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인가(3) "제사 드리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
창 4:1-12
설교 : 김명혁 목사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세 번째 설교를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사람은 즐겁게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들 한 주간 동안 즐겁게 지나셨습니까?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분들은 부모님과 어른들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지요. 그리고 형제들과 친척들을 찾아 보며 인사를 나누었지요. 사람은 인사 드리며 사는 존재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을 "제사 드리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고 했지만 쉬운 말로 하면 "인사 드리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고 바꾸어도 됩니다. 사람은 인사 드리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인사 드리며 살고 사람들끼리 인사 드리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어디 한번 인사를 드려 보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 인사 드리려 왔습니다. 아버지께 예배 드리려 왔습니다. 죄와 허물이 많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우리의 인사를 받으시고 기뻐해 주세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이제는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세요. 복음찬송 48장("화해하세요") 1절을 함께 부르십시다.
인사라는 말을 종교적인 용어로 바꾸면 제사라는 말이 됩니다. 히13:15,16에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제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 있고 둘째는 사람들에게 선행과 나눔을 베푸는 자선의 제사가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며 살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선행과 나눔을 베푸는 자선의 제사를 드리며 살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1. 인사 드리는 것은 참으로 좋고 즐거운 것입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에 몇 몇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렸고, 화요일 저녁에는 몇 몇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월요일에 집 사람과 안만수 목사님 부부와 함께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 뵙고 세배를 드렸습니다. 한 목사님이 좋아하시는 동양 난 꽃을 사 가지고 목사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마침 그 날이 한 목사님의 97회 생신이었습니다. 생일 축하 노래를 함께 불러 드렸을 때 한 목사님은 손뼉을 치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북한에 다녀 온 이야기를 하면서 속히 북한에 가서 일을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 드렸을 때 한 목사님은 손을 몇 번이나 내 저으시고 탁자를 치시면서 그래야 된다는 뜻을 강하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는 제 손을 꼭 잡으시고 저의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면서 "아버지 아버지"라고 힘을 들여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목사님을 항상 옆에서 돌보시는 백 장로님께서 저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한 목사님이 김 목사님 오시면 제일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 목사님을 자주 찾아 뵙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죄송하게 생각했습니다.
남한 산성을 떠난 우리는 과천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박종렬 목사님에게 세배를 드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난 꽃과 귤 한 상자를 가지고 박 목사님 내외분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박 목사님은 너무나 좋아하시면서 말씀을 하시고 또 하시고 또 하셨습니다. 옆에 계시던 사모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목사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아무 말씀도 못하셨는데 김 목사님이 오시니까 이렇게 말씀을 잘하시네요." 어른들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과천을 떠나 안양으로 향했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정진경 목사님에게 세배를 드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역시 난 꽃과 귤 한 상자를 선물로 가지고 갔습니다. 정 목사님 내외분은 너무나 반가워 하셨고 너무나 좋아하셨습니다. 사모님은 난 꽃을 보시며 너무 예쁘다고 말씀했습니다. 정 목사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그리고 강변교회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셨습니다.
작별 인사를 드리고 같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 네 사람의 마음은 한 없이 흐믓하고 즐거웠습니다. 사람은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어른들께서 너무나 좋아하시는 모습이 우리를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들의 인사를 받으시면 그렇게도 좋아하시지! 우리가 선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좋아 하실 거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요일엔 이모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고 그리고 화요일 저녁에는 KBS 방송을 통해서 몇 몇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부산에 사는 박희선씨와 잠간 인사를 나누었고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법륜 스님과 잠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화요일 저녁의 인사는 삶의 처지가 다르고 종교가 다른 특별한 사람들과의 인사였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화요일 저녁 KBS 방송에서 생방송된 대화의 내용을 잠간 들려 드리겠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자랑이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교제와 인사의 폭을 넓혀 가자는 뜻으로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KBS의 '생방송 오늘' 프로의 내용.............................................................................................."
사람이 인사를 나누며 사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가까운 형제와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그리고 형편과 처지가 다른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은 인간 다운 삶입니다.
2.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인사와 제사를 드리며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인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는 옆에 있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그렇게 지으셨고 가인과 아벨을 태어나게 했을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인사를 드리며 살고 사람들끼리 인사를 나누며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서 살고 형제와 이웃에게 선행과 나눔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아침 가인과 아벨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한 지붕 아래서 한 밥상의 밥을 먹으면서 형제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제사 때가 되었을 때 두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인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인사는 받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아벨은 제사 드리는 삶을 살았지만 가인은 제사 드리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지금 여기 예배 드리려고 오신 분들 중에도 어떤 분은 제사를 제대로 드리고 어떤 분은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서 사시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1) 가인은 제사 드리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리기는 했지만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창4:5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은 이유 3가지를 발견합니다.
첫째 가인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히11:4에 보면 아벨이 믿음의 제사를 드린 데 비해서 가인은 믿음의 제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가인의 마음 자세가 믿음의 자세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존경의 자세도 아니었고 경외의 자세도 아니었고 신뢰의 자세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형식적인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분 목사님을 찾아 뵐 때 믿음의 자세나 존경의 자세가 없이 갔다면 무슨 청탁을 위해서 갔다면 우리의 인사는 별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기쁨으로 열납되는 제사는 믿음의 제사입니다. 존경과 신뢰의 제사입니다.
둘째 가인의 제사는 제물의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린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제 멋대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스스로 양을 잡아서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아담을 입히신 일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도 제사는 반드시 양을 잡아서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 분 목사님들을 찾아 뵈올 때 백두산에서 나는 아주 귀한 들쭉 술이나 태국 산속에서 가져온 아주 귀한 곰 발바닥을 가져 다 드렸다면 아무도 좋아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쁨으로 열납되는 제사는 받는 분이 원하는 제물을 골라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제사는 양의 제물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셋째 가인의 제사는 인격의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가인의 인격이 드려진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가인과 그 제물을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라고 했습니다. 제물도 귀하지만 더 귀한 것은 제사를 드리는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헌금을 많이 드리는 것도 귀하지만 만약 그 헌금이 도둑놈의 헌금이라면 그 헌금은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는 헌금이 될 것입니다. 우리 네 사람이 세 분 목사님들을 찾아 뵈었을 때 그렇게도 좋아하시고 기뻐하신 이유는 난 꽃과 귤 때문 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족한 것이 많지만 우리들의 인격을 사랑하시고 귀하게 보아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쁨으로 열납되는 제사는 인격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가인은 동생에 대한 선행과 나눔의 삶도 살지 못했습니다. 동생과 친절한 인사도 한 마디 나누지 못했습니다. 동생 아벨에 대한 가인의 태도는 분노뿐이었습니다.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 동생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을 보고 가인은 분을 품었습니다. 안색이 변했습니다. 동생에 대한 선한 마음을 억제하고 분노를 품고 있는 동안 죄가 가인의 문 앞에 와서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죄악이 문 앞에 와서 공격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결국 가인은 제사 드리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열납되는 제사도 드리지 못했고 동생에게 선과 나눔을 베푸는 자선의 제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가인은 불행과 비극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2) 아벨은 제사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벨은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벨을 믿음의 조상 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하며 아벨을 제사 드리는 삶의 모델로 삼으라고 가르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5). 제사 드리는 삶이 얼마나 귀중한 것임을 강조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에게 열납된 이유 3가지를 발견합니다.
첫째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였습니다. 히11:4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는 믿음의 제사입니다. 존경과 신뢰의 제사입니다.
둘째 아벨의 제사는 제물의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인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드린 제물의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상한 마음을 드리고 회개하는 마음을 드리고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는 마음을 드리고 그리고 향유와 같은 정성의 제물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셋째 아벨의 제사는 인격의 제사였습니다. 아벨의 인격이 드려진 제사였습니다.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였으나"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는 인격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넷째 아벨은 마지막에는 자기의 생명과 피를 순교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비극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축복입니다. 형을 미워하며 형과 싸우다가 피 투성이가 되어서 죽지 않고 형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면서 형의 손에 맞아서 순교자처럼 죽는 제물이 되었습니다. 마치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처럼 또는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처럼 아벨은 형에 대한 사랑과 용서를 나타내 보이면서 고귀한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는 하나님께 상달된 피 제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은 인사 드리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인사 드리고 그리고 형제와 이웃과 먼데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인사를 주고 받으면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인사를 드리며 살 때 인사를 주고 받으며 살 때 우리에게는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며 살 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인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저주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사를 드리며 사시는 축복과 기쁨이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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