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창 3:16-24)
설교 : 이승구 목사
우리는 지난 번에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그분의 자비로우심과 의로우심 그 어느 하나라도 잊고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자비하셔서 의로우심을 잊어버리시는 분도 아니시고, 또한 너무나도 의로우셔서 자비하심 없이 계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체로 자비로우시며, 또한 전체로 아주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조화를 가장 잘 나타내 보여주는 일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과 관련해서 발생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구원을 이루신 일에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엄위하신 공의가 둘 다 아주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에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정황을 살피면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이 자비와 공의로 충만한 분이심을 잘 깨닫게 됩니다. 즉,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2부의 앞부분(제12문답 - 제18문답)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잘 조화되어서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어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의해서 우리가 마땅히 현세적 형벌과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면, 우리가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애호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이 요구되어집니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작성자들은 이와 같은 식으로 우리가 처한 비참한 상황을 소개하면서,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로부터의 어떤 구출의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면서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대한 묘사인지, 또한 이것이 어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질문인지는 앞으로의 논의의 과정에서 점점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여하간 지금 하나님께 대해 범죄한 우리가 처한 상황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의하여 현세와 영원의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이들을 향하여 요리문답의 작성자들은 아주 냉정하게 하나님의 공의를 다시 한 번 더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공의가 만족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나 아니면 다른 분에 의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만족시켜야만 합니다"(제12문답).
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선언이 담긴 이 대답은 우리가 처한 처지를 좀더 분명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마땅함도 하나님의 공의(의로우심) 때문이라면 이 형벌을 받아 마땅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죄에 대해 형벌을 하시지 않고 그저 넘어가실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존재가 아니십니다. 그는 온전히 의로우시기에 범죄에 대해서는 마땅한 형벌이 그의 거룩하심으로부터 나오게끔 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구별하심)이 죄와 그 죄를 범한 자를 돌격하게끔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형벌을 벗어 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만족시키든지, 다른 분이 그 공의를 만족시켜 주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물음과 대답을 따라서 그 하나하나의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제13문) - 자력 구원 주장(1) 만일에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다 만족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현세와 영원의 형벌을 다 피하고, 하나님의 회의와 애호의 상태에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 스스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소위 자력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말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아주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자력 구원 주장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로, 사람은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결국 스스로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사실은 자력 구원을 주장하는 것이 됩니다. 과거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어 왔지만, 특히 르네상스 이후 인문주의적 태도를 유지하는 소위 현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우리들 스스로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함께 노력해 가면 우리들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결국에는 이 땅위에 유토피아(utopia, 地上天國)를 이룰 수 있는 듯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양차 세계 대전 이후 인간성에 대해 깊이 실망해 버리고서도 사람들은 참된 절망을 상실한 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방향을 향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가는 것이 인간적인 것이라고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위 현대의 실존주의자들이 그렇게들 말합니다. 결국 현대인을 비롯한 인간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쓸데없는 수고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 조차도 계속해서 그 길 위에서 나아가기를 노력하고, 또 그렇게 하라고 사람들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우리손에 쥐어진 유일한 길이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다운 일이라고들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자신들이 개척해 나가려고들 합니다. 자신만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삶을 주관해야 한다고 하는 교만(hubris)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창3장). 그러므로 이는 창세기 3장 이후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인간의 문제입니다.
참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종교성이 만들어 낸 이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들도 인간 스스로가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옛적부터 주장해 온 것입니다. 불교가 그런 자력구원 주장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해탈, 또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면 우리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그 주장에서 그렇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사회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도 된다고 보는 그 태도에서도 그렇습니다.
또한 유교의 윤리적 세계관도 결국은 그런 자기 노력에 의해 인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들은 처음부터 이런저런 다양한 태도로 스스로를 주장하며 자신들이 구원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이 주장해 왔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주먹을 믿는다는 식으로 완강하고 소박하게 자력 구원의 주장을 하는가 하면, 또 때로는 아주 교묘하게 스스로의 무력과 문제를 잘 지적하면서도 결국은 인간 스스로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3. 자력구원 주장(2): 특별 계시를 받은 이후에 나타난 자력구원 주장
둘째로는 좀더 교묘한 형태의 자력구원설을 말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아 그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그 하나님의 계시를 제대로 받지 못하여서 생각하는 자력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았으므로 그 교훈을 받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결국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그런 노력과 그 공로와 의에 의해서 구원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가 과연 있었는가 하고 물으면, 현대의 학자들은 마치 그런 사람들이 없었던 듯이 주장하려고 하지만, 결국 예수님과 바울의 비판의 대상이 된 유대인들의 사고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대표하던 사고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각자가 하나님의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일에 큰 강조가 주어져서 그렇게 신실하게 율법을 지켜 나가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은혜스럽게 대해주실 것임에 대한 강조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힘에 의한 구원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이런 식의 생각을 강하게 비판하고 인간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과 은혜로만 구원 얻을 수 있음을 잘 가르쳐 주었으나, 사람들은 이 가르침에 충실하지 못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 자신들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 계속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거스틴과 동시대에 살던 펠라기우스(Pelagius)라는 수도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신실하게 윤리적으로도 흠없이 살아야 함을 강조하다가 결국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잘 행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음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통에 충실해 보겠다고 하던 중세의 천주교회는(그리고 지금의 천주교회는) 결국은 반 펠라기우스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한편에서는 펠라기우스파의 원죄 부인에 반대하여 원죄에 세례때까지의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해서 해결되고 용서되지만, 세례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입되어서 그것에 의해 습성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실질적인 공로에 의해 종국적 구원이 주어지게 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도 하나님과 그의 은혜와 그 은혜에 의한 변화, 그리스도의 속죄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사람이 힘써서 이루는 의와 공로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입장의 공통점은 결국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있습니다. 물론 개개의 주장에 따라서 타락의 심각성을 생각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은혜의 상태에서 죄악의 상태로의 타락이 없다고 보는 입장에서부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여 사람에게는 소위 본래적 고악과 같은 것이 있으나 그것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 그리고 심각하게 타락하여 죄악의 상태 가운데 있으나 하나님의 형상은 본래적으로 선하게 남아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노력을 하여 나가면 은혜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다양한 입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의 공통점은 그래도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여 나갈만한 여지는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에 근거해서 계속 노력하여 나가면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자력 구원의 주장(3): 가장 교묘한 형태의 자력 구원 주장
종교 개혁자들이 일어나서 천주교회의 이러한 자력 구원에 대한 가르침이 비성경적이고 옳지 않은 것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인간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베풀어주시는 구속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성경적 입장을 천명한 후에는 이런 개혁자들의 주장에 충실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인간의 의와 공로에 의한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물론, 세월이 지나자 개혁자들의 입장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비성경적인 입장을 주장하며, 천주교회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절충을 시도하거나(Hans Kueng), 아주 자유스러운 입장을 제시하며 그것이 개혁자들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Rudolf Bultmann, Paul Tillich)도 생기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일단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은 이들로 간주하고서 우리의 논의밖에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 이후에는 가장 교묘한 형태의 자력 구원 주장이 나타났으니,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주장하면서도 최후의 한마디만을 바꾸거나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건을 통하여 모든 구원의 가능성과 토대를 마련해 놓았으나,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고 최후의 결정은 각각의 사람들이 하도록 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최종적인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뜻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최종적인 결정은 사람들이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이런 주장은 성경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려고 하면서도 사람들의 타락의 정도가 적어도 구원의 복음이 제시되면 그것에 반응할 수는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5. 우리의 현실
과연 우리는 그 어떤 형태로라도 우리의 힘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작성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오히려 날마다 우리의 죄책을 증가시킬 뿐입니다"(제13문에 대한 대답)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아주 실존적인 고백입니다. 우리네 인간이 어떠한 존재임을 아주 잘 아는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날마다 더욱 더 하나님의 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죄책을 증가시키고 있음을 경험적으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에서는 우리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랄 뿐인 것입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서 참으로 지혜로운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만을 고요히 바랄 뿐입니다.
by 코이네설교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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