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빌립보

[빌 2:9] 하나님이 높이신다 _김서택 목사

'코이네' 2023. 4. 22. 12:39

하나님이 높이신다.

2:9-12

설교 : 김서택 목사 

 

 

 

영국에는 높은 지위에 오르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출생에 의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오르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 영국의 다이아나 황태자비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을 때 전 세계 신문은 두 명의 소년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 소년들은 바로 찰스 황태자의 두 아들 인제 그 중에서 큰아들 윌리엄이 장차 영국의 왕이 될 사람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세상에서 존귀해지는 것이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귀족의 집안에 태어나면 귀족이 되는 것이고 왕의 집안에서 태어나면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 세상에서 존귀한 자리에 오르는 것이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가끔 신문 광고에 보면 과거 영국 대쳐 수상의 어렸을 때 사진이 나옵니다. 그는 거저 평범한 여학생이었고 그렇게 대단한 가문의 출신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머리와 노력으로 영국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여왕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여왕보다 더 실권이 있는 자리로 올랐습니다. 영국은 재미있는 것이 존귀한 자리 중에서 어떤 것은 신분으로 얻어지고 다른 어떤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은 피라미트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권력의 상층부에 오르면 오를수록 그 자리가 훨씬 더 작아지고 그런 곳에 오르려면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능력이 있어야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운도 작용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출생이 아니라면 능력 플러스 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낮아질대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서 가장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이 본문이야말로 기독교의 진수이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토록 찬양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죽어버렸고 한번 끝난 인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높이실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1. 모든 존귀는 하나님으로 부터.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경험하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의 운명은 한번 정해지면 바꾸기 어렵고 그래서 어떤 사람의 삶도 한번 망쳐지면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번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저주를 받아서 죽은 사람을 다시 존귀한 자리에 오르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가장 큰 의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모든 존귀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말씀하시기를 위에서 주시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으리라”(19:1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권력은 다 하나님의 것이며 위정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도 모두 하나님께서 빌려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얼마나 권세가 높은지 공중에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고 합니다. 사실 높은 권좌에 앉아 있는 사람은 쉽게 만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만나도 감히 쳐다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도 그 자리에서 은퇴하고 난 뒤에는 거저 평번한 한 아저씨게 불과한 것을 보면 실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부모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 아이들이 부모님을 보면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부모님의 권위가 거의 절대적인 권위입니다. 부모님이 그토록 위대하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영광의 일부를 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모님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으면 아이들이 감히 부모님의 말을 듣겠습니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약한 아버지상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단순히 돈이나 벌어다 주고 어머니로부터 용돈을 타서 써는 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늙었을 때 보면 옛날의 그 아버지가 아닙니다. 이제는 단지 늙은 한 노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떤 때 용돈을 적게 준다고 불평하시는 아버지를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영광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퇘색되어가는 영광입니다. 마치 모세의 영광과 같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율법의 말씀을 받고 내려 왔을 때 그의 얼굴에 광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건을 쓰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세와 대면하여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광채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영광은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이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오른 권력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그 자리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이 주신 존귀함과 권세를 누리지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는 한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낮아지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무리 낮아진 사람도 원하시면 높이실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하면서 몸을 숨기라고 마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시면서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하라’(13: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해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권력이 자기 백성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늘 지켜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권력에 복종하는 것은 그것이 정당할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권력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국가의 권력을 잡은 자에게 복종하라고 하면서도 요한 계시록에서는 로마 권력자를 짐승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이미 정당한 권력의 범위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힘이 없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악한 권력 뒤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심.

 

9,“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사람은 한번 죽으면 끝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냥 높이신 것이 아니고 지극히 높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극히 높이셨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인생 밑바닥에 있던 사람을 대통령이나 왕의 자리에 앉게 한다면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지옥 밑바닥에 내려가 계셨습니다. 그런 분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권력자나 천사장 보다 더 높은 최고로 높은 위치까지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끝난 인생인 그리스도를 그토록 높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앞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디서 수상자의 명단을 발표할 때 가장 위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부터 명예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이름이 가장 위에 기록되게 됩니까? 가장 성적이 뛰어난 사람일 것입니다. 가장 노력을 많이 했거나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가장 많이 자신의 것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가장 위대한 사랑을 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가장 많은 것을 버렸으며 가장 위대한 사랑을 한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을 가장 존귀하게 높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가장 큰 것을 버리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영광을 다버리셨습니다. 그의 능력과 존귀와 아름다움을 다 버리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버리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지옥의 가장 비참한 고통을 맡보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저히 사랑할 이유가 없는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들을 때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무엇 때문에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대신해서 죽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나에게 무엇인가 친절을 베풀어주고 생각 이상의 큰 도움을 주면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음에 부담이 될 때가 많습니다. 속으로 저 사람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나를 위하여 자기 돈이나 시간을 써가면서 이렇게 수고를 할까 하면서 부담스러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형이나 부모가 나를 대신해서 큰 어려움에 빠지는 것에 대해서도 매우 미안해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왜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대신해서 죽어야 합니까? 이것은 처음 예수 믿을 때에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한참 믿고 난 후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저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두 종류의 존귀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존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존귀한 것은 과거에는 출생이지만 지금은 자신의 능력이나 운에 의해서 할 수 있는대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라고 말한 것은 제가 을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이 단지 능력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을 합니다. 밤을 새워가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할 수 있는대로 소수 엘리트 그룹에 들어가야지 더 빨리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대로 명문 고등학교를 나오고 할 수 있는 대로 명문 대학 그것도 알아주는 학과를 졸업해서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거나 혹은 유명한 대학에 유학을 갔다 오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입니다. 그렇게 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무엇을 합니까? 이 세상을 현상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재학에서는 제로 섬 게임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권력이 하는 것은 현상 유지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사람들은 그토록 경쟁하고 머리를 싸매고 주야로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존귀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려서 남을 살리는 위대한 사랑의 존귀함입니다. 이것은 단지 현상 유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내면 안에 있는 존귀함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유대인 노예들 중에서 귀에 구멍을 뚫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구적으로 노예로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노예들은 일정한 기간이 되면 다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노예들 중에서 총각으로 노예가 되었다가 주인의 배려로 결혼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유인이 되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와 아이들은 주인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예들 중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자유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면 주인은 그 노예를 재판장에게 데려가서 문에 대고 귀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습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자유로와질 수 없습니다. 그는 영원한 노예입니다. 그러나 자유인이상 위대한 노예였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 이 노예들이었습니다. 귀에 구멍을 뚫은 이 노예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해서 죄의 노예가 되셨습니다.그는 귀에 구멍을 뚫은 것이 아니라 손과 발에 못을 박히심으로 영원히 노예가 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영원히 우리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버리시지 않기 위하여 못에 박히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이 보다 더 위대한 사랑을 행하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보다 더 많은 것을 버리신 분이 없으며 이보다 더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신 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연히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르실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조건없는 사랑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부모도 자기 자식을 아무 조건없이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중 세배대의 두 아들이 어머니를 앞 세워가지고 예수님께 인사 청탁을 했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앉을 때 주님의 보좌의 우편과 좌편에 아들 하나씩을 앉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의 받을 잔을 받으며 나의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받을 잔이 무엇이며 그가 받을 세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세례였습니다. 그들은 그것도 모르고 받을 수 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것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보좌 우편은 다른 사람이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자기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입니다. 할 수 있는대로 많은 것을 버린 사람이 더 존귀한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무엇인가 이익이 되니까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얼굴이 이쁘거나 성격이 좋거나 좋은 학벌을 가지고 있거나 무엇인가 자기에게 이익이 되니까 사랑한다고 하면서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버리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시지 않으셨더라면 그는 죽음의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정말 낮아지겠고 그는 정말 죽으셨습니다. 저는 그에게도 죽음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만 믿고 죽는데 만일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아버지여,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3. 그리스도가 얻으신 것.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가 그토록 낮아진 결과 얻은 것은 새로운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는 이름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 자신이 사람이 되심으로 변하신 것입니다. 그 전에 그는 누구셨습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여호와이셨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라는 칭호가 성부 하나님에게만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구약에는 여러 경우 성부가 아닌 한 분도 이 칭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영원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출생되시고 또 성장하시며 더욱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그는 영원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엄청나게 많은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으셨습니다. 성자 자신이 사람이 됨으로 해서 변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신성만 가지셨는데 영원한 몸을 가지셨고 그 몸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천국에 분명히 몸을 가지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라는 칭호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여자에게 있어서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떤 처녀가 일류대학을 나와서 최고로 좋은 직장에서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남자들은 이 처녀와 커피라도 한 잔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 처녀가 드디어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한 후에 그가 하는 것은 집이나 청소하고 잠이나 자고 하루 종일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라고 해서 빨리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녁 늦게 돌아오면 씻자 말자 바로 자리에 골아 떨어져 잠을 잡니다. 그는 그렇게 하는 자신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기 위하여 결혼을 했나 생각하니까 그렇게 비참해질 수가 없었고 남편이 미웠습니다. 혼자서만 집에서 썩는 것 같았고 퇴보하는 것 같았습니다. 임신을 하게 되면 처녀 때의 몸매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십년 정도 아이를 키우다가 대학교 동창회를 한다고 해서 나가보면 그렇게 예쁘던 친구들도 늙어 가고 그렇게 공부 잘하던 아이들도 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독신으로 직장 생활을 하고 공부한다고 하던 친구들도 무엇인가 쓸쓸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결국 자신은 그 동안 위대한 일을 하나 해 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아이를 낳아서 키운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에 어머니의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은 맹수 우리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그나마 이 세상에 사랑이 있고 기본적인 애정이 있는 것은 자신을 희생해서 자식을 키운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아이를 낳음으로 어머니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물론 그 전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키움으로 여자는 위대해지기 시작합니다. 암탉도 병아리를 까서 품고 있는 닭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매도 병아리를 품고 있는 암탉은 낚아채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이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우리는 그의 사람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탄생시키셨습니다. 신앙적으로 이런 표현이 가능한지 모르겠는데 그는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라고 하는 위대한 이름을 얻으셨습니다. 왜 이 이름을 그토록 위대한 이름입니까? 가장 위대한 희생으로 가장 절망적인 사람을 구원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이름에는 반드시 성도들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라는 이름 뒤에는 자식들이 따라오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책임지실 수 있습니다. 단순히 책임지는 정도가 아니라 암탉이 병아리를 보호하듯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는 절대로 우리를 빼앗기지 않습니다. 우리와 주님은 한 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으로 한 몸으로 느끼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든 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으면 주님은 행복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풍성해지는 것이 주님의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4. 온 세상의 심판주가 되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얻으신 두 번째 지위는 온 세상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심으로 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게 되었습니다.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무질서한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치되어 있었고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세계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돌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심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이 모든 조화와 질서를 깨트려서 엉망이 되게 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완전히 싸구려 딴따라가 되게 했습니다. 이 세상은 무질서와 혼동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을 아들 중심으로 다시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문제가 없었습니다. 피조 세계는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아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들과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들이 인간의 죄를 대신한다면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얼마든지 그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한 아들에게 온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는 권세를 함께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위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온 우주의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놀라운 소식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전파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이 세상 살람들만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지옥에 있는 영들도 드디어 그가 이 엄청난 일을 행하셨구나. 이제 우리는 확실히 멸망했다고 자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동안 믿음으로 죽었던 성도들에게는 이 보다 더 기쁜 소식을 수 없습니다. 천사들에는 더욱 더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주어서 구원할 자는 구원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의 세력을 멸망시켜서 다시 온 우주를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그때의 우주는 지금 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온전한 우주가 될 것입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바다나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훨씬 성숙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세력들을 당장 심판하시지 않으십니까? 아직 하나님께 돌아올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을 심판해 버리면 아직 돌아오지 못한 자들이 모두 함께 멸망당합니다. 만일 몇 년 전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더라도 멸망당했을 자들이 우리 가운데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속속히 악에서 떠나 돌아오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지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이 세상의 죄와 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에게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했는데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셔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실현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가 완전히 없어져야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지금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믿는 자들로 하여

금 죄가 무엇인지 밝히고 드러내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죄가 폭로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잃어버렸던 가치를 되찾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든 입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모든 악의 세력들도 다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결국 나중에는 어쩔 수없어서 그리스도의 권세에 복종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의 권세에 복종하여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가장 어리석은 자가 누구입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권세가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인 줄 모르고 교만하게 행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입니다.

그러면 지금 누가 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가 통치하심으로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악한 자는 더 악하게 내버려두시고 선한 자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욱 더 악을 통제하는 사회 기능이 없어집니다. 악과 선이 극과 극으로 나누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훨씬 더 동적이고 과격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구원을 이루신 후에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인간들을 풀어놓으십니다.자기 마음대로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멸망할 자는 더 멸망으로 가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 올 자는 돌아오게 하십니다.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인간을 잡아 매는 사회적인 끈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머리 속에 성역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모두 다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심판을 더욱 더 무겁게 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심판의 불을 더 뜨겁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할 수 있는대로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세상에 허락하신 존귀와 권세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그런 권세나 존귀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위대한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버려서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를 되찾게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랑은 위대한 희생이 뒷밭침이 되어야 합니다. 여자가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어머니라는 새 이름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누구나 다 얻는 이름같지만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위대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남을 위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위대한 사랑을 요구받는 순간입니다. 그때 자신의 지위를 버리고 자신의 기회나 자유나 특권이나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기꺼이 귀에 구멍을 뚫어서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삶이 우리 안에서 반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자신이 주장할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남을 위하여 버리는 위대한 사랑을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자기를 주장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것은 기껏해야 현상 유지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를 보고 계시며 때가 되었을 때 그를 높이십니다. 이 세상에서도 높이셔서 눈부시게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사랑을 한 사람, 가장 위대한 희생을 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보좌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