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창세기

[창18:1]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 황규철 목사

'코이네' 2018. 2. 6. 23:52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말씀 : 창세기 18 : 1-15
설교 : 황규철 목사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에 하나님께서 13년만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고 하는 극히 인간적인 반응을 보였던 아브라함의 삶을 기억하실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때가 되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브라함은 이상한 체험을 하게됩니다.어느 날 장막 문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방문객을 보게됩니다. 그는 달려가서 그들을 집으로 들이고음식을 대접하게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당시에 백세입니다. 그 지방에서는 인정받는 지도자에 해당합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이 무엇 때문에 낯 설은 방문자들에게 달려가서 허리를 굽히고 경배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는 중에 그 방문객들의 정체를 알고는 그들에게 경배한 것이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으로 봐서는 그러한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알지 못하고 대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13:2-"손님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그들에게 부지중에 극진한 대접을 하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대화의 내용을 엿들은 사라가 장막 뒤에서 웃었고 그 천사들이 사라의 웃음을 알게됩니다. 사라가 굳이 웃지 않았다고 하지만 천사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창17장에 아브라함도 아들을 주신다고 할 때에 웃었습니다.
그리고 사라도 지금 웃고 있습니다. 그들의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11절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의 노인이고 사라도90세의 도저히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러한 불가능이 그들로 웃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는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어야 믿을텐데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는 25년 동안 약속한 자식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완전히 자식에 대한 것을 포기했을 때에 다시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얻는 데에 아브라함 부부가 한 것은 웃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환경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믿는데는 철저히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깨달을 때에 그것이 가능합니다.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이 자신의 삶에 적용되고 확신을 갖는데는 시간이 필요했고 철저한 자기포기가 선행되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그것이 확인되는 과정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제를해버리고 맙니다. 그 믿음이 검증이 되지를 않아서 그렇습니다.
평상시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검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때로는 삶의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보면 우리의 믿음이 검증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자연의 환경을 뛰어넘지 못하는 제한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신실하게 이뤄지는가를 체험을 통하여 확증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고 있을 때에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철저히 놔두셨다가 '하나님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래야만 인간은 자신이 잘나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극히 작은 부분의 하나님이구나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심을 인간이 다 알 수가 없구나'
그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시8:4-"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우리는 때로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제한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한계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 놓고 살아갈 때가 너무 많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도 못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별로 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100세에 이삭을 갖게됩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웃은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초자연적으로 역사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게 됩니다. 하나님을제한하던 이성적인 신앙에서 초자연적인 신앙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나이에 이삭을 주셨더라
 면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이 주셨다
 고 고백할 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내가 나았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래도 '나니까 해냈지'할 수 있는 소지가 인간 속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러한 교만한 생각과 욕심을 버리는 것은 철저한 하나님중심의 신앙으로 살아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부족하고 하찮은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에 붙들려보면 깨닫게됩니다.
그래서 27절에 아브라함이 자신을 '티끌과 같은 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티끌은 먼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전혀 존재가치가 없는 먼지와 같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에 대한 평가가 달라집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자신을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자기고백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광야세월을 보내고 나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은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고백입니다.
장막 뒤에서 웃고 있는 사라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오늘도 많은 사람이 삶으로 하나님을 비웃는 불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분입니다. 내가 고민하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 맡기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그런데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의 동일한 문제는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비젼이 있다면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벧후3:9-"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다만 하나님의 때와 우리의 때가 다를 뿐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약속은 이뤄집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으십니다.(민23:19)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통하여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그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는 말씀대로 이뤄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인간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하나님의 벗으로 칭하셨으며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인간적인 실수와 부족함이 있다할 지라도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한 걸음씩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며 주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y 코이네설교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