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빌립보

[빌 1:22]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감 _ 김서택 목사

'코이네' 2023. 4. 22. 12:47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감

본문 : 빌 1:22-26

설교 : 김서택 목사 

 

 

 

요즘은 호스피스라고 해서 암 환자들만 따로 간호하는 사역에 관심을 가지거나 참여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암 병동에서 병실에서 말기 암 환자들이 함께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합시다. 물론 이들은 모두 거의 살아날 가망이 희박한 분들입니다. 그 중에서 상태가 가장 심한 한 분이 다른 분들에게 자기가 어제 죽음을 앞두고 생각한 여러 가지 생각들과 감정들을 유언처럽 이야기 한다고 합시다.

어제 밤에는 십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꿈에 보이지 않겠소?”라고 하면서 자기가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미련이나 생에 대한 강한 집착과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죽어야만 하는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습니다. 아마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이 세상의 어느 누가 할 수 있는 대화보다 더 진실하고 진지한 나눔이 될 것입니다. 아마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암 환자들은 눈물을 끊임없이 흘리면서 그와의 이 마지막 나눔의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다 마친 후 혼자서 나는 정말 더 살고 싶어!”하면서 원망하듯이 부르짖을 때 얼마나 그 말이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귀에 들리겠습니까?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감방에 사형수들만 들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모두 확정 판결을 받아 놓고 사형 집행만 기다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한 명이 나머지 사람들을 두고서 어제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한다고 합시다.

나는 어제 멋진 꽃가마를 타고 옛날에 어릴 때 놀던 고향집으로 가고 있었어라고 말을 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눈치 챌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안타까웠던 어린 시절이나 청년 시절을 이야기하고 또 아무도 모르게 짝 사랑했던 한 소녀의 이야기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만일 다시 나에게 새로운 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멋지게 시작할텐데 하면서 한 숨을 쉴 때 주위에 있는 사형수들은 그것이 남의 일로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이 세상에서 태어난 후 가장 진지하고 아름다운 나눔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자신이 스스로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 것을 사실 그대로 편지에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의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이나 미련을 적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했을 때 죽음이 가지는 그 엄청난 매력 때문에 거의 완전히 그 안에 빨려 들어갈 뻔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 너무 좋아서 이제는 과연 죽을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죽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 삶에 너무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고 죽음 자체에 대한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이 죽음 뒤에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축복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은 후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생각했을 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다시 이 세상으로 끌어 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대한 그의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얼마나 사랑했든지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이들이 생각났고 그들에 대한 사랑이 이토록 강렬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때도 그의 머리에서 떠날 수 없었을 정도로 그에게는 귀한 존재였습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 사람이 우리를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그 사람에게 중요한 사람일 것입니다. 죽는 순간에도 가장 보고 싶어하며 손을 놓고 싶지 않고 그 사람 때문에 사망의 세력을 떨쳐버리고 다시 힘을 얻게 된다면 그들은 너무나도 그에게 소중한 사람인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에게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실감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결코 앞으로도 죽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심각한 것에 대한 생각은 나중으로 미루고 싶어합니다. 예를 들어서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입학하자 말자 대학 입시 때문에 부들부들 떨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입시 고통을 뒤로 미루어 어느 정도라도 정신적인 자유를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언젠가는 죽겠지만 설사 언젠가는 죽는다 하더라도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 할 수만 있으면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죽음의 고통보다는 살아 있다는 기쁨을 누리기 더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백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는 이유는 그들을 공연히 고통스럽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죽기 억울하니까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잡쳐서라도 그들을 자신의 우울한 감정에 동참시키려고 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죽음의 순간에서도 얼마나 그들이 생각났으며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얼마나 그들이 바울에게 소중한 존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그 강렬한 사랑이 어떤 하나님의 뜻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얼마나 은혜스럽고 축복된 말씀입니까? 바로 사도 바울의 이 나눔이야말로 그가 빌립보 교인들과 나눌 수 있는 가장 깊이 있고 진지한 나눔이었습니다.

 

1. 사는 것에 대한 바울의 생각.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어차피 이 세상에 던져진 삶이기 때문에 주기 전까지는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이 세상에 사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22,“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른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식물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을 자기 일의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열매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식물이 최종적으로 만들어내는 가장 맛있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무는 겉으로 보기에 그 안에 어떤 양분이 있으며 어떤 능력이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무는 뿌리에서 수분을 빨아 들이고 태양열을 광합성해서 상상할 수 없는 과실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사람들이 과일 나무를 찾는 것은 바로 이 과실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바로 이런 열매맺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과일 나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일은 나무가 수분과 햇빛을 가지고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시간과 공간을 자신의 인격 안에 끌어 들여서 놀라운 하루하루의 삶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루하루는 자신의 인격의 열매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을 실현하는 기회로 삼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자기가 짓지 않은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죄라는 죄는 다 지어보고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악한 기질의 열매를 맺다가 죽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유대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회개하는 흉내만 내다가 그만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식물이 완전히 자기 사명을 다하려면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그 다음에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처럼 이번 기회에 자신의 죄에 대하여 완전히 뿌리를 뽑으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거나 혹은 미안한 마음만 가지는 것은 회개의 열매가 아닙니다. 현재 자신의 처지를 철저하게 보고 그 다음에는 그 원인까지 파고 들어가서 완전히 뿌리까지 뽑는 것이 회개의 열매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 살수록 더 많은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 안에 들어 있는 본성이 바로 악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오래 산 사람이 적게 산 사람보다 죄를 더 많이 짓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하루 종일 악한 것만 생각하고 연구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뿌리는 마음 안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아마도 짓지 않은 죄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죄들을 골고루 짓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이 죄를 광합성해서 죄의 열매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하루하루 그냥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 자기 인격을 가지고 삶의 열매를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악한 열매를 만들고 선한 사람은 선한 열매를 만듭니다.

물론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죄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대충 대충 뒤에서 숨어서 죄를 짓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면에 나서서 용감하게 기독교인들부터 제거하는 일을 했습니다.

아마 그런 상태에서 사도 바울이 오래 살았다면 다른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죄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캄보디아의 폴포트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든지 그는 캄보디아를 킬링 필드로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 까지 마음속에 분노와 악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죄를 지으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그의 마음속에 깊이 비취었을 때 그는 죄의 뿌리가 자기 내면 어디까지 들어가 있는지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못박고 새로운 성품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리고나서는 바로 이 열매맺는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원하는대로 살기를 원했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주님의 선한 뜻이 열매로 이루어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각을 열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행동으로 만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주님이 자기 안에 만들어 놓으시고 뿌려 놓으신 거룩한 능력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살면 살수록 더욱 더 주님이 자기 안에서 많은 일을 행하실 줄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오랜 세월 싹을 내는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열매는 맫지 못하고 꽃만 피우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터는 본격적으로 열매를 맺을 것 같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내 일의 열매라고 함으로 단순한 삶만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구체적인 사역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만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목자가 양을 생각하듯이 이방인들만 보면 마음이 끌리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많은 열매를 얻었지만 이제부터는 더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무엇을 갈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엄청나게 긍정적으로 말을 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죽음에 대한 가능성이었습니다.

 

2.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23,“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사도 바울은 지금 자기가 이 둘 사이에 꽉 끼어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떤 자매가 있는데 너무나도 좋은 두 남자가 청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깝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 모두 다 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바로 이런 표현을 쓸 것입니다. ‘지금 내가 두 남자 사이에 꽉 끼어 있다고 말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의 마음을 결정해야지요. 그러나 어떤 여자는 남자들로 하여금 결투하게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더 용감한 사람을 택하겠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말을 들으면서 정말 우리 귀를 의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그토록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까 너무 좋아서 도무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않기 위하여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은 죽음 예찬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도 결코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시위대 안에 있는 감옥에 이송되어 오면서 혹시 자신의 재판이 앞 당겨지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바울의 마음속에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죽음이 무엇이길래 내가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무조건 죽음을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어차피 한번 죽음을 거쳐야 한다면 죽음에 대하여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생각납니까? 죽음의 고통이지요. 죽음은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당하는 고통중에서 가장 큰 고통은 죽으면서 겪는 고통일 것입니다. 칼로 목 베임을 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칼로 목이 잘라지는 순간 얼마나 목이 아프고 답답하겠습니까? 아무리 빨리 잘라준다고 해도 몇 초 동안은 의식이 있을 것 아닙니까? 역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화형 당하는 것입니다. 불에 타 죽는 것이 인간이 죽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합니다. 짐승에 물려 죽는 것은 어떻습니까? 짐승이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 뜯을 때 얼마나 고통이 크겠으며 얼마나 절망이 되겠습니까? 혹시 고문을 오랫동안 당하면서 혹시 그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주님을 부인이라고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그냥 고통없이 편안하게 죽는다 하더라도 죽은 후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라는 존재가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나의 시체는 썩어가고 그 위에 구더기가 생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라고 해서 이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아예 날을 하루 잡아 놓고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도 죽음은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대답은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직접 눈으로 뵙는 것입니다. 물론 죽음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순간은 너무나도 잠간이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여러분, 부부가 오래 떨어져 있으면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공사 때문에 몇 달동안 떨어져 있는 부부가 이제는 공사가 끝나서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과 더 이상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엄청난 것이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늘 함께 하셨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찾아 오셔서 위로하시고 힘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힘들 때마다 오셔서 속삭여 주셨습니다. 너무나도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에는 성령을 부어주셔서 그 어려움 중에 기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주님을 직접 눈으로 뵙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죽음이 갑자기 좋아졌습니다. 죽음의 고통은 잠간입니다. 한두 시간 길어야 서너 시간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영원한 영광 가운데 주님과 계속 함께 있게 됩니다.

오늘 여기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바울의 이 기대가 단순한 논리적인 추론이 결과냐 아니면 그가 이전에 한번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해 본 적이 있길래 이런 말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논리적인 생각만으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마도 사도 바울이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그때 혹시 천국의 체험을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에 맞았거나 교통 사고로 의식을 잃었던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의식이 없었을 때 아무데도 간 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단지 의식만 없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 안에서 주님을 체험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일 보다 더 좋은 것이었습니다. 고난 가운데 성령의 부으심을 체험하신 분들은 이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천국이 얼마나 생생했으며 얼마나 가깝게 느껴졌던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좋은 기억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주님이 나를 성령으로 축복해주시던 그 때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것은 성령 세례의 체험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주님을 처음 만나고 성령으로 충만해졌던 그때만 생각하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것을 욕망이라고 표현합니다. 정말 너무 원하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그것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박탈당하는 형벌의 순간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죽음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가 더 고통스럽게 될 것입니다. 지옥의 형벌은 이 세상의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죽음은 믿음의 마지막 헌신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자신의 영혼을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자신을 다시 살릴 것을 믿고 마지막 순간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물론 죽음의 순간은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도 주님은 함께 하셔서 고통이 너무 심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 뒤에는 바로 주님을 우리 눈으로 뵙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죽음은 주님께서 더 가까이 가는 과정입니다. 죽음의 고통은 그 후에 찾아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이 짧습니다.

저는 늘 죽음을 수영장에서 물미끄름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위에서 올라가 보면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그러나 밑으로 내려가면 결국 다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과 잠깐 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믿음의 연주입니다. 그러나 죽는 것은 그 연주 후에 갈채를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연주가 뛰어나더라도 한 평생 연주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갈채가 더 좋지요.

 

3. 죽음 보다 더 뛰어난 것.

 

사도 바울이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때에 가장 많이 생각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빌립보 교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절망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들은 바울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헌금하는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코 바울은 우리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죽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다시 감옥에서 나와서 우리에게로 한번 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로 갈 것을 생각하면 좋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믿음으로 잘 살아도 결국 죄짓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갈등이나 좋지 못한 것이 함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백 프센트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로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를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빌립보 교인들이었습니다. 24,“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마치 이 말을 들으면 바울 자신이 죽음을 택할 수도 있고 사는 것을 택할 수도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죽음도 사는 것 이상으로 괜찮았습니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그의 마음은 감옥 안에서 기쁨으로 충만해지고 있습니다. 이미 그의 마음을 성령께서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서 예민하지 않은 자들이 없습니다. 그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마음이 연약하고 섬세합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아무리 욕을 얻어먹어도 마음이 아픈 줄 모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너무나도 쉽게 마음이 상하고 너무나도 쉽게 절망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이 아주 작은 생각의 변화나 논리적인 추론을 통하여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 고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할 수 없는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지금 바울의 마음속에 강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드는 자체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만나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든다고 해서 그것을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 결혼에 대한 생각이 요즘 자꾸 납니다. 그래서 혼자서 생각을 해 봅니다. ‘요즘 왜 내 안에 결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드는 것일까? 이것은 혹시 결혼하라고 준비하라는 싸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지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도저히 살 것 같지 않은 절망의 순간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나의 심령을 만져 주시며 나에게 어떤 강한 소원을 주실 때 이것은 바로 내가 이 절망에서 일어나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실 마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빌립보에 구체적으로 간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감옥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다가 새 힘을 얻게 되었을 때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기가 그토록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자기가 이번에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25,26,“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인하여 너희가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이런 생각의 유추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로 알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이야말로 바울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기쁨을 나누는 것이며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과 생각과 체험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진지하게 그리고 가장 깊은 부분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 편지 안에서 빌립보 교인들도 바울과 같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그와 함께 주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울을 만져 주셨듯이 이 편지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도 만져주시는 것입니다.

전에 한 형제는 아내의 네 번째 아이의 임신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모임에서 나누었습니다. 세 번째 아이도 힘들었는데 네 번째 아이까지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형제의 체험을 나눔으로 우리 자신이 네 번째 아이의 임신의 문제를 경험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네 번째 아이를 낳지 않은 분도 그의 진지한 고민을 들으면서 우리를 이미 그런 경험까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가장 깊은 부분을 나누었을 때 우리는 이미 그와 함께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도의 심정을 들음으로 이미 우리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 안에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진지하고 아름다운 나눔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도 그에게서 이 빌립보 교인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을 정도로 이 이방인 교인들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더욱이 바울이 가장 힘들 때 그를 믿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외로와 할 때 그의 곁에 서 있어 주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의 순간을 생각하면서도 이들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다시 한번 사역의 기회를 주셔서 빌립보 교인들을 축복하게 하시는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격으로 광합성을 해서 하루하루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시간이 주어질수록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래 사는 것이 복입니다. 처음 기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어렵지 한번 만들어지면 그 다음부터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고장이 나지 않는 이상 계속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더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예수 믿으면서 죽는 것보다는 더 복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도대체 죽어야 할지 살아야 할지 결정을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좋고 죽는 것도 좋습니다. 마치 어떤 처녀가 멋진 두 남자의 청혼을 받고 결정을 하지 못해서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또 약한 성도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몸을 너무 아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었다가 부활할 때에는 이 몸으로 부활하지 않습니다. 이 몸이 너무 낡았다해서 해서 부활할 때 낡은 몸으로 부활하지 않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엄청난 삶의 보고가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보물섬의 보물 창고 안에 들어와 있는 소년들과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 안에서 위대하게 산 사람들과 가장 진지하고 아름다운 나눔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 주안에서 오늘 많은 형제와 자매들의 삶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그들 안에서 그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나누는 것을 통하여 가장 위대한 삶도 경험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살지만 이미 수십명 아니 수백명의 인생을 누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들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까지 솔직하고 진지하게 나누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은 미리 자신의 죽음까지도 극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바울 안에서 감옥도 경험했고 죽음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