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빌립보

[빌 2:12] 개인주의를 버리자 _김서택 목사

'코이네' 2023. 4. 22. 12:38

개인주의를 버리자

  2:12-14

설교 : 김서택 목사 

 

 

 

 

우리 나라에서는 남자는 한번 태어나면 군대는 갔다와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사실 저는 군대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했던 것이 제 자신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군에 입대하면 더 이상 나 개인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군대의 한 구성원으로서 나가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머리를 깎게 하고 똑같은 옷을 입힌 후 그 다음에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배우게 합니다.

사실 군대에서 상관이 내리는 명령중에서 어떤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도저히 밥을 먹을 수 없는 시간 안에 다 밥을 먹으라고 한다든지 특히 화가 날 때가 훈련의 목적과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사람을 괴롭게 할 때 그런 말도 복종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식사 시간이 삼분일 때도 있었습니다. 밥을 받자 말자 식사 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먹지도 못한 밥을 다 쓰레기통에 버리게 합니다. 또한 너무나도 말도 되지도 않는 이유로 사람을 괴롭게 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고통의 순간을 참아 내려면 계속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국가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쳐 복종시켜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말도 되지도 않는 그 명령을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터지면 그 말도 되지도 않는 명령에 왜 복종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적과 대치 상태에서 내 기분이 좀 좋지 않고 나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전쟁을 그만두고 집으로 가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전체 부대가 큰 어려움을 빠질 뿐 아니라 전체가 몰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총알이 비오듯이 쏟아지는데 돌격 앞으로!’하면 누가 앞으로 가려고 하겠습니까? 앞으로 가면 죽을 줄 뻔히 알지만 명령이기 때문에 달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가 살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나 한 사람의 고집과 사욕을 철저하게 꺾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는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개 약진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부 자기가 옳고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일치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모습은 결코 하나님 나라 군인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비군이나 아니면 철저하게 훈련되지 못한 민간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그런 상태로는 도저히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각자가 자기 마음대로 믿으라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자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자기 자신도 살며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1. 항상 복종해야 할 이유.

 

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우리 번역에는 항상 복종하여라는 말이 뒤에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앞부분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종하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대한 말씀을 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강요된 것도 아니지만 자기 스스로 낮아 지셔서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도 말도 되지도 않는 명령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혀 묵으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는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죽어야 아버지께서 일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일 하시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철저하게 죽이셨습니다.

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로 예수님의 그 자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너무 너희 자신만 생각한다. 너희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하실 수가 없다. 너희 자신을 철저하게 죽이고 복종시킬 때 하나님의 나라가 살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으로 구원을 하십니다. 그러나 구원시킨 후에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공동체를 만들어서 함께 구원을 이루어 나가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은 내 개인이 혼자서 누리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나게 크고 광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추리 소설이나 혹은 액션 영화같은 것은 혼자서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수백명이나 수천명의 사람들이 동원된 거대한 오케스트라나 웅장한 오페라같은 것을 만히 혼자서 관람한다고 하면 너무나도 아까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엄청난 것은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부자가 아들이 없어서 고아원에서 고아 한명을 택해서 아들을 삼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만족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은 더 넘쳐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인종들 중에서 아들을 입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들 중에는 흑인 아이고 있었고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한국 아이일 것입니다. 그리고 백인 아이도 있었습니다. 남미 계통의 아이도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마치 그의 집은 작은 세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들도 입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장병 어린이도 입양하고 간질이 있는 아이도 입양하고 뇌성 마비 아이나 자폐증 아이도 입양했습니다. 마치 그의 집은 작은 종합 병원 같았습니다. 그러나 병원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사랑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고 만족함이 있었고 감사가 있었습니다. 아마 그 집에 아들로 입양되어 있는 다양한 피부색과 다양한 상태의 아이들이 마치 친형제처럼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보면 작은 우주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아들로 입양하셨습니다. 사실 거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인종의 노예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사랑하기 위하여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서로 해치거나 서로 미워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택하신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 한 사람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도 엄청나게 때문에 그와 같은 사랑을 나 한 사람에게만 베푸시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이 나 외에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어떤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종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나 한 사람이 아닐 뿐 더러 이제는 더 이상 나 개인은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라는 것이 있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는 거기서 전혀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나의 학벌도 없습니다. 나의 씨족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전라도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백인이나 흑인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어떤 배가 항구를 출발했으면 이제는 오직 앞으로 가야 하는 목적 항구만 생각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후에는 더 이상 라고 하는 개인이 살아 있으면 안됩니다. 이제는 오직 우리들을 택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보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여기의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모두 마음을 합하여 그들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다 함께 합심해서 이루어나가라는 말입니다. 마치 배에 많은 선원들이 있지만 모두 힘을 합하여 배가 안전하게 목적지로 갈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구원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구원은 또 앞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겨울에 산에 등산을 갔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실종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구조대와 연락이 닿아서 구조대원이 한 명 왔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산 것입니다. 분명히 생명을 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산중에 조난당해 있습니다. 그들이 극복해야 할 위기가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믿었다는 것은 이미 구원을 받아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주위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고 주위는 온통 지뢰밭입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구원을 얻었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한 걸음 한 걸음을 주님의 말씀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살아나야 합니다.

구원 안에는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이 본문에서는 그 중에서도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님이 주신 임무가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다 최선을 다 해야 모두 안전하게 목적지로 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두렵고 떨림으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구원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되고 함부로 행동해서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마치 전문가의 지시를 받아서 지뢰밭을 넘어가듯이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뜻에 복종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다른 형제나 자매를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에 정당한 위치에 있는 형제나 자매의 말에 자발적으로 복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데 다른 형제나 자매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주장도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잘 분별하여 틀림없는 주님의 말씀을 골라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훈련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멋대로 행동하지 않고 다른 그리스도인의 말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면 그것이 자기 마음에 맞지 않아도 복종하는 훈련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뜻은 공동체를 통하여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공동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거기에 복종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무단 이탈병과 같고 낙오병과 같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있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하여도 전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너무나도 자기 주관이 강하여서 아무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오지 않는 이상 그들의 분열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간다고 해서 해결되고 없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굴복시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훈련이고 임무라는 뜻입니다.

제가 그 동안 서울에서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교인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백 명이 모이면 백 개의 스타일의 목회가 했습니다. 전부 자기가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되지 않으면 사랑이 없다고 하면서 욕을 해대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 무엇인가 하면 그는 아직 구원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인 훈련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여야 다른 사람이 살 수 있고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겸손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성령의 치유가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치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있어도 변하는 법이 없습니다. 마치 베데스다 못가에 모여 있는 병자들 처럼 혹시나 은혜를 받을까 하고 아무리 기다려고 은혜는 임하지 않습니다.

 

2.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

 

사도 바울은 왜 빌립보 교인들이 복종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13,“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

빌립보 교인들 안에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행하고 계십니다. 영어로는 ‘operating’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로는 에네르곤입니다.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힘을 공급하셔서 어떤 일을 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명절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 이유는 떡을 해가지고 와야 하는 당번이 저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서로 방앗간에 가지 않으려고 형들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방앗간에 가면 쌀을 가지고 온 그릇이 장사진을 이루어 길에 늘어서 있습니다. 만일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다른 사람이 새치기를 하기 때문에 감시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방앗간 기계가 고장이 자주 나는 것입니다. 한번 고장이 나면 하염없이 누군가가 와서 고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기술자가 와서 뚝딱 뚝딱 하면서 수리를 하고 난 뒤 전기를 넣으면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에네르곤입니다. 사실 우리 몸은 고장난 기계와 같기 때문에 고치고 수리해서 성령의 능력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몸이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움직여지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 우리 몸을 드리는 것이 얼마나 싫습니까? 우리 몸은 쉬고 싶고 먹고 싶고 놀고 싶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 듣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하여 시간을 내는 것이 얼마나 아깝습니까? 그러나 남을 위하여 몸을 쓰는 것이 에네르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 한 사람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마치 온 성도들이 연결된 방앗간의 기계들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한 군데서 고장이 나면 다른 모든 일이 중단되게 됩니다. 자동차 공장의 큰 라인에서 만일 한 공정이 고장나면 그 전체 공장의 가동을 중단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고장난 부분을 수리하고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에네르곤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자라게 하며 또 약한 지체들을 보살피고 어려움에 빠진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세상에 나가서 싸워 승리하도록 힘을 주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가 헌금하는 것은 교회를 지탱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교인들이 아무도 헌금을 내지 않는다면 교회는 유지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어려운 사람이 있을 때 누군가가 찾자가서 권면을 해주고 보살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하지 않으면 약한 사람들은 자꾸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망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 것은 선한 뜻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비참하게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구체적인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안에 있는 모든 잠재력을 다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실현시켜주고 완성시켜주는 선한 뜻입니다. 여기서 선하다는 것은 의로운 것과 비교해야 합니다. 의로운 것은 남의 인격이나 삶을 너무나도 귀하게 생각한 나머지 감히 그들의 삶에 뛰어 들어서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은 실제로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사랑이 될지 몰라도 그 사람에게는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신의 정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상대방이 결정을 하게 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을 주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남의 삶에 무례하게 뛰어드는 것이지요. 의로운 것은 남의 삶을 너무나도 귀하게 생각한 나머지 피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것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삶이 너무나도 존귀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젊음을 바치고 자기들의 재산을 희생시키고 자신의 직장을 버려서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한 뜻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나는 망하고 다른 사람은 나의 희생으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맨 정신으로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해야 하는 것이 큰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을 공동체로 모여서 하게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희생시켜서 남을 행복하게 하는 선한 뜻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은사를 개발해서 남들 앞에서 우쭐거리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를 망하게 하고 자기를 버리게 하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물론 그 대상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길가다 강도 당한 유대인들을 만난 사마리아 사람처럼 미운 사람도 그 선한 일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선한 일을 꿈이나 꿀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그런 소원을 주십니다. 여기서 이 소원이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 드는 생각입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인정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스스로 아무 데도 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보내어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 구체적인 마음속에 있는 열망이 소원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시적일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서 그것이 구체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도 보내어 주지 않는데 혼자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자비량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부담을 가지고 보내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아직 자기의 영역이 있는 사람은 대단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 몸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자기 시간, 자기 건강, 자기 몸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라고 하면 오는 것이고 가라고 하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나 자매들을 더 행복하게 하는 것이 최대의 축복입니다. 그러면 남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다 써버리면 나는 무엇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그때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남을 위하여 주고 남은 덕을 거두어도 열두 광주리에 차고 남습니다. 남을 위하여 쓰고 남은 돈만 해도 많이 남고 또 남을 위하여 쓰고 남은 에너지만 모아도 얼마든지 나 혼자 쓰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저는 사실 이 놀라운 진리를 늘 마음 속에 두고 있습니다. 남들을 위하여 시간을 쓰고 물질을 쓰고 에너지를 쓰면 결국 거기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만 모아도 얼마든지 풍성한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산술 평균입니다. 아마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진리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남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자기 집만 위하여 사는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집이 완전히 죽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집을 돌아보는 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식구들이 더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기 아이만 생각하는 자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반항적이 되는 것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아들을 돌아 보니까 자기 아이가 스스로 자기 일을 잘 알아서 하는 것을 볼 때가 올 것입니다.

 

3. 원망과 시비없이 하라.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무엇을 하든지 원망과 시비없이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원망과 시비라고 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한 것이 바로 이 원망과 시비였습니다. 그들은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다 모세를 대적했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심했고 자기 생각을 주장하고 자기 생각대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끌고 가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 행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단 홍해를 건넌 후에는 자기 개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때 부터는 하나님의 백성들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렇게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다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길들이는데 사십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노예들을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군사로 만드는데 사십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결국 애굽을 나온 일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고 그 후 세대가 훈련되어서 가나안 땅을 공격했습니다. 왜 출애굽 세대는 광야에서 죽어야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을 보면 잘 알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가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느 고등학교에 수련회가 있어서 갔더니 교장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학교 선생님들은 참으로 통솔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자기 분야에서는 나름대로 다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업 방식을 이런 식으로 좀 바꾸어 달라고 하면 아주 기분 나빠한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원망과 시비가 생깁니까? 자기가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쪽으로 가라고 하는데 내 생각은 이 쪽으로 가야 한다고 하니까 원망이 생기고 시비가 생깁니다.

정신병에 잘 거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자기는 완벽하게 모든 것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병에 걸리려고 해도 걸릴 수가 없습니다.

역시 자기 방식대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방식이 통하지 않으면 분노를 내게 되어 있고 원망과 시비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불확실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름이 떠 오르면 출발할 준비를 하고 가만히 있으면 몇 달이건 몇 년이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냐 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훈련을 통하여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보다 더 똑똑하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십년을 광야에서 돌고 난 후 하나님이 나보다 더 똑똑하시다는 것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의 삶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빨리 항복하면 항복할수록 더 유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바로 이 원리가 통한다고 생각됩니다. ‘안되면 되게 하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지혜에 전폭적으로 굴복하고 맡길 때 까지 다람쥐 쳇 바퀴 돌 듯이 계속 돌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무 군소리없이 여리고 성을 하루 한 바퀴씩 돕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성을 도는데 한 마디 소리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십년 훈련의 결과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무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얼마나 중얼거리면서 투덜거리면서 성을 돌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나보다 훨씬 더 지혜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하기 까지 사십년이 걸렸습니다. 원망과 시비는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입이 다물어져야 하나님 뜻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