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빌립보

[빌 1:27] 함께 나눌 때 얻는 유익 _김서택 목사

'코이네' 2023. 4. 22. 12:44

함께 나눌 때 얻는 유익

본문 : 빌 1:27-30

설교 : 김서택 목사 

 

 

 

수년 전에 우리 나라가 한창 대통령 선거 때문에 정치인들이 이합집산하고 이 입장 저 입장등으로 시끄러울 때 우리 나라 사람 전체를 전혀 이견없이 하나로 묶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월드 컵 예선전에서 우리 나라팀이 일본과 싸워서 역전승을 거둔 일입니다. 아마 그때 우리 나라 사람 어느 누구를 붙들고 물어도 대답은 하나였을 것입니다. 즉 다른 것은 몰라도 일본만큼은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나라 사람 안에는 일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있고 그런 점에서 모든 한국 사람은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축구장에서 태극의 마크를 달고 뛰는 선수들은 바로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기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같은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이라면 빌립보 교인들은 아마도 그리스 사람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들을 하나로 강하게 연결시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복음 안에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이 당시에 빌립보 교인들은 신앙 때문에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는 원래 유대인들이 그렇게 많은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핍박이 유대인들로부터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로마식의 삶의 방식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주위 사람들의 비난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핍박이나 비난에 대하여 빌립보 교인들이 담대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사실 자체를 대단히 부끄러워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위 사람들의 비난과 핍박에 대하여 마치 자신들의 인격에 문제가 있고 자기들이 처신을 잘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핍박이나 비난을 듣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하여 위축되거나 자기 자신을 책망하지 말고 감옥에 있는 나처럼 담대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식.

 

사회가 도시화되면서 잃어버린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됩니다. 과거에 농촌에 살 때에는 이웃은 그야말로 좋을 때나 기쁠 때나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촌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도시화가 되면서 이웃이 너무 흔해져 버리니까 반갑기보다는 오히려 귀찮은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성탄절이 되면 새벽송을 돌았습니다. 교인의 집을 찾아서 멀리 걸어가서 찬송을 부르면 교인들이 아주 반갑게 나와서 선물을 줍니다. 그러면 그것을 자루에 넣어서 다음 교인 집으로 갑니다. 어떤 분들은 새벽송 오는 것을 기다리느라고 거의 잠을 자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보면 다른 교회에서 불을 들고 새벽송을 도는 것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길에서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어두운 밤에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요즘은 같은 크리스챤을 만나도 별로 반가운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지하철을 탔는데 어떤 한 청년이 올라타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 내용이 흔히 보던 이단적인 것과는 달리 아주 복음적이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선뜻 반갑게 대하지 못했습니다. ‘할렐루야!’라고 해 주었더라면 참으로 힘이 되었을텐데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그렇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요즘 우리가 잃어버린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한 이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같은 그리스도인의 소중함입니다.

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기서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에서 합당하게 생활하다라는 말이 하나의 단어인데 아주 특별한 단어입니다. 좀 길게 설명하면 어떤 나라의 시민이라는 시민의식을 가지고 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 사람은 영국 사람이라는 시민 의식이 있습니다. 서구에 가 보면 그 사람들은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줄 서기를 잘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 보아도 우리는 화장실 문 바로 문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지만 그들은 입구에 한 줄로 서서 아무데나 비는 곳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거기서 새치기를 한다거나 질서를 지키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그들은 속으로 그 사람을 무시할 것입니다. 한번은 우리 한국 학생이 버스에서 같은 한국 아이와 한국말로 크게 이야기 하니까 옆에 있는 영국인이 참견하기를 영국에서는 영어로 말을 하라고 핀잔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영국인답게 행동하는 것이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그 나라 사람이라는 자부심과 긍지가 있기 때문이지요. 한때 우리 나라 사람이 미국에서 한국 사람 행세를 하지 않고 일본 사람 행세를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이 한국인인 것이 싫고 그것을 드러내기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식과 자부심을 가지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대되는 그런 행동 양식을 저버리지 않는 방식으로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인식으로 생각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다는 인식입니다.

좀 쉬운 말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의 자화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자신을 실업자로만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재수생또는 어떤 때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는 식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 내지는 건전한 자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귀한가 하는 그런 인식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갑자기 그리스도인의 인식에 대하여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최근에 받는 신앙적인 박해와 관계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엄청나게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만나기를 원했으며 그에게 헌금을 보낼 때에도 모두 기꺼이 동참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빌립보 안에서 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를 꺼리고 때로는 좋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인하여 필요이상의 깊은 상처를 받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좋지 못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이 사회적인 비난을 받는 이단의 활동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종말론이 우리 사회를 한번 휩쓸고 갔을 때 텔레비젼 방송은 개신교 교회의 예배드리는 장면을 방영했습니다. 그런데 주로 손뼉을 치면서 열광하는 거의 광신적인 장면에 초점을 맞추어서 방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일반인들은 주로 그리스도인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대단히 비상식적인 광신자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지만 일반인들은 이단과 기독교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신앙도 이단으로 오해받을까봐 겉으로 드러내지 못할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비슷하지만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사회적으로 별로 기여를 하지 못하거나 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지탄받는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엄청난 돈을 착복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오면 그리스도인들은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대통령이 크리스챤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문민정부가 경제 정책에서 실패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대통령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부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느 한 스님이 소쩍새 마을이라고 해서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돌보는 수용 시설을 운영했는데 실제로는 성금 대부분을 착복하고 여자아이들을 추행했다가 중국으로 도망쳤다가 잡혀 왔을 때 그는 그 동안 불교에서 한 좋은 모든 일을 혼자서 다 까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마 거의 대부분의 스님들이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 비난을 받을 만 하니까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이 당한 핍박은 이런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받는 핍박이었습니다. 빌립보시는 작은 로마라고 말할 정도로 로마화를 추구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도시가 로마 보다 더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시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시 전체를 우상이 덮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저기에 우상들이 새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상 앞에 향불을 피우고 절하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남성다운 것이 그런 우상앞에서 맹세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인들은 빌립보 사람들의 이런 성향을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배운 대로 새로운 삶을 방식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원형 경기장에서 사람을 죽이는 검투 게임도 가지 않고 혹은 우상의 제물이나 술 파티같은데도 참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거의 사회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빌립보시에서 바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빌립보 교인들을 실제로 바보 취급을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노골적으로 조롱을 당하거나 실제로 상거래를 하는데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앞에 끌려가서 심문을 당하기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빌립보 시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핍박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낸 반응이 무엇입니까? 너무나도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핍박이 나타난 것은 전부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자책을 하면서 스스로의 신앙을 부끄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통하여 격려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코 그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결과 당연히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오히려 이런 핍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더 그리스도인으로 긍지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2. 개인적인 인격과 신앙적인 핍박.

 

우리는 분명히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핍박받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욕을 얻어먹는 것도 신앙적인 핍박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인격적으로 완전한 성자가 다 된 줄로 생각합니다. 평신도들이도 그 정도이니 저같은 목사는 거의 예수님 수준에 와 있을 줄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아직 전혀 성자가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신앙을 가지지 않은 도덕가 보다 못한 행동이나 마음가짐을 가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더 못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성자가 되어야 하며 남을 위하여 자기 몸을 던지는 희생하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이나 혹은 목사인 것을 나타내었다가 혹시 불미스러운 말이나 행동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실망을 준다면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에 아예 말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알려져야 한다면 시인을 해야 되겠지만 그렇지 않는 이상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고 싶어합니다.

사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직 만들어져 가고 있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닮기에는 너무나도 멀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을 너무나도 많이 닮지 못했습니다. 너무 조금밖에 닮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성령 충만할 때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사실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비사교적입니다. 분명히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그들과 좋은 관계에 있었습니다. 어울려서 사는데 전혀 이상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안 후 갑자기 세상이 나에게 생소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막 출옥을 해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야 하며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는 출옥수와 같습니다. 그래서 주로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는 문제들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일 우리가 완전히 성숙해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이 훨씬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와 같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추스리기에도 힘든 처지입니다. 마치 자폐증에 걸린 아이와 같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보기는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완전히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고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용납해 줄 때 말도 술술 나오고 웃기도 하고 부드러워지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자기를 거부한다는 생각이 들면 금방 마음이 닫혀서 웃지도 않고 대화도 잘 통하지 않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과의 갈등에서 겪는 문제는 인격적인 미숙과 진리 자체가 가지는 특성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인격적인 미숙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그리스도인이든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어린아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른이 된 사람이 없듯이 신앙적으로 이런 자폐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말 구제 불능의 문제아 시절을 다 거쳐서 눈부시도록 성숙된 한 사람의 크리스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빨리 인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성장하며 이런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훨씬 덜 경직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믿는 것 안에는 일단 지금까지 친숙했던 모든 사람들과 모든 환경에서 차단되어 자폐아가 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들을 찾아가기 이전에 반드시 이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지금까지 나를 키워주셨던 선생님, 그리고 뜻을 함께 나누었던 친구들과 도저히 하나될 수 없는 분리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복음에는 은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던 모든 것과 분리되던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분리되는 아픔이 없으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직 세상 사람들과 장 통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다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을 내 자신도 인지하고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때때로 알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아직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부족한 저를 제발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겸손일 것입니다.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을 자신의 인격적인 부족이라고 탓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존심에서 나온 소리입니다. 오히려 이런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때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3. 다른 그리스도인의 도움이 필요한 이유.

 

여기에 사도 바울은 그들이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른 성도들과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7절중,28,“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 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왜 사도 바울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일심으로라는 말은 원어 그대로 직역하면 한 영으로라는 뜻이고 한 뜻으로라는 말은 한 혼으로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같은 뜻입니다. 축구 경기를 할 때 선수들은 모두 한 영으로 열심히 자신의 포지션을 지키고 최선을 다하여 상대방의 골문을 두드립니다. 모두 한 영이고 한 뜻입니다. 배구 시합같은 것을 봐도 여섯 명의 선수들이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되어서 수비도 하고 공격도 하고 있습니다. 일심으로그리고 한 뜻으로서서 협력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운동 경기와 똑같습니다. 적은 약한 쪽을 치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 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이 아무리 잘 하더라도 결국은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울 때는 더 자주 만나야 합니다. 일단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굳어 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집니다. 제 같은 경우에는 구제 불능으로 마음이 굳어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완전히 신앙적인 자폐증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면 거의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전도사가 아니라 목사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로는 방어적이며 때로는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저의 마음을 치료했는가 하면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청년들이나 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단 저를 용납해주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저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나의 아무리 시시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잘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어떤 격식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소리를 해도 잘 용납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제 안에 있는 상처가 치료되면서 자신감이 조금씩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실수를 해도 되는 분위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단 거기서 자신감이 생기니까 다른 분위기에도 좀 더 쉽게 적응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저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비하면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건강해졌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집에서 실수를 해야 합니다. 실수가 용납될 때 아이는 담대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가 너무 완벽한 것을 요구하면 아이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결국 정서적인 어린아이가 되고 맙니다.

두 번째는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면 이것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가장 침체될 때가 언제인가 하면 이런 어려움은 나에게만 닥치는 것이며 나만 재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위험한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해 보면 다른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경험들을 한번씩 다 했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 보다 훨씬 더 기가 막힌 상태에서도 더 행복하게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신뢰를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면 아무 것도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마음 문을 닫아 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면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대우해 주셔야지 어떻게 저런 사람들처럼 나를 취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독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는 우월감입니다. 자기가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죄인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정말 내가 별 볼 일없는 죄인이라는 것이 인정되기 전까지 하나님의 은혜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것 자체가 아주 무서운 죄성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다른 성도들의 기도로 나를 어려움에서 건지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얼마나 떨어져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 나의 사정을 누군가가 알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어려움에서 건져 주십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교통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0,“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싸움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의사소통입니다. 그래서 만일 통신이 두절되면 그들은 고립된 것이며 어떻게 살아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만일 아무리 적들이 에워싸고 있다 하더라도 통신만 살아 있으면 본부에서도 도울 수가 있고 또 자신들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전에 탄광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매몰되었는데 한 사람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마침 전화가 끊어지지 않아서 그것으로 바깥에 있는 구조대와 연결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일거수 일투족을 서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조대가 어디까지 구멍을 뚫고 들어 왔는지 알고 있었으며 구조대도 다른 엉뚱한 곳에 정력을 낭비하지 않고 바로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직행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통신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교적 서로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냥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지금처럼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상당히 여러 날에 걸려서 누군가가 직접 오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과 통신을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대단히 상세한 지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재빨리 해야 할 일은 통신망을 가동시키는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을 알면 알수록 좋습니다. 그런 것을 미안하다고 생각하거나 짐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약한 쪽을 파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전심으로 그 쪽을 틀어막아야 게임에서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막는 특수 기동대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한쪽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그 쪽으로 막다가 그 다음에 다른 쪽에 어려움이 생기면 전선을 그 쪽으로 잽싸게 옮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는 든든합니다. 자기 시간이나 자기 스케쥴 같은 것이 없이 오직 주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긴 특공대원이 있어야 합니다.

 

4. 핍박하는 자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할 이유.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나를 신앙 때문에 미워하면 그 사람이 자꾸 무서워집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대로 그 사람일 피하게 되고 혹은 그 사람과 타협하고 싶은 생각도 들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핍박하는 자를 전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8,“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를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 난 것이니라

우리가 핍박하는 자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핍박할 만한 힘이나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힘이 없는 사람은 감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핍박하는 자는 나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는 나를 집에 있게 할 수도 있고 내어쫓을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나가라고 한다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쫓겨 나가야 합니다. 때리면 맞아야 할 입장입니다. 그런데 왜 핍박하는 자를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일단 핍박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선 그 첫 번째 이유는 그가 나를 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믿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습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그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마치 바로를 파리나 개구리나 이로 굴복시키셨듯이 그런 방법으로 굴복을 시키실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예전에 나의 친구요 나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사탄의 졸개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본능적인 충동에 따라 짐승처럼 행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그 사람을 사용하고 있는 마귀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사람에 대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게 됩니다. 우리는 결코 어느 누구의 원수도 갚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원수갚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습니다. 남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갈등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위치에 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대적하는 일이 생기는 이유는 바로 그런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위치에 놓으려고 하는 교만을 우리가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적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구원의 증거요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같은 가족 안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분리는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잘 적응해 보려고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과 갈등의 관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내가 구원받는 백성이며 나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증거로 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사실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하면서 참된 신앙을 핍박하는 것이 더 교활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같은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 있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는 진정한 신앙을 우습게 알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나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핍박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만큼만 내게 미치게 될 것이며 타협하거나 굴복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로마의 줄리안 황제 때 어떤 사람은 화형 당할 것이 두려워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집에 불이 났을 때 빠져 나오지 못하고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혹시 진정으로 회복될 사람인데 일시적으로 서로 깨닫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킨다면 하나님께서 모두 다 아름답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