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창세기

[창26:23] 가정의 영광_김창인 목사

'코이네' 2020. 4. 23. 15:30

가정의 영광

본문 : 창세기 26: 23-25

설교 :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오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가정은 이삭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가정은 자기 민족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 때 그 당시뿐만 아니라 4천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도 너무나 탐을 낼만한 복된 가정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함께 생각할 제목을 가정의 영광으로 정하고 함께 은혜 받으려고 합니다.

 

I. 하나님이 나타나는 가정(23-24)

 

 

23절에서 24절 상반절을 보면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삭의 가정에 나타나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타나는 가정은 참 복된 가정입니다. 그러나 잘 아는 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마귀가 나타나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또 하나님이 나타나는 가정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의 가정과 다윗의 가정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의 가정은 왕의 가정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가정은 왕이 되기 이전에도 이미 좋은 가문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마귀가 들어와서 별짓 다 하다가 그 가정을 아주 비참하게 패가망신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왕권이 다윗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울의 가정에 대해서 읽을 때에는 차라리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비참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마귀는 항상 인생을 비참하게 하는 장본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이야기 한 것처럼 너무나 가난한 가정이요 비천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셔서 왕이 되었고 또 기도할 적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이 망할 때까지 계속 왕통을 이어가다가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나시고, 오늘날뿐만 아니라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영광스러운 가정으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가정에는 마귀가 나타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하나님이 나타나기도 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마귀가 나타났다 하면 그 집이 정말 시끄러워지고 발깍 뒤집혀 집니다. 그러나 마귀가 아무리 못 되게 뒤엎은 가정이라도 하나님께서 나타났다고 하면 모든 것이 정리되고 해결이 되어서 오히려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바로 아담의 가정입니다.

 

 

저는 아담에 대해서 성경을 읽을 때 상당히 은혜가 되고 부러워 할만한 가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사람이 생긴 이후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이 왔다 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멋진 사나이를 한 사람 뽑으라면 두 말할 것 없이 아담이 뽑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는데 얼마나 멋지고 훌륭했겠습니까? 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뽑으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하와가 뽑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으니 가장 예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두 남녀가 결혼했습니다. 그러니 이 결혼 생활이 얼마나 흐뭇하고 만족했겠습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신혼집인 에덴동산에 무엇이 부족했겠습니까? 이렇게 갖출 것 다 갖추고 사니 복이 철철 넘쳐흐르는 가정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뱀으로 둔갑을 하고 찾아왔습니다. 이런 때에는 "사탄아 물러가라" 고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을 끌어 들여 가지고는 대화를 나눕니다. 이것은 교제를 하고 친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자기도 모르게 감쪽같이 속아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고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고 큰 시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쩌자고 마귀를 불러들이고 교제를 하여 마귀와 사귀는 것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렇게 불행해진 그 가정에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담아! 아담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부끄러워서 나오지 못하고 간신히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가 선악과를 따먹었구나!" 그러자 "네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눈이 밝아져 부끄럽게 되자 그것을 가리려고 몇 번씩 수고를 하여 무화과 나뭇잎을 치마로 해서 가려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만들어 주심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마귀가 나타나서 이렇게 집안이 시험 들고 어려움에 빠졌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참 기가막힌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광성교회에 온 지 23년이 지나도록 한 사람도 "목사님! 아담과 하와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멸망했습니까?" 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만약에 저한테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엄청난 죄를 사탄의 꾀임에 빠져서 저질렀지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이 당했던 부끄러운 일들을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찾아오셔서 양을 잡아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속죄의 시작인 것입니다. 구약의 복음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양 한 마리를 희생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희생시키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이삭이 가뭄이 심하게 들자 블레셋의 땅인 그랄 지방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더니 백 배나 얻었고 목축업을 했더니 소와 양이 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본토인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것들을 빼앗고 멀리 쫓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쫓기고 쫓겨서 이곳 브엘세바에 와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이삭은 비록 남의 땅에 와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이 지난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한번 볼까요? 26절로 29절을 보면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바로 그 날 밤이 지나고 나니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그렇게 자기를 빼앗고 못살게 굴고 쫓아내던 그 블레셋 나라 왕이 군대 장관을 데리고 와서 서로 평화 조약을 맺고 서로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이 분명히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당신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하나님께 망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이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라" 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가정에도 하나님이 찾아오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만 되면 마귀는 나타나지를 못하고 언제나 영광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들 앞에서 오히려 승리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 하나님이 주인되는 가정(24절 하반절)

 

 

24절 하반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는 네가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네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내 종이니 너도 내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가정이야말로 말할 수 없이 복된 가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아주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으로 전도 여행을 가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살고 있던 한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하는 말이 주님 제 딸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그러니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 동네에서 조롱거리가 생겼다, 구경거리가 생겼다 하면 이 여자의 다 큰딸이 귀신들려서 벌거벗고 돌아다니니 어머니의 입장에서 얼마나 창피하고 가슴 아픈 일이었겠습니까? 차라리 병에 걸려 정신을 잃고 헛소리하면서 안방에 누워 있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간절하게 예수님께 애걸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상대를 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 여자가 자꾸 시끄럽고 귀찮게 하니 어떻게 좀 돌려보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착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그 여자를 쫓아 보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쫓아내려면 자기들이 쫓아 버리면 되지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쫓아 버리라고 했겠습니까? 이 말씀은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 "선생님 저 여자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 딱합니다. 그러니 저 여자의 딸을 고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예를 들어서 새벽이니 철야기도 할 때에 성도 한 분이 너무 안타까운 문제로 몸부림치면서 기도하고 있을 적에 목사가 기도하다 말고 가만히 들어보니까 너무 너무 기막힌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기도는 중단하고 주님 저 성도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어 주십시오. 이렇게 목사가 중보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각해 봐라 너 같으면 아들과 딸이 먹는 떡을 빼앗아서 개에게 주겠느냐?"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이 자녀라면 너는 개와 같다는 모욕적인 말이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개 같은 너희 이방 사람들에게 줄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말입니까? 우리 교회 여 집사님 같으면 아니 교회가 뭐 여기밖에 없나 하면서 다른 교회로 갔겠지만 그런데 이 가나안 여자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개라면 개입니다. 그러나 개에게도 주인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개라면 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개들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는 것 아닙니까? 저에게도 제발 부스러기라도 좀 얻어먹게 해주십시오" 라고 애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가나안 여인처럼 그냥 도와 달라고만 하지말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내 주인이라는 것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큰 믿음입니다.

 

 

제가 부흥회를 나가면 낮 공부 시간에 성도들이 앉아 있는 자리 가까이에서 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강론을 하는데 대개는 여집사님들이 맨 앞자리에 나와 앉습니다. 그래서 집사님 식구가 모두 몇입니까? 하면 대개 다섯 식구라고 합니다. 남편하고, 나하고 큰아들, 둘째 아들 그리고 막내딸이라고 합니다. ! 그래요 그러면 하나님은 집사님 댁의 머슴인가 보지요? 하고 찔러주면 그때서야 아차! 합니다. 머슴은 아무리 같이 먹고 같이 잠을 자도 식구 수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에 제일 먼저 뭐라고 합니까? 첫마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 식구 수에는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데 다섯이라고 하면서 시아버지를 빼보십시오. 아마 노발 대발 할 것입니다. 그 며느리는 같이 사시는 시아버지를 식구 수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가는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시아버지는 식구로 여길 줄 알면서 하나님은 왜 한 식구로 생각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늘 부르기는 "아버지!" 라고 부르면서 이것이야말로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 가정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께서 이삭의 가정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네 아비가 내 종이었으니까 너도 내 종이라" 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이 가정의 주인이시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이 가정에 주인이니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돌보아 주고 너와 네 자손에게 복을 주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보십시오. 이삭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야곱입니다. 또 그 손자가 누구입니까? 요셉이지요! 그 다음에는 자자손손 세계적인 인물이 얼마나 많이 나고 마지막에는 메시야이신 예수님도 이 가정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저 불쌍히 여겨 달라고, 도와 달라고 해서 도와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정말로 내 가정에 그리고 내 사업에 주인으로 모시고 멋지게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성도님들의 가정에서 이런 놀라운 인물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또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가정은 정말로 영광된 가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III. 하나님이 기록하는 가정(25)

 

 

25절 말씀을 보면 "이삭이 그곳엔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창세기는 모세가 썼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인 모세가 창세기를 쓸 때에 자기가 하고 싶은 소리를 썼습니까? 하나님께서 쓰시는데 모세가 대서 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으로 모세를 사로잡고 감동시켜서 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고 싶은 글을 쓰신 것이요,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씀을 쓰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모세가 썼을 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의 가정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겨 놓아야겠다고 생각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겨진 기록은 두고 두고 이스라엘에게도 영광이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4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에게도 자랑과 부러움의 가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구교와 우리 예수 믿는 기독교를 합해 가지고 약 12-13억 명이 되는데 이들에게 이삭의 가정 이야기는 두고 두고 부러움 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록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제단 중심이요, 신앙중심의 가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5절 상반절을 보면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사를 가면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제일 필요한 물건부터 꺼내서 정리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여기 저기 집안 정리를 합니다. 이때는 아무래도 급하고 중요한 일부터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삭은 무엇을 했는가 하면 제일 먼저 한 일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이삭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였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을수록 먼저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는 가르침이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의 최우선 순위를 우리 자신에게서 찾지 말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야 할 기준입니다. 즉 믿음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것, 교회 중심의 신앙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삭의 가정이 성경에 기록되어 신앙의 본이 되는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삭 가정의 신앙 이야기가 우리에게 영원토록 본보기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가정 이야기도 역사에 기록되어 오고 오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교훈이 되는 영광스러운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로는 가정에 충실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살았던 때는 오늘과는 달리 가정들이 상당히 복잡한 때였습니다. 지금에도 중동지역에는 그 잔재가 남아 있는데 일부 일처제가 아니라 일부다처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의 윤리가 매우 희박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삭의 가정에는 그런 문제가 전혀 없는 아주 평안한 가정이었습니다. 이삭의 가정에는 여인의 문제로 인하여 불화가 나지를 않았으니 얼마나 이삭이 가정에 충실하게 살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자기의 삶의 우선 순위를 하나님 제일로 삼는 사람은 가정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문을 보면 첫째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제단을 쌓았고 그 다음에는 가정을 위해서 장막을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백 마리, 수천 마리의 양떼와 짐승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울타리를 만드는 것보다 먼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먼저 장막을 마련했다는 것을 보아서 이삭이 얼마나 가정에 충실했었던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음 생활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지만 그러나 천만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아들 딸을 위해서 그리고 아내를 위해서 장막을 치는 충실한 가정의 아버지, 가정에 충실한 남편, 그리고 남편에게 충실한 아내, 부모에게 충실한 자녀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가정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가정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서 여기에 행복했던 이삭의 가정 이야기가 기록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들의 가정 생활이 많은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남겨질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념 책에 그것을 기록을 남겨 주시겠다는 뜻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성도들의 아름다운 가정 이야기가 역사에 기록되는 가정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로 사업에 근면한 것입니다. 25절 하반절에 보면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이삭의 가정은 매우 근면했던 가정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한 번은 끝장을 보는 그런 일확천금을 얻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모두 다 열심히 일을 해서 성실하게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보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욕심을 내어 남의 돈을 있는 대로 끌여 들여 가지고 무리하게 사업을 하다가 뒷감당을 못 해서 부도를 내놓고서는 하는 말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 욕심에 제가 망한 사람은 항상 욥의 이야기를 합니다. 욥이 잿더미가 되고 완전히 벌거벗을 정도로 거지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건강도 얻고 축복을 한꺼번에 받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친척과 친구들이 금붙이를 하나씩 주었는데 이것을 밑천으로 사업을 하여 부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어디 축복이라는 것이 하늘로부터 뚝 떨어지는 것입니까?

 

 

그런데 본문으로 들어가서 이삭을 봅니다. 그의 가정은 양떼를 위해서 부지런히 우물을 팠습니다. 가나안에는 수백 마리, 수천 마리의 짐승을 위해서는 흐르는 냇물이 없기 때문에 물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양떼를 키우고 소 떼를 키우는 데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삭의 가정처럼 매일 매일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고 부지런히 일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실력이 감당할 만큼 사업을 키워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본문의 말씀은 이삭이 얼마나 성실하게 일을 했으며 근면했던 사람임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일확천금을 얻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처럼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할 때에 마침내는 떼를 이루는 사업의 번영을 이루어 주신다는 본보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는 일 혹은 직장 생활 또는 하시는 사업 모두가 앞으로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하나님의 기념으로 남길 만한 영광스러운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결론은 맺자면 이삭의 가정은 영광스러운 가정이요, 영광스러운 가정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찾아 주시는 가정이요, 또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가정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기록에 남길 만한 가정입니다. 이삭의 가정처럼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