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태복음 5장] 율법의 폐기냐 율법의 완성이냐?

'코이네' 2014. 5. 7. 18:43

마태복음 5장, 율법의 완성과 그리스도 제자의 의



마 5:17-18                   율법의 폐기와 완성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산상수훈의 모든 것은 팔복의 내용에 담겨 있다.  팔복 성취자들의 존재 의미와 역할은 5장 16절까지 함축적으로 충분히 언급되었다.  사실 이제부터는 5:1~16까지에 대한 주석적인 성격으로 보아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아니 본질적인 골격은 이제까지의 내용이라면 그것에 대한 보충적인 부연설명이 17절부터 전개되고 있고 또한 여러가지의 사례들을 통하여, 즉 부분으로 전체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본래성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한부분도 갑자기 돌출되어 설명되거나 등장하고 있지 않다.  대부분 성경 해석자들이 한부분을 구분지어서 그 의미를 새기려 하기에 본문의 진정한 의미에 도달하지 못한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본문의 경우도 그러한데 해당된다고 보겠다.  지금까지 논의와는 별개로 갑자기 율법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 시점에서는 제기되어야 할 문제이다.이 부분을 독립된 주제로 다루는 것이야말로 팔복의 의미를 옳게 이해하지못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결코 예수께서 지금까지 대화의 화제를 전환시키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까지 팔복의 내용들을 반추해 보라.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청자들의 상태와 반응을 생각해 보라.  모름지기 팔복의 내용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적어도 유대주의 종교와 분위기속에 젖어있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종교적 삶은 유대전통의 율례와 규례에 따라서 모세의 법대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복의 내용을 들어보면 그러한 세계관 내지 종교적 삶과는 정면으로 배치될 뿐더러 오히려 그러한 기존의 틀을 철저히 깨트리고 있는 내용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로부터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 에 이르기까지 어느것 하나 이전의 자신들, 또는 종교인들의 종교적 상식과는 맞는 것이 없다.  도리어 그러한 것의 철저한 분쇄만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이르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에게서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이것은 철저한 율법의 파기요, 예수는 완전히 율법 폐기론자로 비추일 것이 당연할 터이다.  팔복의 내용을 들어보면 자칫 도대체 이가 누구이기에 율법을 폐하려 하는가?라는 의구심이 들 수 있게 되어 있다.  아마도 이 글을 읽어오던 독자들께서도 도대체 이 글은 기존의 신앙체계를 완전히 부정하고 교회의 생활(전통적 종교생활-즉 기도, 구제, 성수주일, 십일조 등 성도로서의 기본적 의무조항) 전체를 철저히 파기하는 율법의 폐기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동일한 물음을 갖을 수도 있겠다.  충분히 그렇게 들릴 수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것은 역사의 되풀이이며 성경에서도 그러한 염려는 오늘 본문의 기록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의구심어린 눈길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심중에 갖고 있는 오해를 일거에 물리치고 계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팔복의 내용은 얼핏 들으면 율법을 폐하는 내용인 줄로 착각(nomivshte)하기에 꼭 알맞게 되어 있다.  엄격히 말한다면 그것이 반드시 착각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 율법적 모든 행위의 체계를 폐하는(katalu'sai) 내용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율법을 폐하는 내용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한 언어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으니 율법을 폐하지 않으면 율법을 완전케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 장난을 하려는가?

이것은 말 장난이 아니다.  아주 심각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고정개념의 율법이 폐기되지 않으면 본래적 율법의 의미가 드러날 수 없다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율법 본래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짓된 율법은 폐기되지 않으면 안된다.  필자가 거짓된 율법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상 모든 이들에게서 그것은 거짓된 율법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참된 율법이다. 팔복의 내용은 철저하게 이것을 깨뜨리고 무너뜨린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는 인간을 죄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을 뿐더러 율법의 본래적인 그것에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에서 그는 어떠한 율법은 철저히 폐하는(katalu'sai) 자이며, 그러나 율법의 본래적인 의미의 복귀 측면에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는 자가 아니라 이루려(plhrw'sai)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는 자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결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것을 충만케. 혹은 이루려(plhrw'sai)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반율법주의자나 율법 폐기론자로 착각해서는(nomivshte) 안 될 일이다.

반대로 율법을 완전케 하러오셨다고 해서 강화자(强化者)로 여겨서는 더더욱 곤란하다.  그러한 오해속에서 성경을 보게되는 경우 대부분 율법주의자가아니면 반율법주의자가 되어 극단적인 대결 양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소위 율법주의자도 반율법주의자도 따지고 보면 동일한 틀의 함정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율법주의적 요소와 반율법주의적 요소를 동시에 몸에 지니고 혼돈과 갈등속에서 신앙생활한다.  이들도 같은 種에 불과하다.

다음 이어지는 말씀을 깊이 고찰함으로 그러한 오해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5장 17절은 예수가 오신 이유와 목적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도리어 완전케 또는 이루려-plhrovw의 의미는 완전케 보다는  충만케(to fulfil) , 또는  이루다 의 의미에 더 가깝다-오셨음을 말씀하고 있다면 5장 18절은 왜 그러실 수 밖에 없는지, 그것의 必然性을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ga;r)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천지가 없어지기까지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율법으로부터는 일점이나 일획도 지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역)

이것이 인간의 불행이요 예수께서 오셔서 그의 걸음을 걷지 않으실 수 없었던 까닭이다.마 5:18은 그와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16장 17절, 마 24:35과 함께 성경이 기록된 이래 철저하게 도용당해온 억울한 본문이다.  교리주의자들이나 맹목적 호교주의자들에 의해서 성경의 영원성을 변증하기 위한 요절로 희생되어온 대표적인 구절이다.  그것은 조직신학자들에 의해서는 물론이요, 본문을 신중하고도 사려깊게 살펴보아야 할 성경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도무지 앞뒤 문맥의 고려없이 무차별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근거구절로만 채택되어져 왔을 뿐이다.  자신의 터가 반석이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신앙적인 모습으로 자위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구습의 종교적 사고에 젖어 눈이 가리워져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context조차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이 문장을 흔히 말하는 예수의 성경관으로, 특별히 만전적(萬全的) 영감의 입장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구절로 인용한다면, 그것은 문맥의 고려가 없는 과잉충성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그러한 표현에서 예수의 성경관 또는 태도를 엿볼 수 있을런지는 모른다 해도 문맥의 흐름을 무시하고 특정 의미만을 부각시킨다거나 강조될 때 부득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의미의 부당한 변모(illegitimate totality transfer)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일반적으로  일점 일획 의 표현을 들어서- 일점 은 히브리어의 요드(y),  일획 은 히브리어의 혼동하기 쉬운 각획-예수께서 성문율법의 글자들에 관심을 두신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나 그것이 반드시 정당할 수만은 없다.  그것은 이제부터 지적될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라시는 5:17 말씀의 이유가 잘 나타나 있는 18절이다. ajmh;n ga;r levgw uJmi'n(왜냐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문장은  ga;r 라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와 함께 예수의 간곡한 심정이 들어있는 문장이다. 웬고하니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건데, 무엇을 말인가?  바로 e{w" a[n(해오스 안) 이하의 문장이다.  우리말 번역성경에는  ~하기 전에는 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그것은 잘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e{w" a[n(해오스 안)은  till, until, while, as long as 의 의미이다.  즉  ~하기까지 의 의미이다.그런데 우리가 이 문장에서 유의하여 살펴보아야 할 일은 e{w" a[n(해오스 안)이라는 종속절을 이끄는 종속접속사가 두번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하나의 주절을 놓고 앞과 뒤에서 동일한 e{w" a[n(해오스 안)이라는 접속사로 주문장과 관계하면서 이루어져 있는 독특한 문장을 구성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주된 문장은  ijw'ta e{n h[ miva keraiva ouj mh; parevlqh/ajpo; tou' novmou(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다. 이 문장에서  없어지다 라고 번역한  parevlqh(parevrcomai) 는 pass,또는 pass away의 의미이다.  그것은  없어지다 의 의미보다도  지나가다의 의미이다.   parevr-comai(파레르코마이) 가 성경에서 쓰이는 사례들을 살펴보더라도(막 13:30, 31, 고후 5:17, 약 1:10, 벧후 3:10, 계 21:1) 그것은 분명해진다.  물론 지나가 버리면 그곳에는 있을지 몰라도 지나쳐온 이에게는 없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가다 의 의미가 본래적 의미이기도 하려니와 이해하기도 훨씬 용이하다.  또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는 표현도 원문을 직역해보면  일점 또는(h[ or) 일획이 율법으로부터(ajpo; tou' novmou) 지나가지 않는다(ouj mh; parevlqh/) 이다.  문제는 언제까지 그러하냐 하면 그것은 바로 e{w" a[n(해오스 안)이라는 종속 접속사가 이끌고 있는 문장의 내용이 지시하고 있다.

  천지가 지나가기까지(e{w" a[n parevlqh/ oJ oujrano;" kai; hJ gh')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까지(e{w" a[n pavnta gevnhtai)

그러하기까지는 결코 율법으로부터는 일점이나 일획도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만일 이 본문을 말씀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치자.  그러면 어떠한 자가당착에 빠지는가 하면, 그러한 틀속에서 이 본문을 보면 결코 말씀이 영원할 수 없게 되는 모순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은 역으로 천지가 없어지면 반드시 말씀은 없어진다는 반대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씀의 영원성을 변증한다는 인간의 지혜가 도리어 말씀의 영원성을 부정하는 꼴에 이르고 만다.  어찌 말씀이 그러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어떤이들은 그것은 말씀이 이 땅위에 사는 인생들에게만 필요하기 때문이고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이상 말씀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말씀 모독에 불과하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진리 그 자체요 말씀 그 자체일진대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도리어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막 13:31)라고 하고 있다.  이 말씀도 사실은 마 5:18과 병행구절이다.

사실 본문은 천지는 지나가야 하고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일점이나 일획이 율법으로부터 지나갈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서야 비로소 율법의 성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그 어느 누구로부터도 율법의 일점 일획은 지나가지 않는다.  이것이 아담 후예의 비극이요, 운명이다. 여기에 바로 비밀이 있다.  예수께서 오신 까닭이 있으며 완성에 이르는 비결이 있는 것이다.




덧붙여 논란의 소지가 많은 일점(ijw'ta e{n) 일획(miva keraiva)의 의미를 단순히 문자적 의미로 볼 수 없다는 것과 함께 본문의 의미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한 정치가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하자. 이 때  한 치 라는 용어는 단순히 도량형 단위의길이 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를 저해하는 것은 어떤 요소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일 게다. 마찬가지로 율법으로부터의 일점 일획이라는 표현 또한 문자적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보면 앞서 예를 든 문장에서  한 치 를 도량형 단위의  길이 로 해석하는 것과 동일하다. 

율법의  일점 일획 이란 바로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을 들여다보고 그곳에서 해방되기가  ~하기까지(e{w" a[n)는 한치도 이루어 질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생의 불행한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 주시고 있는 말씀임과 동시에 천지가 지나가야 하고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그러한 인생의 불행을 해결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오실 수 밖에 없었고 그러한 과정이 팔복의 내용일찐대, 그것은 율법의 완성에 이르는 길이므로 그것을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는 지적에 다름 아닌 것이다.

도대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이며 율법의 진정성은 무엇인가?  비유컨대 율법의 역할이 계란의 껍질이라면 그것의 진정성은 그 안에 있는 생명 씨에 있다.  그것을 일컬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 한다(약 1:25).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가능성이요 성취되어질 때만 온전한 율법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나타나려면, 즉 생명이 움터 그 활동을 시작하여 태어나려면 지금까지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고 있던 율법이 깨져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전까지 계란껍질은 생명의 보호를 위한 절대적 요소였다.  그러나 잠재적 생명이 활동을 하기 시작하고 새로 태어나는 순간에도 그 껍질이 보호막으로 붙어있으면 그 생명은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죽어버리고 만다.  이전에 그를 지켜주던 보호막이 이제는 도리어 자신을 질식시켜 버리는 원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완성적 율법의 진정성은 바로 이 생명의 새로 태어남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은 계란 껍질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이것을 폐기한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생명 자체까지도 폐기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여기에는 분명 폐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과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렇다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이며 어디까지인가?  그렇다.  율법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때가 찬 경륜에 이르기까지, 안에 있는 생명을 지켜주는데까지만 존재의미와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몽학선생 이라 한다.  그러기에 때가 이르기전 율법이 폐해지면 그것은 생명을 죽이는 일이 되어 반율법 주의자나 또는 단순한 율법 폐기론자가 되어 종교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양태로 나타나고 또한 때가 이르러서도 율법이 폐기되지 않으면 그것도 역시 생명을 죽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케 하러 오셨다는 의미는 때가 찬 경륜을 따라 계란껍질을 폐기하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이 병아리로 태어나게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성경이 단순히 지식이나 내용으로만 전달될 수 없는 까닭이 있으며, 단순히 지식이나 내용으로만 전달될 때 발생되는 불행이 있는 것이다.여기서 계란껍질은 그림자요,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율법의 실체요, 실상이다.  그림자는 다만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만으로는 실상을 알 수 없다.  실체를 보면 비로소 그림자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림자를 가지고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된다.  실체가 오면 그림자를 분석하거나 따져볼 필요도 없다. 실체를 영접하려면 실체인양 주인행세하고 있는 그런 그림자로부터 눈이 돌려져야 한다.  그림자는 그림자요, 그것은 허상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이 허상을 허상으로 아는 것이 지혜이다.  허상을 허상으로 아는 순간부터 실상으로 나갈 수 있는 터전이 시작되며, 하나님은 이 구각을 깨트리는 작업을 이론으로가 아닌 실제로, 예수를 통하여 이루고 계신 것이다.  예수는 이 때문에 오셨다.  실체가 오기 전에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동시에 그림자가 떠나기 전에는 실체가 임할 수 없다.  이것은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논리싸움이 아니다.  실체가 오기 전에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과 동시에 그림자가 떠나기 전에는 실체가 임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언어적 표현의 한계에서 빚어지는 역설적 진리이다.

그것은 하나의 섭리속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탄생과정에 대한 두 측면에서의 표현일 뿐이다.어미닭이 계란을 품고 있는 동안 껍질속의 생명은 자라고 동시에 때가 이르러서 어미닭은 껍질을 쪼아 깨버린다.  어느것이 먼저랄 수 없이 함께 이루어지는 웅장한 창조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이다.그래서 e{w" a[n(해오스 안)이라는 종속절이 주절문장의 앞에와 뒤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천지가 지나가기까지는, 동시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인 것이다.

여기서 천지라 함은 옛 하늘과 옛땅이니 곧 옛 사람이 발을 딛고 있는 그 터전의 땅이요, 머리를 향하고 있는 그 하늘이다.  그것을 제발 이 지구와 육안으로 바라다보이는 저 하늘(sky)로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것은 갑자기 성경의 성경적 개념을 천문학의 개념으로 바꾸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그것을 영해(Allegorical interpretation)라고 단순 매도하려 하지 말고 성경적 개념의 하늘과 땅을 소위 말하는 성경적으로 살펴보라. 옛 하늘과 옛 땅은 지나가야 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덧입혀져야 한다.  이 천지가 지나가야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 된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19~20) 이러한 동문서답(東問西答)은 오늘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속히 이 성전을 헐자.  이 높이 높이 쌓아올라간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유대인들이 46년 동안 쌓은 예루살렘 성전은 보이는 성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성을 있게 한 그들의 신앙의 성(城), 육체로만 아는 신앙, 그 하늘과 땅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46년이 아닌 훨씬 그 이상의 세월동안 쌓아온 소중한 것이라 하더라도 미련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서 생명에 이르렀다거나  자유  운운할 수 없다.  그러기 전에는  나는 구원 받았다  말하지 말라.   나는 결코 율법주의자가 아니다 라고도 말하지 말라.  율법은 당신으로부터는 일점도 일획도 지나가지 않았다.  다만 당신 스스로가 율법주의자가 아닌 줄로 착각(nomivzw)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7:12의 말씀대로  제사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다.  천지가 지나가고 pavnta gevnhtai(판타 게네타이)되어야 비로소 율법이 지나가고 완전한 율법이 이루어지는 율법의 변역, 즉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라는 Ism이 아닌 개혁의 진정한 의미이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이 개혁되어야 할지 본질이 실종되어 있는 개혁은 구호와 기치일 뿐 공허한 메아리만 남는다.  이전 것이 지나가지 않으면 결코 새 것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안에 있지 않으면 결코 이전 것은 지나가지 않는다. 이 말은 결코 모순률의 모습이지만 그렇지 않다.그것은 상호 순환적인 관계이다.그리스도안에 있어야 이전 것이 지나가고 이전 것이 지나가야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다.이러한 것들이 성경의 오묘함이다.

by 코이네 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