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7:4] 높은 제사장

'코이네' 2024. 3. 5. 17:38

높은 제사장 

7:4-10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의 제사장 위치는 아론의 반차와는 달랐다. 그는 인간이나 왕으로 높은 것이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더 위대하였다. 그의 직위는 높은 제사장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은 고귀한 것이다. 직분은 곧 소명이다. 그러므로 직분을 가진 자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 독일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아르바이트라고 하는데 이 것은 그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소명을 가지고 한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은 소명을 가지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직분은 고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고 했다. 그의 제사장 직위가 얼마나 높은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멜기세덱의 대제사장직의 높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의 직분은 이전의 것보다 더 우월한 것이었다. 이것을 통해서 직분의 고귀함을 알아야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고귀함을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고 살펴보는 것은 신앙에 큰 유익이 된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할 때도 자세히 살펴보고 기록했다고 했다. 복음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므로 진리를 부지런히 탐구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복음 선포도 의미가 없다. 이 시간에는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어째서 높은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높은 제사장 직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1.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았다.

 

멜기세덱이 높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았다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음을 좇는 자들의 조상이었다(4:12). 유대인들은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은 모든 백성의 뿌리요, 조상이요, 다른 민족으로부터 처음으로 분리된 그들 자신의 민족의 시작이었다. 그는 약속과 계약을 처음으로 받은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족장의 통치자요 최고 실력자였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하나님 다음으로 여겼다. 아브라함은 존영의 사람이었다. 육체적으로는 유대 민족의 선조로서 영적으로는 모든 믿는 자의 아비로서 분명 존영의 사람이었다. 아브라함 전에도 믿음의 조상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브라함을 내세우는 것은 아브라함이 분명하고 확실한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일들이 하나님의 맹세로 확증되어지고 그를 통해 약속의 씨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그가 받은 약속은 교회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존영의 사람이었다. 이런 존영의 사람 아브라함이 머리를 숙이고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그 십일조를 받은 사람의 직위가 어떠함을 보여준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그 십일조를 받는 사람에 대한 직무적 존영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멜기섹덱이 하나님의 권위에 따른 제사장임을 인정했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렸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앞에 엎드리는 자들이다. 세상의 눈은 사회적이고 정치적 지위를 가진 자, 세속적이고 풍요로운 자를 부러워하지만 기름부음 받은 눈은 영원한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이 복종할 수 있는 사람, 십일조를 드리면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은 분명 아브라함보다 더 존귀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특별히 멜기세덱이 십일조를 받은 것은 여기서받은 것이 아니고 저기서받은 것이라 했다. 이것은 그가 죽을 자로서 받은 것이 아니고 산다고 증거하심을 받은 자로서 받은 것이다. 생명의 영원한 존재로 받은 것이다. 시간적 제한이 없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어느 누구도 그의 일을 계승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존영의 사람이요, 하나님이 세우신 높은 제사장이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 위에 뛰어난 가장 높으신 왕이요 제사장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십일조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18:24,26). 하나님께 드려지는 십일조는 제사장이 취하여 사용하였다(18:21,22). 십일조는 축복의 약속이었다(3:8-12).

 

구약에 기록된 십일조에는 몇 가지의 종류가 있다. 미쉬나에서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첫째는 큰 예물이다. 이것은 처음 익은 곡식 중 일부를 제사장에게 갖다 주는 것이다. 18:4-5에 보면 처음 곡식, 포도주, 기름, 처음 깎은 양털 가운데 일부를 제사장에게 주었다. 둘째는 첫째 십일조다. 이것은 레 18:21-24에 나오는 것으로 큰 예물을 뗀 후에 나머지에서 십일조를 떼어서 레위인들에게 주었다. 셋째는 둘째 십일조다. 이것은 레 27:30-31에 나오는 것으로 첫째 십일조를 제외한 것에서 십일조를 또 떼어서 제물로 불사르는 것이다. 넷째는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다. 둘째 십일조는 1, 2, 4, 5년 차는 불살랐지만 3, 6년 차는 불사르지 아니하고 그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었다. 이것이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였다. 이렇게 십일조는 네 가지가 있었다.

 

십일조는 창세기에 처음 기록되었지만 모세가 받은 시내산의 명령에 의해서 구체화 되었다. 신약에서는 십일조에 대한 개념이 약한 것 처럼 보이지만 예수님도 십일조에 대한 찬성의 입장을 보이셨다(11:42, 23:23참고). 십일조는 온전하게 드려져야 한다. 물질의 양에 있어서만 온전할 뿐 아니라 그 마음도 온전히 드려져야 한다.

 

십일조를 드리는 자의 자세가 중요하다. 온전한 자세로 드리기 위해서 가져야 할 몇 가지 기본 방침이 있다. 첫째는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 십일조를 축복의 조건으로 생각해서 계약금을 드리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둘째는 헌신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드려야 한다. 셋째는 좋은 것으로 아니 더 좋은 것으로 아니 가장 좋은 것으로 구분해서 드려야 한다. 드리기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드려야 한다. 넷째는 정확히 드려야 한다. 다섯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사랑이 없이 의무로 드려지는 것은 가인의 제사와 같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 드려지기는 했으나 하나님께서 받지는 않으셨다. 드려지기는 하지만 받아지지 않는 예물과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 여섯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감사로 드려야 한다. 일곱째는 자원하여 드려야 한다. 억지나 인색함으로 해서는 안된다.

 

온전한 십일조가 믿음이 부족하므로 못드려진다든지 인가귀도되지 않으므로 못드려질 때는 작은 부분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예를들면 주정헌금이나 월정헌금으로 드려질 수 있다. 이런 헌금은 성경에 없는 것이라 하여 반대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연약한 믿음이 훈련을 통해서 강해질 것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정헌금이나 월정헌금이 온전한 십일조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서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우리가 드려야 할 극히 작은 것 중의 일부다.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근채와 외향의 십일조까지 다 드렸다. 선물 받은 것도 구분하여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하지 않았다. 중요한 정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십일조의 정확성보다 드리는 자의 마음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드려지는 십일조는 온전한 것이 아니다.

 

 

2.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

 

멜기세덱이 높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두 번째 증거는 그가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었다는데 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 복을 빌어 주었는데 복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향하여 빌어주는 것이다. 거지가 동냥을 받고 복받으라고 하는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대 사회에서는 축복을 빌 때에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하였다. 부모가 자식에게 복을 빌었지 자식이 부모를 위해 복을 빌지는 않았다. 멜기세덱은 직무상에 있어서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였기에 복을 빌어줄 수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모두를 능가하는 높으신 분이시기에 스스로 십일조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 친히 복을 주실 권리를 가지고 계셨다.

 

여기서 말하는 높고 낮음은 세상적 권력의 높고 낮음이 아니요, 인격의 높고 낮음이 아니다. 영적인 국면에서 마치 땅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자도 제사장을 개인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목회자가 주 안에서 자기를 다스리는 자임을 인정하므로 높고 낮은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을 축복하라고 명령하셨다(6:23). 또한 제사장이 축복하는 사람은 복을 받게 된다고 약속도 하셨다. 축복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사람을 쓰신다. 성직자는 영혼의 회심과 교화를 위한 말씀의 선포와 교회를 축복하는데 쓰신다. 특히 그리스도를 받은 자들에게 축복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축복은 사람의 축복이 아닌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제물을 드리는 축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었듯이 그는 백성들을 축복할 때 다름 아닌 최고 높으신 하나님의 사역자요 특사였기 때문이다(J. Calvin). 제사장에 의해서 제시된 축복은 하나님의 용납과 인정을 받는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의 용감을 인정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정이었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은 제사장으로 복을 빌어 주었다. 의의 왕으로 복을 빌어 주었다. 복을 빌어준다는 것은 공적 존귀를 받은 사람이 사적으로나 목회적으로나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천거하는 엄숙한 축복의 기도다. 이삭의 축복이나 야곱의 축복은 그 실례가 된다(27:27, 48:15). 지금의 축도는 그것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아브라함은 그런 멜기세덱에게 축복의 기도를 받기를 원했다. 자기의 신분이 아무리 고귀하다고 하더라도 성직 앞에서 축복의 기도를 받기를 원하는 것은 순수한 믿음의 표현이다.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은 더 높은 제사장임에 틀림이 없다. 지금도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예수님은 만유 위에 가장 높으신 대제사장이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3. 레위인에게도 십일조를 받았다.

 

멜기세덱에 높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들에게까지도 십일조를 받았다는데서 알 수 있다. 십일조는 레위인 만이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기세덱이 레위인이 아니면서도 레위인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았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고귀한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만민에게 십일조를 받으시는 예수님은 얼마나 고귀한 분인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고귀한 분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결론을 유추하게 한다.

 

그러나 사실 레위인이 직접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은 아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행위가 레위인의 것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위인들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 유대인들의 개념에 의하면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선조와 관계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레위인의 것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아담의 범죄가 모든 인류의 죄가 되고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모든 사람의 구속을 이룬 것과 같다.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레위인의 십일조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개인적으로 십일조를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대표자로서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이런 관계 하에서 아브라함과 레위인은 십일조를 드렸고 멜기세덱은 십일조를 받았다. 모든 이로부터 십일조를 취하시는 이는 예수님이시다.

 

멜기세덱은 십일조를 받았다. 받아야 할 것을 받지 않는 것도 직무유기다. 받는 것은 직무다. 자기의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사소한 핑계로 포기하는 자는 봉사해야 할 때 사소한 핑계로 직무를 소홀히 하는 것과 같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자신의 임무에 타락한 것을 변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의 보수를 소홀히 했던 때도 있었다.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받을 것을 받고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멜기세덱은 십일조를 받았고 십일조를 받은 자로서 축복하였다.

 

 

결론을 맺는다.

 

멜기세덱은 예수님의 모형이었다. 예수님의 모형인 멜기세덱은 유대인의 자존심인 아브라함보다도 모든 제사를 집무하던 레위인보다도 더 높은 직위였다. 그의 축복은 곧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물보다 높으신 제사장이시다. 그 분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복빌어줄 특권도 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일부만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중간에 다른 사람을 거치지 않고 직고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분의 제사장직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모든 것을 고백하고 용서함 받으므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더 높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아뢰고 그 분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