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빌립보

[빌 2:5]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_ 김서택 목사

'코이네' 2023. 4. 22. 12:41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본문 : 빌 2:5-8

설교 : 김서택 목사 

 

 

전에 어떤 한 자매는 비오는 날 직장에서 옥상에 물건을 가지로 올라갔다가 고압선에 감정이 되는 바람에 전신이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 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전신이 마비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기회조차 없는 것이 가장 화나는 일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십자가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은 전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바로 자기와 같은 처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눈 앞에 흘러내리는 땀도 닦지 못하고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손과 발에는 엄청난 통증을 느끼면서 몇 시간 동안이나 나무에 달려 있었던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자신에 대한 분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생각하면서 조금씩 사그러들기 시작했다고 말을 합니다. 아내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때 이야기를 합니다. 피가 모지라서 양손에 링거와 피를 꽂고서 진통을 하는데 눈에 흐러는 땀 조차 닦아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왜 사람을 나무에 못박아 놓습니까? 옷걸이도 아니고 사진틀도 아닌데 왜 사람을 산 채로 나무에 못으로 박아 놓아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일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리 사람이 미워도 그렇지 사람에게 그런 엄청난 고통을 안겨 줄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오늘 시대에 우리가 성공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기회가 왔을 때 바로 그 기회를 움켜 쥐는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찾아 온 기회까지 움켜쥐면 더 좋습니다. 사람들이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먼저 어떤 판단을 해서 기회를 움켜 잡으면 성공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좋은 기회가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면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나 혹은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 같은 경우에 당선되지 않을 것 같으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면 좋을 것같은데 끝까지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한번 양보하면 다시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론이나 여론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냉정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이 사람은 별 볼일 없다고 한번 판단하면 그 후부터는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만일 기회가 왔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보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기회가 오면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대하여 놀라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중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짧은 본문에 이렇게 핵심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짧은 몇 개의 절이야 말로 기독교의 가장 놀라운 진수를 가장 잘 요약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맥에서 이 그리스도의 본질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서로 한 마음으로 품으라고 권면하는 과정에서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하나될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언제 우리가 서로를 잘 알았다고 하나되겠습니까? 만일 예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서로 알 필요도 없고 알 이유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길에서 마주칠 가능성조차도 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서로 알게 하셨고 서로 알 정도만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우리를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부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저 사람은 이 부분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어떻게 서로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인종이나 언어나 신분의 차이를 뛰어 넘을 수 있습니다. 사실 가장 뛰어 넘기 어려운 것이 사상입니다. 신분의 차이나 혹은 피부색의 차이도 뛰어 넘을 수 있는데 생각이 다르면 하나되기 어렵습니다. 결혼 부부 중에서 신앙이 다른 분들이 고백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신앙만 나오면 이야기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를 하나되게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면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의 본체.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여기 이 본문에 나오는 단어 하나 하나는 엄청난 신학적인 고찰과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단어들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가 하나님의 본체라고 할 때 본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보통 본체라고 하면 하나님의 본질을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본체라는데 사용된 몰페라는 단어는 7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종의 형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잘못 생각하면 하나님의 본질을 버리고 사람의 본질을 취했다고 번역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본체를 영어로 가장 잘 번역하면 ‘fashion’ 이 될 것입니다. 패션이라는 말은 존재 양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연극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때로는 영화나 연극을 보면 배우들이 해군 장교나 육군 장교의 옷을 입고 나옵니다. 때로는 장군의 복장을 하고 장군의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진정으로 장교나 장군이 아닙니다. 단지 일시적으로 그런 옷을 입고 그 역을 흉내내고 있을 뿐입니다. 진정으로 장교가 되려면 사관학교나 사관 후보생이 되어서 소정이 훈련 과정을 마쳐서 임관을 해야 하고 또 소위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군대 경험을 쌓아 가면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장교가 된 사람과 연극이나 영화에서 일시적으로 복장을 빌려 입어서 그 역을 해 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처음부터 훈련을 받아서 정말 장교가 되어서 장교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몰페입니다. 예를 들어서 해병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해병대는 빨간색 명찰과 팔각 모자로 상징되어집니다. 그러나 팔각 모자만 썼다고 해서 진정한 해병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해병대가 되기 위해서는 해병대에 입대해서 정식 훈련을 받아야 하고 짅해에 보면 천자봉이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그 천자봉 구보를 갔다 와야 해병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몰페라는 특별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패션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패션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패션 쇼를 하는 것을 보면 모델이 금방 안에 들어갔다가 다른 옷을 입고 나오고 또 들어가서 다른 옷으로 갈아 입고 나옵니다. 이것은 패션이 아닙니다. 진정한 패선은 정말 어떤 소정의 훈련을 받고 자격을 갖추어서 그 신분에 맞는 복장과 외모를 하고 있는 것이 패션이지요. 여기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는 근본 하나님의 패션을 하고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자격과 신분을 의미합니다. 한번 어쩌다가 하나님의 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의 신분에 맞는 존재 양식으로 계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같은 자격으로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하나님과 같은 신분으로 존재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실 태양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에게 비취 태양의 모습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태양이 언제부터 저렇게 타오르고 있었는지 그것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단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태양도 없고 지구도 없고 우주도 없고 천사도 없고이 우주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그때 그리스도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영원한 영광 가운데 영원한 기쁨과 만족함 가운데 그리스도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 지구가 만들어지기 얼마 전에 천사들이 만들어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분명히 훨씬 뒤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는 이사야가 성전에서 그 영광을 보고 놀라고 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이것이 바로 그가 본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취한다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쉽게 번역하면 탈취한다’, 혹은 움켜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주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단어의 의미에서 대하여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하거나 움켜쥘 필요가 어디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나 아담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려고 하지 이미 부족한 것이 없는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겠느냐 이 말은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런 강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전혀 그 영광의 지위를 빼앗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사탄처럼 무슨 죄를 지었거나 잘못을 해서 영광을 탈취당한 것이 아닙니다. 군대에서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어떤 잘못을 하면 계급장을 다 떼고 이병 제대를 시킵니다. 이병 제대를 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잘못을 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병 제대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영광의 신분과 지위를 버리신 것은 무엇인가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당연이 그 지위와 신분을 영원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고집스럽게 자신의 신분을 고수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 영광의 신분과 지위를 버리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보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 피조물 중에서도 천사보다 훨씬 못한 자들인데 우리 인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그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아들이 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더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더 온전히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단지 아버지의 뜻을 기계적으로 이루어 드리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너무나고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그 영광의 지위와 신분을 버리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한 낮아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치욕이요 모욕이며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얼마든지 이 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고집스럽게 그 영광의 신분을 유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그 영광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한 사랑이었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 대개의 경우 기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모든 것이 너무나도 넉넉해서 전혀 선택할 필요조차 없다면 우리는 걱정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 내가 이것을 한다면 분명히 저것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해야 할 것인지 저것을 해야 할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제한된 돈으로 외식을 할 것인지 옷을 사입을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외식을 하면 옷을 포기해야 하고 옷을 사입으면 외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한된 시간에 공부를 할 것인지 데이크를 할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합니다. 물론 데이트하면서 공부를 하면 될 것 아니냐고 할지 몰라도 사실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기회를 잡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꽉 움켜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한번씩 뒤로 쳐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도저히 다른 사람들을 따라 잡을 수가 없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바로 그렇게 되는 것이 폐인이 되는 것이고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인생을 망친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씩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지기 시작하면 나중에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길을 잘 들어서야 합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한 길만 열심히 달려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걸으신 길은 전혀 우리와는 정반대되는 길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영원히 영광스러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영광의 신분과 지위를 박차고 인생 밑바닥으로 굴어 떨어지셨습니다.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실수를 한 것도 아니고 그런 영광에 실증이나 환멸을 느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사랑 때문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너무나도 바보같은 짓을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큰 재벌의 맏아들이 그 모든 기회를 박차고 집을 뛰쳐 나와서 뒷골목에서 구두를 닦고 있다면 아무 다른 사람들은 다 바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집에 있으면 일단 유학부터 갔다 와서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갖춘 뒤 또 비슷한 가문의 딸과 결혼해서 로얄 패밀리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여자를 만나서 사랑한답시고 그 모든 유산과 기회를 막차고 뒷골목에 앉아서 양아치들과 함께 생활한다면 바보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아버지께서도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 자신을 비어.

 

7,“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를 비어라고 했는데 어느 정도까지 자기를 비우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대두된 이유는 어떤 이단들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신성 까지 버리셨다고 주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비운다고 하더라도 비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다 하더라도 그는 버리실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신성입니다. 그가 사람이 되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되실 수는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광이나 능력이나 지위나 상당한 부분을 버리셨습니다.

여기서 종의 형체라고 했는데 여기의 형체몰페입니다. 패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은 배우들이 하듯이 일시적으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천사나 혹은 그리스도 자신이 사람의 형체로 나타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몰페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몸만 입어서는 안되고 출생과 성장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출생과 성장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는 어린 아이로 태어나셨고 그는 성장하셨습니다. 유년 시절이나 청소년의 시절을 다 거쳤습니다.

태어난지 하루만에 어른이 되었거나 혹은 이틀만에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지혜도 자라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의 몰페를 입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종의 형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제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인 것이 답답하지 않습니까? 코로 숨을 쉰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합니까? 물론 아가미로 호흡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일일이 코로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리고 우리는 먹어야 삽니다. 한끼라도 먹지 않으면 속에서 분노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교양있던 사람도 먹는 시간에는 짐승으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한번씩 캠프를 가 보십시오. 하루 종일 먹는 일에 시간을 다 보냅니다. 우리가 식사를 준비해서 먹고 설거지까지 하면 세시간씩도 걸립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아홉 시간을 먹는데 소모하는 것입니다. 사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음식을 몇 시간에 걸쳐서 준비해서 가지고 들어오면 벌떡 일어나서 영접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일이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장사들에게 왜 그렇게 추운 날 농수산 시장에서 물건을 가져 오느냐고 물어 보십시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사람은 배설을 해야 합니다. 먹기만 하고 배설을 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화장실을 없애신 온 세상이 더러운 오물로 뒤덮일 것입니다. 사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배설물을 깨끗하게 치우느냐 하는 것으로 정도를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몇 년 전에 한 자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그 집의 변기였습니다. 거기에 앉아 있으면 세상의 모든 시름을 다 잊을 수 있는 크고 편안한 변기였습니다. 그때 속으로 저 자매와 결혼하려면 변기 하나는 저 정도를 장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또 아픕니다. 일을 많이 하면 피곤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잘못되면 병에 걸립니다. 때로는 화가 납니다. 어떤 때에는 침체되기도 합니다.

사실 감정을 통제한다는 것이 요즘은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감정은 자기 멋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잘못하면 죽습니다. 맞아 죽든지 굶어 죽든지 혹은 병들어 죽든지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종의 형체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들으면 우리 몸을 무시하거나 욕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우리 몸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래 몰페에 비하여 우리의 몰페가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답답하며 얼마나 제한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것을 잘 참아 내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지각을 다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때때로 이 세상에 사시면서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모르시는 것이 있다니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각을 제한해서 일부러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시기도 했습니다. 그는 침체되기도 했으며 그는 배고프시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절대자가 되고 싶어 합니까? 그러나 배가 고프면 절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공중을 나는 새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보통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비참한 저주의 죽음이었습니다.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자기를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원어의 의미는 겸손하게하셨다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순종하여 죽기 까지 복종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산 죄의 값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합당한 자격을 가진 자가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손상된 의는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충족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살리든지 죽이든지 하실 것입니다.

물론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멸망을 당하면서 까지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를 것입니다. 멸망당하는 중에도 몇 명은 살아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맛보고 그것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모두 죽음의 죄에 빠져 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진노하시는 분으로 변덕스러운 분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자처하셨습니다. 스스로 죽임을 택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곱게 죽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 못박혀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이상하게 죽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고발했는데 로마인들은 반역죄로 몰아서 사형에 처했습니다. 사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는 전혀 반역을 일으킬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사형에 처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의 요구가 너무나도 거세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를 풀어 주면 민란이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이럴 때 적당하게 유대인들의 기대를 들어주고 다른 것으로 그들을 더 잡아 매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그는 죽으실 수 없었습니다. 이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그는 죽으실 수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수가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그 분이 어떻게 죽으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그는 정확하게 죽을 길만 걸어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조금만 피하셨더라도 얼마든지 죽지 않으실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유월절은 명절이기 때문에 예수를 죽이는 것을 피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무엇이 잘못되는 것 같더니 그는 체포되시고 그 후는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는 것처럼 죽음의 길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죽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무 잘못한 것도 없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너무나도 굴육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비참했고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3. 주님의 낮아지심이 의미하는 것.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사용해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낚아챈다고 하는 표현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는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낮아지심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는 조급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꾸 양보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언제 나에게 좋은 기회가 오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바보같이 기회를 놓치고 낭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자기가 최고라고 머리를 쳐든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마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잘난 사람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교회가 세상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세상과 다를 바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것은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고 겸손하게 기다릴 수 있기 때문에 교회가 되는 것이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다 사용하려고 한다면 약한 자는 어디서며 가난한 자는 어디에 서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쳐다 보면 억울하고 화가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로 보면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다 없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높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으로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준비된 자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용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것을 버릴 수 있는 겸손입니다. 남의 필요를 알 수 있는 눈입니다. 자기가 이런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다 강제로 받아 들여야 한다면 그것은 은사가 아니고 폭력과 같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소중하며 내가 감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것은 말로 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그 사람은 아무 것도 햐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셔서 사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 사람은 아직 신앙 안에서 인간이 덜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중요한 일 맡을 때 억압이 있고 답답함이 있습니다. 마치 이것은 어린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어린아이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것은 그것을 써 먹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무술을 한 사람은 싸움이 일어나려고 하면 먼저 도망을 쳐 버립니다.왜냐하면 그것을 써버리면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것은 피차간에 너무나도 큰 상처와 후유증을 남기는 것입니다.

태권도를 배우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기본적인 마음 자세를 갖추기 위하여 배우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써야 한다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마지막 순간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은사들이 아직도 채 어른이 되기도 전에 무술을 가르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실험용으로 보기 쉬운데 그런 교만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실험용이 될 수 없습니다.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가장 은혜스러운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경배할 권리와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지도하기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기술을 배우기 이전에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크신 분이 낮아지셨으며 그 분의 손에 사용되려면 인간 밑 바닥까지 내려가서 자존심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말아야 하고 자기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결국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하고 끌어 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학교에서 만들어집니다. 신학교나 은사 학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버림당하고 실패하여서 조금이라도 자기의 것이라고는 남지 않지 않는 광야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런 사람에게 은사의 옷을 입히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 무장될 수 있습니다. 사람만 만들어지면 옷을 입히는 것은 삼십분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