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빌립보

[빌 2:1] 먼저 전체를 생각하자 _ 김서택목사

'코이네' 2023. 4. 22. 12:43

먼저 전체를 생각하자

본문 : 빌2:1-4

설교 : 김서택 목사 

 

 

 

어느 단체든지 조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처음 가입한 자를 엄하게 훈련시키는 습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 때문에 조직이 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유교적인 집안에서는 새로 시집 온 새댁을 엄하게 훈련시켜서 그 가문에 적응하게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군대에 입대하면 신병 훈련소에서 군인이 되는 심한 훈련 과정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군대라는 조직이 도저히 존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누구나 와도 좋소입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처음 온 사람에게 군대식 훈련으로 적응 기간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보살피고 인내로 돌보아 줍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는 변화되지 못한 한 두 사람의 불순종으로 얼마든지 상처를 입을 수 있고 심한 경우에는 깨어질 수도 있는 형편입니다.

저는 수 년 전에 지방의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그렇게 크지 않은데 새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교인들의 학력은 매우 높았지만 그들은 모두 오래 신앙 생활을 한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는 서로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교회 안에 특별히 열심히 있는 몇 분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관의 차이였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 단체보다는 개인의 영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교회를 조직화하거나 교단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교회가 보편적인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교회들처럼 교단에도 가입하고 또 다른 교회처럼 주일 저녁 예배나 수요일 예배도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는 몇 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교회가 별 문제없이 잘 성장하는가 보다 하고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런 생각의 차이가 잠재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교회의 그 문제가 폭발하는 사람에 교회가 깨어지고 신앙이 어린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항상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진리만으로 교인들을 강하게 결속할 수 없습니다. 즉 다른 하나의 요소가 필요한데 그것은 공동체가 강한 결속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즉 교회 안에 진리가 풍성한데 공동체 마저 강하게 결속되어 있으면 교회는 급속도로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리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같은 교회 안에 있다면 마치 그 사람은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며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이 상처를 입을지 모르는 형편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사회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가 힘이 있으면 개인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생각을 죽이고 거기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힘이 없으면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게 되어 있고 결국 그 공동체는 깨어질 위험을 받게 됩니다.

사실 저희 교회같은 경우에는 공동체 자체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쉽게 영향을 주거나 공동체를 깨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나라의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형편이 그렇지 않습니다. 한 두 사람의 기질이나 생각에 따라 얼마든지 교회가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깨어질 수도 있는 형편입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의 형편이 이와 비슷한 처지였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진리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공동체 자체가 약해서 한 두 사람의 입김에 의해서 교회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우리 한국 교회가 너무나도 빌립보 교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도 바울을 좋아합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단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권면이나 위로도 잘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 한 선교 단체에서 영국의 존 스톳트 목사님을 강사로 초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난색을 표하면서 한국에서 너무많은 단체가 자기를 초청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체도 존 스톳트를 좋아하고 저 단체도 존 스톳트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함께 집회를 하면 안되느냐 하니까 그것은 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저 쪽과는 좀 다르기 때문에 함께 집회를 할 수는 없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대하여 겪고 있는 문제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모두 사도 바울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자기들끼리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 맞지 않고 강조하는 것이 달라서 잘 교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적어도 이런 것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서로가 생각하는 것이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은 되어야 하고 사랑의 위로는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조차 잘 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빌립보 교회 안에서 하나되지 못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이 서신에서 그 내용을 공개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빌립보 교회의 많은 장점에 중대한 상처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언급을 했습니다. 그들안에는 세례 준 사람에 따라서 바울파 베드로파 혹은 아볼로 파 하는 식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사도 바울과의 사이 조차도 아주 좋지 못한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의 문제는 결코 그럴 정도로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이 편지에서 그 내용을 일부러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는 서로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기질이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서 하나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됨은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언젠가는 불만으로 표출될 수 있고 그런 불만은 교회에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해 줍니다.

 

 

1. 하나되게 하는 것.

 

원래 신약 교회의 특징이 지역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어로 말하면 ‘go-structure’입니다. 얼마든지 흩어져서 사람들을 전도하는 구조로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드릴 수 있는 곳은 하나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신명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곳을 중앙 성소에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come-structure’입니다. 그들은 예배 드리기 위해서는 한 곳으로 모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거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1년에 몇 차례씩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에서도 예배하지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4:21,23).

그리고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신약 교회의 특징이 중앙 집중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만 하면 교회가 되며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 교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하나됨입니다. 무엇으로 이 다양한 교회가 하나로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로마 천주교처럼 힘을 가지고 있다면 진리를 없어서 수천년간 조직을 지탱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이 없을 때에는 조직을 하나로 끌고 갈 수가 없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는 할례요 다른 하나는 안식일 제도였습니다. 좀 강경한 랍비들은 이런 엄한 전통까지 지켜야 같은 유대인으로 쳐주었습니다. 사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는 강한 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를 하나로 묶는 것은 무엇입니까? 뿐만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다른 개성과 기질을 가지고 있는 교인들을 하나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가장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슨 권면이라는 것은 설교를 말합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설교는 아니었고 즉흥적으로 성령이 주시는 감동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기본적인 교리는 어느 정도 갖추어졌던 것 같습니다.

교회는 새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이미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교회를 하나되게 했습니다. 특히 이 진리를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을 다시 한번 감동하게 합니다. 주님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은 영원히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는 힘을 빠지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아직 자기가 그리스도 밖에 있으며 그 십자가가 그를 두렵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깨어지는 것은 물론 사탄의 역사이지만 교회 자체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언제나 복음으로 교회를 다져야 하고 하나되게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지속적으로 선포되면 교인들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믿던 성도들은 힘을 내고 믿지 않던 자들은 새롭게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랑의 위로입니다. 교인들의 사정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위로가 필요합니다. 친하지 않던 사람의 어려움을 우리는 하나되게 하는 끈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어려움을 통하여 찾아가 볼 수 있고 더 관심을 나타냄으로 그 동안 멀었던 관계를 가깝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평소에 가깝지 않던 어떤 성도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기회는 왔구나하고 뻔질나게 찾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더 하나되게 하기 위하여 그런 어려운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혼자 내버려두면 그때는 정말 원수가 되게 됩니다.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성령의 무슨 교제입니다. 성령의 교제가 무엇입니까? 나에게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남는 돈이 있으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남는 돈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분명히 이 돈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해 주십시오그러면 교회에서 우연히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어떤 사람이 꼭 그만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누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지만 성령님께서는 알고 계시며 우리를 그런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더 성령님을 의지하게 되고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나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나귀를 찾기 위해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종이 하는 말이 가까운 곳에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이 있는데 그에게 찾아 가 보자고 했습니다.

사울은 그에게 바칠 예물이 없다고 하니까 종이 은을 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구약에서 빌려 헌금하는 일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나귀를 잃은 것은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더 큰 뜻을 발견하는 매개체에 불과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미 나귀는 찾았고 그가 해야 할 일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달랐습니까?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더 큰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게 하는 매개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잃어버린 그 작은 것 보다 악한 사탄의 세력과 싸우기 위하여 준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길을 갔을 때 사무엘이 예언한 대로 선지자들의 무리를 만났고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먼저 된 자가 겸손하지 않으면 절대로 교회는 하나되지 않습니다. 먼저 된 사람이 겸손할 때 그 뒤에 믿는 사람들도 자동적으로 고개를 죽이고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 성도들은 특이한 방식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처음 인사는 마라나타였습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곧 오시니까 죄악에 빠지지 말고 정신을 차리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핍박이 일어났을 때에는 물고기로 표시했습니다. 물고기는 헬라어로 익투스인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라는 말의 첫 머리 글자입니다.

쿠오바디스라는 영화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땅에 물고기를 그려서 신분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회는 그렇게 빈번하게 움직이는 사회가 아니어서 다른 교회와의 갈등같은 것은 별로 생길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장 심했던 것이 에베소 교회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관계였습니다. 혹은 빌레몬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자유인과 노예의 문제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의 문제는 이런 심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고 감정적인 문제나 혹은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다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 바울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사이에는 무엇인가 불편한 관계가 있었고 마귀는 그런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신앙이 어린 신자들만 깊은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소자들을 실족하게 됩니다.

바울은 1절 끝에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불쌍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자기를 주장하고 화를 내면서 불순종하는 것은 아직 어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면 끝나는데 감정적으로 대처하게 되면 피차간 깊은 상처를 입게 되고 처음 믿는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타격을 입게 됩니다.

 

2. 마음을 합하라.

 

사도 바울은 하나되지 못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아주 강한 표현으로 하나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2,“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여기에 같이 하라또는 합하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렇게 본질적인 것이 아니면 상대방에게 자신을 맞추어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 대하여 전혀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서로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인해서 함께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다른 모든 차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침몰하는 뱃속에 갇혔다가 온갖 고생을 다 한 후에 함께 구조된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사실 그들은 서로 공통점이 전혀 없습니다. 공통점이라면 같은 우연히 같은 배를 탔다가 함께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고비를 함께 넘겼다고 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 두 사람을 가깝게 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위험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멸망에서 함께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다른 사소한 차이를 다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면 가만히 있지 말고 진리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상 장단을 맞추어주라는 것입니다. 고개도 끄떡여주고 박수도 쳐 주면 그 사람이 완전히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제가 한 10년 전쯤에 처음으로 라디오 인터뷰를 할 때였습니다. 사실 그때 인터뷰라는 것은 처음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말을 못하겠다고 했더니 인터뷰하러 온 리포터가 그러면 자기 눈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리 시시한 소리를 해도 눈을 맞추어주니까 용기가 생기면서 이야기가 술술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이야기들이 시시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시시한 소리가 그들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시한 소리에 장단을 맞추어주고 눈을 맞추어주고 마음으로 인정을 해주면 어떻게 됩니까? 아주 훌륭한 일꾼 한 명을 얻게 됩니다. 사실 인격적인 교감은 시시한 소리을 얼마나 잘 받아주고 격려해주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한없이 기다려주고 실제로 나에게는 중요한 이야기 아니어도 귀를 기울여줄 때 완전히 한 사람을 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랑한다고 할 때 다른 사람을 나처럼 만드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을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동물 복제가 유행하면서 유전공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얼마 가지 않으면 사람도 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모두 마릴린 몬로같이 복제를 하고 남자들은 모두 아인쉬타인같이 복제를 하면 어떨까요? 그것은 완전히 재앙입니다. 왜냐하면 마릴린 몬로가 얼마나 멍청한 여자입니까? 또 아인쉬타인이 얼마나 재미없는 남자입니까? 사실 우리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만 있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저는 제 같은 사람은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융통성 없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으면 얼마나 이 세상이 불행해지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더 그 사람다워지는 것이며 그 사람 나름대로의 방식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유리한 일이라면 설사 나에게는 손해가 되더라도 축복해주고 격려해 줄 때 참으로 마음속에 풍성한 사랑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가 마음을 합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실현함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자아 실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인들의 경우에는 물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남편이 자기 자신을 실현하도록 돕거나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으로 자신을 실현합니다. 유명한 사람 뒤에는 항상 그 사람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뒷바라지를 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사람이 더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남을 행복하게 해 주면 복을 받습니다. 남을 붙잡아주면 자기 자신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하면 결국 내 자신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관계를 통하여 완성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이 우리 안에 있게 하려면.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여기서 주님의 일을 하는데도 두 가지 자세가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일을 하는데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하고 자기 잘난 체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일은 잘해낼 수 있겠지만 자기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물론 그 일도 유익을 얻은 사람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는 영적으로 아무 유익도 없고 오히려 그 일을 하고 난 후에 더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 없이 그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내 마음이 참으로 겸손하고 나의 부족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의 도우심을 붙들고 있다면 그 일에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모임에도 그렇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겸손하고 온유하며 서로 다른 사람을 나 보다 낫게 여긴다면 그것은 분명히 주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그냥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모인 자들에게 놀라운 감동을 주십니다. 그들의 영혼을 기쁘게 하며 치료할 자를 치료하시며 위로할 자를 위로하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서로 겸손한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중세 때 어느 수도원이 몰락하게 되어 사람들이 다 떠나고 다섯 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 이 수도원도 문을 닫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까운 곳에 한 선지자가 기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자기 수도원의 딱한 사정을 말하고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길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지자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당신들 중의 한 사람을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장은 돌아와서 그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서로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원장님을 예수님처럼 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연장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장은 다른 형제를 예수님처럼 존경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온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형제는 다른 젊은 형제를 예수님처럼 대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성경에 능통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한 여행객이 지나가다가 그 수도원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곳이 다른 곳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섯명이 있는데 꼭 여섯명이 있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나머지 한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들만 있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거기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수도원은 다시 번창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볼 때 예수님처럼 대하십시오. 성가대대원들은 지휘자를 예수님처럼 대하십시오. 그리고 지휘자는 반주자를 예수님처럼 대하십시오. 성도들은 교회에 새로 오신 분들을 예수님을 대하듯이 하십시오. 특히 장애인들이 오시는데 그 분들을 예수님처럼 대하십시오. 노인들이 오시는데 그 분들을 예수님처럼 대하십시오. 사람들은 우리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무엇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능력과 풍성함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겸손한 자들 안에는 반드시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서 진리의 촛대가 옮기워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겸손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래 기도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는 우리를 포기하고 죽이는 시간입니다. 나의 생각을 버리는 시간이고 나의 고집을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는 시간입니다.

 

4. 전체적인 균형을 생각하라.

 

요즘 우리는 빅딜이라는 용어를 신문에서 자주 보고 있습니다. 대기업에 내부 구조를 조정하라는 정부의 요구입니다. 몇십개의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대 기업에게 가장 중요한 것 몇 개로 전문화를 해서 줄 것은 주고 살릴 것은 살리라는 주문입니다. 사실 그 회사의 입장에서는 생살을 깎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그것이 있어서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것을 만들어내기 까지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그런 요구하는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은 어느 기업 하나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가 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나라가 살고 봐야 하니까 기업도 협조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라가 잘 될 때 같으면 이런 소리나 저런 소리를 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나라가 어려우니까 같이 살기 위해서 나라 전체적으로 효율성을 살리는 쪽으로 조종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면 효율성에 있어서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선교사로 가는데 한쪽 지역으로 편중해서 갈 수도 있습니다. 혹은 목회자가 과잉되게 배출될 수도 있고 불필요하게 서로간에 과당경쟁을 할 수도 있습니다.

4,“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 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물론 교회 구성원은 각자의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아 전체적으로 교회가 균형있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라는 말은 자기 위주로 생각하지 말고 전체적인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 중심에서 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전체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조금만 양보하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데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불필요한 정력과 수고가 낭비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 적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면 불필요한데 정력을 다 낭비하게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사랑하는 동역자를 죽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격려해야 할 자는 낙심하게 하고 경고해야 할 자를 의기양양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오늘날 교회의 균형보다 더 필요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많은 목회자들이 배출되고 있는데 다 담임목사가 될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을 전문 사역자로 만든다면 얼마나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선교 단체나 지역교회가 잘 협력한다면 더 큰 효과를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한 것을 다른 사람이 또 하고 그것을 또 다른 사람이 한다면 얼마나 비효과적입니까?

우리는 각기 양과 같아서 자기 고집대로 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양이 순한 줄 알지만 또 미련한 것도 양입니다. 전에 어떤 퀴즈대회에서 철조망을 가장 먼저 발명한 사람이 누구냐 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정답은 목동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양이 우리를 잘 탈출하고 도망을 잘 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휘자가 필요하고 리더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신적인 리더쉽을 카리스마적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신비로운 느낌을 가지고 있어서 무조건 고개가 숙여지는 지도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카리스마의 리더쉽은 절대적인 것은 좋은데 잘못된 결정까지 따라갈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권위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고 그 말씀을 듣고 각자가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할 때 놀랍게 모든 것이 일체가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휘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십시다.

저는 대구에 와서 정말 소경 같이 여러 주를 보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도 누가 누구인지 모르고 어디가 어딘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매일 나의 길을 인도해 달라고 간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늘 주님이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런데 그 결과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도 아름다웠습니다.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상처를 입지 않으려면 공동체 자체가 성숙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가 진리로 더 변하고 더 정직해지며 서로를 더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충만한 역사가 우리 안에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