라. 이것이 보통 아버지들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저희 아버지는 안 그랬습니다. 나는 네가 불합격해도 좋고 합격해도 좋아. 사실 농촌에서 너 학비와 하숙비 대는 게 쉬운 일인지 아느냐 ? 떨어지면 오히려 학비 안 나가지, 하숙비 굳지, 나하고 일하지, 일석삼조(一石三鳥). 이것은 아버지의 공연한 협박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이었어요. 저는 청량리에 도착할 때까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제발 붙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중학교 입학 시험에 떨어지면 아버지 밑에서 강제 노역하다가 죽을 판이었습니다. 저는 드디어 중학생이 된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몇 배 더 좋은 것은 아버지 얼굴 안 보는 것이었습니다. 완전 자유 해방이었습니다. 소화가 그렇게 잘 될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는 밥 먹는 것도 완전 군대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가나안 농군학교에서는 식탁서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육사생도처럼 팔을 들어올리는 각도까지 맞추며 밥을 먹어야 합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해방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해방된 것은 좋은데 저 개인은 아버지하고 도로 합방이 돼 버렸습니다. 또 날마다 일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제2차 개척지로 이사를 했습니다. 청와대 옆쪽에 자하문이 있는데 그 문 바깥에 있는 부귀동이 2차 개척지였습니다. 6.25사변 전에는 그곳에 만 평이 넘는 자두밭이 있었습니다. 6.25사변 전에는 이렇다 할 관광지가 없었으므로 여름만 되면 전국에서 그 자두밭으로 놀러 옵니다. 이 자두가 꼭 7월 중순에 익어요. 여름방학도 7월 중순에 시작하지 않습니까? 저는 방학과 동시에 자두 따다 파는 신세가 됩니다. 8월 중순에 마지막 자두가 익어 내다 팔면 그 다음날이 개학입니다. 그러니까 방학이라고 캠핑을 갈 수 있습니까, 친구들과 어울릴 수가 있습니까? 6.25사변 전까지 그러니까 제가 중학교 6학년까지 거의 놀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만 일하면 괜찮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방학이라고 놀러 오면 핑계김에 저도 같이 놀게 해 주시면 좋지 않습니까?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아버지는 친구들을 앉혀 놓고 양자택일을 하게 하십니다. 사람이란 내 집에 있든지 남의 집에 있든지 일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너희들은 오늘 우리 집에서 점심도 먹고 집에 돌아갈 때는 자두도 한 자루씩 얻어 갈 것이다. 놀다가 밥 얻어먹고 자두 가져가면 거지고 4시간만 일하고, 밥먹고 자두 가져가면 당당한 거다. 너희들 거지 할래, 네 밥을 먹을래? 결국 친구들은 혼쭐이 나게 일하고는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소문이 나서 우리 집 근처에 얼씬거리는 녀석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에 있는 선교 단체에서 우리 아버지를 돕기 위한 모금을 했습니다. 모은 돈을 보내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가축 은행을 설립하라고 뉴질랜드 화이트 토끼 400마리를 보냈습니다. 새끼를 농민들에게 나눠 주고 그 사람들의 도장을 받아서 보내면 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400마리 토끼의 먹이 책임자는 제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제 공식 명칭을 양토 과장이라고 붙였습니다. 과장은 무슨 과장입니까? 제 밑으로 계장이 있습니까, 직원이 있습니까 ? 과장이든 일꾼이든 일하기는 마찬가지인 양토 과장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린 토끼라 얼마 안 먹더니 석 달쯤 지나니까 어마어마하게 먹어요. 학교 갔다와서 아무것도 못합니다. 오로지 풀만 베어야 합니다. 시험 기간에 좀 편해 보자고 토끼 주둥이를 아카시아 나무가지로 다 찔러 놓은 적도 있는데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탄로 나서 아버지한테 꾸중만 잔뜩 들었습니다.

그렇게 일만 하다 대학에 들어갔는데 하필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학과에 합격해 등록금도 겨우 받았습니다. 그나마 두 달 반 다니고 6.25사변이 터졌습니다. 안팎으로 재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6.25사변 중에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때 금강산 밑에서 적군에게 일주일 동안 포위당한 적도 있었는데 그 군대 생활이 좋았습니다. 어디 가든지 아버지 안 계신 데가 천당입니다. 휴전이 되어 3년 만에 제대를 하게 되었는데 저는 제대하기가 싫었습니다. 농장에서 일하는게 그만큼 힘들게 느껴졌던 겁니다.

 

둘째/ 아버지의 대()를 잇는 아들 우리 형제들은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내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남의 부모 사랑한다는 것은 위선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내 부모를 사랑할 줄 아는 자가 이웃도 사랑하고 나라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32녀인데 맏이인 제가 대표로 아버지 앞에 서약한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 뒤를 잇기로 서약한 것인데 그때는 사실 울며 겨자 먹기로 했습니다. 제 때문에 동생들은 완전히 도매금으로 넘어간 셈입니다. 5남매의 배우자를 합치면 10명이 됩니다. 그 중에서 9명이 지금 가나안 농군학교에 있습니다. 막내 한 사람만 대학 교수로 서울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도 연구 실장으로서 농군학교 일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개척자라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고, 놀 것 다 놀고, 할 짓 다 하고는 개척자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개척자 가정 수칙 27개 항목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외형(外形)을 줄이는 항목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은 짧게 깎는다. 머리에 기름 바르지 않는다. 신사복 입지 않는다. 넥타이 매지 않는다. 구두 신지 않는다. 5개 항목이 외형을 줄이자는 항목입니다. 사람들이 제 외모를 보고는 등소평, 아니면 김일성 닮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 별명도 김정일, 김일성, 모택동, 워 그런 식입니다. 제가 아버지 앞에서 서약한 지 40년이 되어 가지만 한번도 이 수칙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히브리서 121-3절을 본문으로 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개척자가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참으사 브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을 살려내는 일을 한다든지, 이 나라 국토를 개발하는 일을 한다든지, 이 나라 농촌이 살 수 있독록 농민들을 위해서 일을 한다든지 할 때 특별한 다짐과 생각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저는 1965년도에 일본에 공부하러 갔는데 3년 동안 고무신 신고 공부했습니다. 요즘은 운동화를 신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가죽 구두를 신은 일이 없고 또 신을 마음도 없습니다. 외형을 줄이는 것은 사실 쉽습니다. 부끄러움만 개의치 않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먹는 것에 관한 제한은 좀처럼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나안 개척자의 음식 조항은 이렇습니다. 흰쌀밥 먹지 않는다. 떡 해먹지 않는다. 생일 잔치 폐지한다. 명절 잔치 폐지한다.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먹지 않는다. 커피 마시지 않는다. 저는 흰쌀밥 먹지 않는다고 해서 적당히 잡곡을 섞어 먹는 줄 알았더니 쌀을 전혀 안 먹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순 꽁보리밥을 먹이는데 한 사흘 먹고 나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나중에는 식생활 개선한다고 아침에 꽁보리밥, 점심에 빵, 저녁에는 고구마를 먹었습니다. 먹을 게 떨어져 아침 점심 저녁을 고구마만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만 석 달을 그랬습니다. 그 기분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우리 형제들이 고구마 먹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를 하러 다닐 때 그럽니다. 눈물 젖은 고구마를 먹어 보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생일 잔치를 폐지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너 생일 잔치 해먹을 자격 있어? {무슨 말씀입니까 ?} 생일 찬치라는 것은 축하식인데, 너 국가를 위해서 뭐 공로 세운 것 있어? {없습니다.} 지역 사회를 위해서 한 일 있어? {없습니다.} 가정을 위해서 한 일 있어?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축하식을 해 줘? {안 해먹는 것이 옳습니다.} 말 똑바로 해. 안 해먹어, 못 해먹어? {, 못 해먹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생신상 한 번 안 받으셨습니다. 우리 식구 모두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소보다 나으면 쇠고기 먹고 돼지보다 나으면 돼지고기 먹고 닭보다 나으면 닭고기 먹으리고 하셨습니다. {사람인 제가 소 돼지만도 못하다는 말씀입니까?} 너 큰소리 치지 말어, 너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사람 때려 본일 있어 ? {.} 거짓말한 적 있어 ? {.} 그러면 네가 먹고자 하는 소가 사람 때리는 거 본 일 있어 ? 돼지가 사기 치는 거 봤어? {못 봤습니다.} 사람을 때리고 거짓말한 놈이 그런 거 할 줄 모르는 소 돼지 먹을 양심이 있나, 없나? {없습니다.} 그러면 먹지 말어. 이유가 간단하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 또 다른 이유는, 가난한 농민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농민 운동 한다는 사람들이 고기 먹고 배 두드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만 25년 동안 고기 안 먹다가 26년째 가서 파계를 했습니다. 동창생들이 제가 시골서 고생한다고 저녁을 사 주는데 불고기 백반이었습니다. 저는 주저할 것 없이 마구 먹었습니다. 아버지가 보지 않으니까 그 동안 못 먹은 것 보상하듯이 실컷 먹었습니다. 한 번 먹으니까 그 뒤로 먹을 일이 자주 생겼습니다. 저는 아버지한테 이 일을 고백하고 그 다음부터는 고기 먹는 걸 허가받았습니다. 동생들도 집에서는 고기를 안 먹지만 밖에 나가서는 몰래 먹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일에 원칙에 충실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극장도 한 열 번 갔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지키지 못한 것은 다 고백했습니다. 아버지가 또 한 가지 강조하신 것은 일은 내가 먼저 하고 명예는 남에게 주라 는 것이었습니다. 명예로운 공직 생활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공무원은 저 아니라도 할 사람이 많이 있다고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면 서기도 못해 보았습니다. 동네 이장도 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대학 동기 동창들이 출세하는 것보면 참 부럽습니다. 고등고시에 합격해서 판사 되고 지방법원장된 친구들이 있습니다. 나보다 공부 잘하던나사람이 출세하는 것은 덜 섭섭한데 저보다 공부 못하던 사람이 막 출세하는 것을 보면 눈에서 유황불이 나오려고 그럽니다. 나는 아버지를 잘못 만나서 이렇게 시골 구석에 쳐박혀 있구나 하다가도 요즘에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크냐를 놓고 자주 다투었습니다. 이 세상 대부분의 문제는 누가 높으냐, 누가 크냐, 누가 많이 가졌느냐의 싸움 아닙니까 ? 이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아 선언은 이것입니다.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20:28). 남을 섬기고 목숨까지 내놓는 것이 메시아 선언입니다. 우리는 명예를 위해서 신앙을 팔아먹고 돈을 위해서 교회를 팔아먹고 어떠한 불의한 일에도 협력하면서 교회에 나와서는 거룩한 찬송가를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는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 얼굴을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고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하신 주님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말고 올바른 신앙 생활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