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 1:1] 구약에서부터 오신 그리스도 _김서택목사

'코이네' 2023. 3. 23. 20:55

구약에서부터 오신 그리스도

(마태복음강해 1)  1:1-6

설교 : 김서택 목사 

 

 

 

사람들은 스타의 등장을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스타의 탄생은 우리의 삶을 보다 윤택하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요즘 미국 프로 야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한 야구 선수에 대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이 열광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한 사람의 존재가 미국 프로 야구에서 우리들의 위상을 높여 주었을 뿐 아니라 야구를 통하여 세상을 사는 재미를 한층 더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스타의 탄생은 우연한 것이고 미리 예측된 것이 아닙니다. 골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까지 우리 나라 일반인들에게 골프라는 스포츠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 선수가 세계적인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바람에 여자들이 얼마나 골프를 배우겠다고 난리를 피우는지 모릅니다. 이런 스타의 탄생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우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옛날 왕위는 대개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아무나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의 아들 중에서 대개 왕위를 상속하도록 예정된 황태자가 왕위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현재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언제 어머니의 왕위를 계승할 것인지 아니면 진짜 왕위를 계승하기는 할 것인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영국의 왕위가 실권이 거의 없는 상징적인 자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 선거에서 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인지는 온 세계가 관심을 가집니다. 그 이유는 미국 대통령의 자리는 전 세계의 모든 문제가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실권이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 세계적인 대왕의 출현.

 

옛날에 한때 전 세계의 운명을 좌우했던 왕 중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페르시아의 다리오라는 왕이 있었고 그 뒤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로마의 쥴리어스 시저라는 사람이 있었고 몽고에는 징기스칸이라는 인물이 있어서 한 때 유럽까지 진격을 해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왕들은 모두 한 때 전 세계를 자기 손안에 넣고 온 천하를 호령한 적이 있는 대왕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복자들의 출현도 예상하지 못했던 우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전 세계를 칼로 정복했고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하여 여러 나라들을 정복했던 야심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방의 아주 작은 나라에서 미처 이 민족이 나라를 이루기도 전에 한 대왕의 출현이 약속된 민족이 있었습니다.

이 민족은 그렇게 큰 나라도 아니고 또 한번도 세계적인 대국이 되어 본 적도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 민족 가운데는 앞으로 전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리며 온 우주를 자신의 손에 넣고 영원히 다스리게 되는 대왕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이 약속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놀랍게도 이 나라가 망하면서부터 였습니다. 그렇게 크지도 않았던 이 나라가 바벨론의 대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망하면서 오히려 바벨론 나라 안에서 이 대왕의 소문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이 대왕에 대한 소문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무수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에서 처음 대하게 되는 마태복음은 바로 그 대왕의 약속이 사실이었으며 그것이 나사렛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났을 때 동방에 있던 점술가들이 그의 별을 보고 찾아 온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 사도의 증거를 보면서 몇 가지 사실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첫째는 이 약속을 보존해 온 히브리 민족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 민족이며 전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미국이나 중국같이 큰 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비젼이나 소망이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고 하지만 이미 망해버렸으며 나라도 잃어버린 약소 민족의 꿈이 어떻게 전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그렇게 중요한 왕이 약속되었으면 그는 왜 그렇게 늦게 나타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처음 그 약속이 있은지 무려 천년이 지나고 난 뒤 그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을 했습니다. 과연 이렇게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성취되었다는 이 왕의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왜 이 왕은 이렇게 늦게 나타났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설사 그가 이렇게 약속된 대왕이라고 할 때 그가 등장함으로 가져온 결과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이나 징기스칸처럼 전 세계를 자기 수중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한 것은 오직 반역자로 몰려서 십자가 위에서 처형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바로 그가 약속된 대왕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지금도 그의 가르침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2. 마태의 복음.

 

마태복음은 신약 최초의 복음서로 알려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마태라는 제자는 놀랍게도 한 때 세리였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교회의 전승은 신약 맨 앞에 있는 이 복음서를 마태가 기록하였다는데 대체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마태복음을 연구하려고 하면 그만 입이 딱 다물어지고 맙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의 연구가 보통으로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쓴 책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고 그가 쓴 단편이 초기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라는 책에 남아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마태는 히브리어로 로기아(말씀)를 썼고 각 사람들은 할 수 있는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번역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히브리어로 된 복음서가 아니라 헬라어로 된 복음서인데 이것이 히브리어의 번역이기에는 너무나도 독창적인 헬라어 작품인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최초의 히브리어 말씀은 무엇이며 그것과 이 마태복음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 사이에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연관 관계가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지 등등을 생각하면 마태복음이 어떻게 헬라어로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보통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저의 설교집 만 해도 몇 개의 판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제가 직접 손으로 쓴 원고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녹음한 것을 풀어 쓴 책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것은 다른 분이 제 설교를 받아서 필기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것은 출판하는 과정에서 편집하는 분들이 임의로 삭제한 것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선지서 같은 경우에는 제가 몇 번에 걸쳐 반복해서 설교를 했기 때문에 처음 설교 한 원고도 있고 두 번째 한 것도 있고 세 번째 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가 살아 있기 때문에 누가 물으면 즉시 대답을 해 줄 수 있지만 제가 죽은 후에는 어느 것이 진본이며 어느 것이 처음에 쓴 것인지 결정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마태복음에 대하여 여러 가지 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의 전도 목적으로 히브리어로 복음서를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내용을 그냥 둘 리가 없지요. 누군가가 헬라어로 번역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번역판도 하나만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책의 형태가 아닌 구전의 형태로 이미 많이 유포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과정에 의해서 이 최종적인 마태복음이 완성되었으며 이 최종판에 대해서 마태의 책임으로 돌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간단한 과정에 의해서 마태복음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마태복음이 가장 완성된 마태복음이며 누군가가 책임있는 사람에 의하여 확정되었고 그 이름이 마태로 돌려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마태가 이 최종적인 마태복음을 가장 완성된 마태복음으로 확정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3.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

 

그런데 우리가 이 마태복음의 내용을 보면 보통으로 정교하게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어떤 정교한 옷을 짜듯이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번갈아 가면서 정교하게 짜놓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다섯 개의 커다란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모세의 오경을 본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태 사도는 이 다섯 개의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사이에 예수님의 행적을 끼워넣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과 이 가르침은 도저히 뗄 수 없는 한덩이이며 만일 예수님의 삶에서 가르침을 떼어낸다거나 혹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삶을 떼어내버린다면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예수님의 복음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바로 이런 가르침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실제로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누구든지 예수을 믿는 사람은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태복음 전체의 주제를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신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가셨을 때 요한은 자기가 세례를 줄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을 했습니다. ‘내가 당신에서 세례를 받아야 할터인데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십니까?’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바로 이 를 이루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시고 또 그들에게 어떤 힘을 주셔서 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러면 만약 이런 윤리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는 왕이 아닙니까? 이런 삶을 살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그는 굳이 왕으로 오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사실 그는 왕으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이십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런 새로운 삶이 가능하게 된 것이 그냥 된 것이 아니고 어떤 기초되는 언약이 있었기 때문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언약의 대표자이십니다.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생활하는 근거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법안에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같은 한국 사람이라 하더라도 북한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법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법의 대표자입니다. 이 법을 이 세상에 가져오신 장본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분은 이 새로운 삶으로 전 세계를 정복할 것입니다.

칼과 창으로 전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한 설득과 깊은 내면속의 감동을 통하여 결국 전 세계를 정복할 것입니다. 그는 한 두 번 이런 일을 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끝날 까지 이 싸움을 계속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죄에 파뭍혀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씀으로 설득하고 변화시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만드시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가 마지막 온 세상을 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욕심대로 산 사람들을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오셔서 영원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 까지도 다시 다 살려내어서 영원한 지옥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옛날에는 왕들이 가끔 죽은 자도 무덤에서 다시 꺼내어 심판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존 위클리프같은 사람은 한번 죽었는데도 교황청에서 다시 무덤에서 시체를 파내어서 참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시 시체를 파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한번이라도 산 적이 있는 사람은 다시 다 살려내어서 영원한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이 대왕은 알렉산더나 징기스칸같이 한번 반짝 나타나서 세계를 주무르다가 얼마 후에 역사에서 사라진 일시적인 왕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우리를 향하여 오셨으며 그는 일을 하셔도 수 천년의 기간을 두고 일을 하시며 그의 심판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에서 영원까지 미치는 정말 두렵고도 무서운 왕 중의 왕인 것입니다.

 

4. 히브리인들의 역사를 통하여 오심.

 

우리가 마태복음 서두에서 보게 되는 것은 이 왕에 대한 족보입니다.

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여기서 세계라는 말은 족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스타가 아니라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다윗에 걸쳐 약속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알게 되지만 그는 한 평생 자녀에 대한 약속을 붙들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왜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으로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 하시고서 아들을 주시지 않으시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그가 점점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아들이 전부가 아니라 앞으로 오실 위대한 한 왕의 예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그의 아들을 도저히 정상적으로 낳을 수 없는 나이에 낳았고 특히 그를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칠 뻔했다가 도로 얻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오실 왕이 이 세상에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않으며 그가 한번은 죽은 바 되지만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을 삶을 통하여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아들을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이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진 많은 믿음의 후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손또는 라는 말은 단수이지만 집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열매를 보면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 안에 수많은 작은 씨들이 들어 있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서 열왕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의 후손은 나중에 여러 민족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서 열왕이 나온다는 말은 단순히 그의 후손이 가지를 쳐서 많은 족속이 생기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상관이 없는 많은 이방 민족들이 믿음으로 그의 후손으로 입양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이나 히브리인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계보 안으로 입양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히브리인들이 정식으로 완전한 나라를 세운 사람입니다. 특히 그는 주위에 있는 많은 적들을 평정함으로 이스라엘을 굳건한 토대 위에 세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통치에 있어서 빛나는 것은 그가 철저하게 의로운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쳐부순 나라나 민족들은 모두 악명이 높은 범죄자들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서서 악한 자들을 심판하는 전쟁을 했고 이것이 주위에 있는 모든 나라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하고 자발적으로 조공을 바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유명하게 된 것은 바로 다윗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그 옛날 아브라함은 자신의 후손으로 오실 왕이 다윗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신정 정치의 이상을 실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옮기는 것은 허락하시면서도 그가 성전을 세우는 것은 허락지 않으심으로 역시 다윗이 그 왕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다윗 그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었으며 하나님의 용서없이는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인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 후에 이스라엘은 솔로몬 때 전성기를 보여주었으나 그 후 쇠퇴하기 시작해서 결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망하고 아직 완전한 나라를 회복하지 못한 채 당시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에 의하여 보여준 왕의 나라는 두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느 누구든지 믿음으로 이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나라는 의로운 왕입니다. 다윗이 의로운 왕이었던 것처럼 이 왕은 의로 나라를 다스릴 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을 실제로 의롭게 살게 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 왕에 대한 약속을 히브리인들의 역사 속에 보관시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전 세계적으로 그렇게 큰 민족도 아니고 큰 나라를 형성하고 있지도 않는 히브리인들의 역사에 그렇게 큰 신뢰를 둘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어느 민족도 미래에 어떤 위대한 왕이 나와서 자기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이 비젼은 너무나도 강렬한 것이어서 도저히 다른 어느 것으로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합니다. 사실 어느 누구든지 마음속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꿈이나 소망이 너무나도 강렬한 나머지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책을 받듯이 하나님께서 이런 내용을 아주 강렬한 메시지를 통하여 그들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존재한 것은 바로 이 세계적인 왕에 대한 약속을 보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또 다른 하나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왜 이렇게 중요한 약속을 모든 민족에게 알게 하시지 않으셨느냐는 것입니다. 왜 몰래 그렇게 크지도 않은 히브리 민족들에게 보관을 시키시고 다른 거의 대부분의 민족들은 모르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다른 민족들이 히브리인들을 멸종시켰을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 왕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헤롯왕은 군인들을 풀어서 그가 태어난 베들레헴의 모든 남자 어린아이들을 죽이게 했습니다. 유다 역사에도 보면 아달랴라는 악한 여자가 정권을 잡아서 다윗의 후손들을 다 죽였을 때 제사장 여호야다는 홀로 남은 왕자 요아스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를 감추어 두었습니다. 이 세상이 정상적이라면 이 왕의 역사를 공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죄를 좋아해서 이 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될 때까지 이 왕의 역사를 감추어 두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왕은 다 되어 있는 나라에 통치하기 위하여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역자들이 다스리고 있는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몰래 오신 것입니다.

 

5. 역사에 나타난 이방 여인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증거하고 있는 복음서, 특히 이 마태복음을 보면 어떤 위대한 사람의 전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기하면 어렸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대로 자세하게 기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거의 대부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이런 부분이 여기에 들어갔을까 의심되는 부분들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복음서를 편집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태는 자기 같은 세리들을 가장 혐오하는 히브리인들을 염두에 두고 이 복음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도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태 사도는 이 복음서를 통하여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메시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과 자기 자신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서 바른 신앙을 가지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 글을 쓰고 또 편집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변증적 전기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냥 연대순으로 어떤 사람의 생애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로 잡으면서 바른 인식을 가지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쓴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에서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의 여자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3,4,“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는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을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함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여기서 먼저 나오는 세 여인은 이방 여자입니다. 다말이라는 여자는 유다가 가나안에서 살 때 그의 며느리였던 사람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집에 시집을 옴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윤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서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를 해서 두 쌍둥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여리고를 배반하고 두 이스라엘 정탐군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룻은 모압 여자였는데 자기 남편이 죽었을 때 모압을 버리고 먼 이스라엘로 와서 생각지도 않게 보아스와 결혼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세 여인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 밖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세상적인 모든 것을 버렸을 뿐 아니라 상식을 뛰어 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솔로몬을 낳은 우리야의 아내도 이방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의 원래 남편 우리야가 헷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신하의 아내와 관계해서 솔로몬을 낳았다는 것은 그의 죄성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오해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자신들의 혈통이 특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혈통 속에는 많은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었고 특히 그들이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다윗 왕 자신이 죄에 오염이 된 자라서 그 후 계속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가 쇠퇴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로 세우실 나라는 다윗의 나라의 회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 이방 여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한 자들은 모두 그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통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면서도 그 나라를 사모하지 않고 말씀을 붙들지 않았던 자들은 모두 이 약속에서 멀어진 것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오해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 나라를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결론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언약의 공동체의 중요성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인들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족의 형태로 존재할 때도 있었고 애굽에서 나그네로 존재할 때도 있었습니다. 노예로 있던 때도 있었고 광야에서 수십년간 유리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다윗 때처럼 강한 나라의 모습으로 존재하던 때도 있었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비참한 포로 생활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는 하나의 사실은 바로 이 메시야의 약속을 가진 공동체로는 항상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 이상 이 세상에서 소멸되지 않았으며 언젠나 변함없이 존재했고 주위에 있는 나라나 민족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교회는 바로 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한 공동체입니다. 저는 교회라고 말할 때 제도적인 교회를 말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말합니다. 한번 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는 극장같은 교회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알고 책임질 수 있는 신실한 구성원으로서의 교회를 말합니다. 우리는 신적인 공동체입니다. 구성원들은 유명한 사람들도 아니고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아니지만 우리 안에는 신적인 영광이 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면 붙들수록 더욱 더 강한 영향력을 주위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있던 그 신적인 능력이 이제는 우리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연합하는 한 이 세상에 어떠한 변화와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는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왕이신 것을 고백하십시다. 그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반역하는 무리들 가운데 은밀하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이 나라 안에 들어오고자 하는 자는 세상적인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을 붙들고 있는 이상 그 나라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온갖 굴욕을 참고 이 나라 안에 속하기 원했던 이방 여인들마다 그 이름이 하나님 나라에서 높이 빛나고 있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왕만이 아니십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그 약속의 보관자로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그들도 이 왕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의 의를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고 원하시는 삶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 분께 우리의 삶을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으며 어떻게 가야 바른 길을 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을 신뢰하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하시고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 것 같던 나의 삶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인도되어 왔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왕을 기뻐합시다. 우리가 난민이 아니며 집시 족이 아니며 보트 피플이 아닌 것을 감사하십시다. 우리에게 신앙의 공동체를 허락하셔서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믿습니다. 나에게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형제나 자매를 섬기고 돕는 것이 내 자신이 사는 길인 것을 깨달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