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창세기

[창5:21] 사람은 동행하며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_김명혁 목사

'코이네' 2022. 3. 24. 21:44

사람은 누구인가(4) "동행하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 

5:21-24

설교 : 김명혁 목사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네 번째 설교를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사람은 "인사하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는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한경직 목사님 박종렬 목사님 정진경 목사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다고 말씀 드렸고 KBS를 통해서는 박희선씨와 법륜 스님과 인사를 나누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께 인사와 제사를 드리고 옆으로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인사와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사를 드릴 때 우리에게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들, 한 주간 동안 인사를 많이 나누며 지나셨습니까? 지금 다시 한번 옆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에는 "동행하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가 사람이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인사를 나누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동행하는 것은 더욱 더 좋은 일입니다. 기쁨과 안전과 행복은 동행하는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혼자 사는 것보다 외롭고 불안하고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아담은 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지음을 받았고 하와와 동행하며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살도록 지음을 받았고 옆 사람과 손을 붙잡고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동행할 때 기쁨이 생기고 평안이 생기고 행복이 생깁니다. 두려움이 없어지고 용기가 솟아납니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499장 후렴). 동행할 때 기쁨이 생깁니다.

 

1. 박종렬 목사님의 공포의 밤 이야기

 

박종렬 목사님이 20살 되었을 때 아주 무서운 공포의 밤을 경험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2월 하순의 어느 겨울 밤이었습니다. 박 목사님이 평양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 시절이었습니다. 방학에 충청 북도 고향 근처 시골 교회에 가서 설교 봉사를 하던 때였습니다. 고향에서 20리나 떨어져 있는 용정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평양으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밤이 늦었지만 용정에서 내곡이란 곳으로 급히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멀리 어둠 속에서 "종렬아 종렬아"라고 부르며 누군가가 좇아 오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무서웠던지 머리 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네에 박 전도사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교인들 밖에 없는데 그들이 "종렬아 종렬아" 라고 부르며 좇아 올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굴까? 도둑놈일까? 도둑놈이 박 전도사의 이름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누굴까? 귀신일까? 박 전도사는 너무 무서워서 속도를 내어서 더욱 빨리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뒤에서 딸아 오는 그 사람인지 귀신도 그만큼 더 빨리 딸아 오면서 더욱 더 크게 "종렬아 종렬아"라고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10리 이상을 계속 뛰어서 집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이었는데도 내복이 물에서 건져낸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습니다. 그 동네에 사는 친척 아저씨가 마침 용정에 있는 그의 처가에 다니러 갔다가 박 전도사가 설교를 마치고 밤 늦게 혼자 집으로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걱정이 되어서 박 전도사와 동행해 주려고 좇아 왔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그 친척 아저씨가 박 전도사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종렬아 너 걸음이 왜 그렇게 빠르냐? 네 걱정을 하면서 계속 좇아왔는데 너를 따라잡지 못했다." 박 목사님은 지금도 그날 밤의 일을 회상하며 많은 것을 깨닫는다고 어제도 저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즉 인생 길을 혼자서 걸어가는 나를 걱정하시는 주님께서 나를 좇아오시는데도 나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서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사람은 십자가의 엄청난 사건을 목격하고 절망과 두려움과 슬픔에 쌓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제자를 좇아오셨습니다. 소망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도 두 제자는 그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타 이르면서 여전히 절망과 슬픔에 쌓여 있었습니다.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 잡던 일곱 제자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회의와 좌절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 찾아 오셨지만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 차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일 때가 있습니다. 눈이 어두워서 좇아 오시고 찾아 오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에게도 찾아 오시고, 실패와 좌절에 빠진 사람에게도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쓸데 없이 두려움과 슬픔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담처럼 가인처럼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탕자처럼 데마처럼 하나님의 품에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도망치기도 합니다. 결국 세상을 홀로 두려움과 공허함과 슬픔 가운데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인류의 조상과 에녹의 족보 이야기

 

, 인류의 조상들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창세기 5장에는 아담 이후의 인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 자손의 족보가 이러하니라." 그런데 족보의 공통된 특징은 "누구는 누구를 낳고 900여 년 동안 살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의미가 있는 내용입니까? 없는 내용입니까? "전상조 장로님이 창섭이 경섭이 춘섭이를 낳고 95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의미가 있는 내용입니까? 없는 내용입니까?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식을 셋이나 나아서 훌륭하게 기르다가 죽은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큰 의미는 없지요. 왜냐하면 "아무개 집 개도 새끼 다섯 마리를 낳고 살다가 15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고 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개는 자식들을 낳고 키우며 살다가 죽었다" 그것이 한 사람의 생애의 전부라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인류의 조상들은 "자식 낳고 살다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의 족보 중에 한 사람의 족보의 내용이 다른 것을 발견합니다. 에녹의 족보의 내용이 다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11:5). 물론 에녹도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고 했습니다. 물론 에녹도 실패나 아픔이나 고통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처지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에녹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에녹이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축복 받은 사람이었고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은 믿는 자들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녹의 이야기가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고 안전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에녹의 족보의 내용이 다른 것 또 하나가 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족보는 "죽었더라"로 그쳤습니다. 그런데 에녹의 족보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얼마나 아름다운 기록입니까! 얼마나 축복된 모습입니까!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얼마나 아름답고 축복된 모습입니까? 이 세상에 무덤을 크게 남기는 것은 별로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닙니다. 피라밋이 아무리 커도 진시왕의 릉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단군왕의 릉이 아무리 크고 웅장해도 여러분의 무덤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이 데려 가셨습니다. 일찍이 데려가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모두 9백세를 향수하고 죽었는데 애녹은 365세를 향수하고 대려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33년 동안 세상에서 사셨고 스데반이나 사도 야고보는 젊었을 때 일찍이 데려감을 받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은 중학생 고등학생 때 일찍이 뎌려감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모두 일찍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에서 장수하는 것이 모두 축복이라고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에녹처럼 365년만 살면 충분합니다. 문제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냐? 하나님의 데려감을 받느냐? 입니다. 에녹은 믿는 자들의 모형입니다. 믿는 사람이란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데려감을 받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이제 끝으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나를 찾아 오실 때 하나님을 곧 알아차리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곧 알아 차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만 들어도 곧 알아차리고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곧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곧 대답을 하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과 귀와 마음이 영적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화려한 것만 보고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만 듣고 세상의 정욕적인 것에만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곧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정욕적인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너무 즐겨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기도의 삶의 훈련으로 만들어 집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주여 주여" 라는 말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의 호흡에 섞여져서 나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둘째로 마음과 뜻을 같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취미와 기호를 하나님의 것과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정진경 목사님과 한 20여번 여행을 같이 하면서 늘 룸메이트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정 목사님과 함께 지내면 언제나 마음이 편하고 즐겁습니다. 마음과 뜻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취미와 기호도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내 마음과 뜻을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일치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늘 헤아리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늘 찾아서 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선행의 삶의 훈련으로 만들어 집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내 마음대로 하게 마옵시고 주님 마음대로 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셋째로 하나님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엎드려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찬송 가운데 거하시면서 성도들과 동행하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갑니다. 복음찬송 10"예수 사랑해요"를 함께 부르십시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동행 할 때 기쁨이 있고 안전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이 끝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데려 가십니다. 경고의 말씀 한 말씀을 읽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4:4). 하나님과 동행하시다가 데려감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