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 26:31] 시험이 오는 통로

'코이네' 2023. 2. 18. 23:42

시험이 오는 통로 

성경:마태복음 26:31-35

 

 

 

성경을 자세히 살펴 나가노라면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로 구분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그것은 시험을 이긴 사람들과 시험에 넘어진 사람들입니다. 시험은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욥이나 다윗이나 베드로나 바울,그리고 주님의 경우는 그 크고 무서운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아나니아와 삽비라,아간 같은 사람들은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습니다.그렇게 볼때 시험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 시험을 어떻게 대하느냐,그 시험을 어떻게 이기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험도 미리 오는 것을 알고 예방만한다면 별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적이라고 부르는 성인병의 경우 조기 발견만 하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합니다.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방이라고 합니다.요즘 예방 의학이 각광을 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를 모델로 시험이 오는 통로를 발견하고 예방과 또 이기는 비결을 찾도록 합시다.

 

시험이 오는 통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1.지나친 자기도취입니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26:33을 보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고,마가복음 14:31을 보면,“내가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으며,누가복음 22:33에서는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또,요한복음 13:37을 보면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복음서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지나친 장담은 결국 내가 제일이며 내가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과신(過信)과 도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언뜻 보아 신앙 고백처럼 보입니다만,그러나 고백은 실천될 때 참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말로야 누군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못할 사람이 있겠으며 헌신하지 못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베드로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내세우고 믿었다는 데 있습니다.그리고 행동보다는 말을 앞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떠벌리는 신앙,실행없는 신앙은 시험받기 쉽고 약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십일조,봉사,철야,금식,헌신,사랑 등 이 모든 것을 입으로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미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친 그물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대개의 경우 장담은 허풍스러움과 통합니다. 속이 차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장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이 빈 사람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장담을 늘어놓기 마련입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언제나 떠들고 말 많은 총잡이가 말없이 눈을 굴리는 총잡이한테 당하는 것이 정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허풍 떠는 신앙은 빈 수레와 같습니다.그리고 그런 신앙 태도는 시험이 찾아드는 통로가 됩니다.

 

2.혈기입니다.

 

마태복음 26:51을 보면 베드로가 칼을 들어 사람을 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는 직설적으로 베드로였다고 그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만, 요한은 요한복음 18:10-11에서 그가 베드로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수행하는 베드로가 로마 병사처럼 칼을 휴대했다는 사실도 문제이고, 더욱이 칼을 휘둘러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잘랐다는 것은 해석이 다소 곤란하기까지 합니다. 우린 여기서 의분과 혈기,비폭력과 폭력을 혼동해선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혈기는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표출하는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자기가 자기를 억제하지 못할 때 혈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현재 미국 안에는 약 4천만명의 만성 두통 환자가 있다고 합니다.과할 천국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에 왜 그토록 많은 만성 두통 환자가 있겠습니까?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이나 욕구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만성 두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의사인 그레이스(Grace)와 그래함(Graham)팀이 128명의 외래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입니다. 두드러기 때문에 찾아온 31명의 환자들은 자신이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다고 느낄 때 두드러기가 일어났고, 27명의 습진 환자들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데 심한 간섭이나 방해를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습진이 일어났으며,10명의 비염(鼻炎) 환자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비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7명의 천식 환자들 역시 어떤 절망감을 가졌을 때 천식이 일어났고,9명의 십이지장 궤양 환자들은 증오심을 품고 복수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레이스와 그래함 의사 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대부분의 질병의 원인이 물리적인 데 있기보다는 정신적인 데 있다는 것입니다. 화 잘 내고 신경질 잘 부리고 혈기 내는 것도 예외가 아닙니다.

 

혈기를 잘 부리는 데는 다음의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욕구 불만 때문입니다.

둘째,약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주의 성령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넷째,사탄의 노리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레이 버위크(Ray Burwick)박사는 혈기 혹은 분노를 가리켜 “감추어진 폭탄”이라고 말하면서 “폭발하는 분노는 당신의 건강을 해친다.그것은 무서운 파괴력으로 궤양,고혈압,그리고 편두통을 일으키며 감정적으로 우울증을 일으키고 심하면 정신 이상도 일으킨다”라고 했습니다. 혈기는 전염병입니다.그리고 습관입니다. 잠언 22:24-25을 보면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븓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린 이 말씀 속에서 분노는 전염된다는 사실과 영혼까지고 파멸시킨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26에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혈기(분노)를 이기려면

첫째,그 위험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명한 생리학자인 존 헌터(John Hunter)박사는 평소 심장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그리고 늘 입버릇처럼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 나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의학 세미나에서 한 사람이 헌터 박사를 공격하고 모욕을 주었습니다.그래서 맞받아 소리를 지르고 욕하는 순간 헌터 박사는 심장 심실의 수축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조지 크릴(George Crill)박사는 “오래 사는 비결은 긴장과 분노를 피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둘째,그 무익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잦은 혈기나 분노는 모든 관계를 깨트립니다. 가정 불화의 원인이며 교회 분란의 원인이며 사회 생활 부적응의 원인이 됩니다.백해 무익합니다.

 

셋째,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화 잘 내고 혈기 부리고 성 잘 내는 것은 사탄의 뜻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바울은 디모데전서 2:8에서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3.무사 안일주의에 빠진 신앙 태도입니다.

 

마태복음 26:40을 보면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했습니다.여기서 말하는 한 시 동안이란 극히 짧은 시간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시간 정도로 깨어 있지 못했느냐는 책망이며 탄식인 것입니다. 사실 그날 밤 제자들은 한 시간 정도도 깨어 있을 수 없을 만큼 중병이 걸렸거나 허리가 부러졌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은 신앙 태도가 안일에 빠져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신체 구조는 적당한 휴식을 할 때 새로운 활력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적당한 때 적당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정상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신앙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해야 할 때 졸고 있다든지 찬송해야 할 시간에 잡담을 한다든지 일해야 될 사람이 잠만 자고 있다면 시험이 오는 통로를 열어 주게 될 것입니다.

 

4.거리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58을 보면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베드로의 모습을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갔다”라고 했습니다. “멀찍이”라는 말 거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 불리하면 뛰어 달아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태도를 가리켜 브루스는 “다른 제자들보다는 용기 있는 처신이었지만 그러나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고속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자동차 사이에는 거리라는 게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나 사이에는 거리가 있어선 안 됩니다. 예를 들면 남남끼리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합니다만 부부 사이라든지 부모 자식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산다면 그것은 불행한 삶일 것입니다.마찬가지로 주님과 나 사이에도 거리가 없어야 합니다.주님과 나 사이에 거리가 있다면 그 사이에 시험이 끼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어느 날 화장실 천정에서 20초 간격으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니까 1초 간격으로 물방울이 떨어졌고 크기도 커졌습니다. 이유는 하수 파이프 틈이 벌어지면서 물이 샌 것이었습니다. 물은 틈만 있으면 샙니다. 그러나 틈이 없으면 새지도 않고 스며들지도 않습니다. 시험의 경우도 주님과 나 사이에 틈이 생기면 끼어 듭니다. 틈이 생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감정,편견,고집,게으름,완악함 등이 원인이 됩니다. 빨리 거리를 좁히고 틈을 막아야 합니다.그래야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5.혼합주의입니다.

 

마태복음 26:69을 보면,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잡혀 끌려가신 가야바의 뜰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았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예수를 사형시키자고 소리 지르고 얼굴에 침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조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틈바구니에 끼어 앉은 사실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참기름은 참기름 담았던 병에 담아야 합니다. 식수는 물병에 담아야 합니다.석유통에 생수를 담으면 석유도,식수도 둘 다 버리고 맙니다. 베드로는 섞이는 바람에 시험에 빠졌습니다.시험은 신앙의 혼합주의라는 통로는 통해 옵니다.그러나 순결한 신앙을 고수하면 시험은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시험을 이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시험이 오는 통로를 차단해 버리면 됩니다.시쳇말로 원천봉쇄를 해 버리면 된다는 말입니다. 혈기는 마귀의 선물이니까 그 대신 성령이 주시는 온유와 절제와 화평의 선물을 받으면 물러갑니다.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됩니다. 텅 빈 내 속에 말씀의 능력을 꽉꽉 채우면 허풍 떨고 장담하는 짓을 그만둘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바싹 따라가고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려면 주님과 연합해 버리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안으로 나를 포기한 채 들어가 버리면 됩니다. 마치 주님이 사탄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듯이,우라도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대로 살면 오던 시험도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시험을 이기신 주님을 의지하고 내 모든 시험을 주님에게 말씀드린다면 시험은 나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예수님처럼 우리도 시험이 오는 통로를 차단해 버립시다. 말씀과 믿음으로 무장하고 마귀의 도전을 물리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