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시편

[시7:1] 원통한 마음과 하나님의 손길

'코이네' 2020. 11. 23. 21:29

원통한 마음과 하나님의 손길

 

시 7:1-17

 

 

애매하게 괴로움을 당하는 경우는 비단 현대 사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시편 기자의 시대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도 애매하게 중상모략을 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키드너라는 주석가는 이 경우 시편 기자가 핍박을 당하는 것보다 더 괴로워했을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써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을 주는 상황을 하나님께 의로함으로 그 실마리를 풀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쓰여진 시편을 ‘개인적 애통시(Personal lament Psalm)’라고 현대 시편 주석가들은 분류합니다. 애통시는 대개 여호와를 애타게 불러 도움을 호소하는 서론 부분이 먼저 나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쫒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가 바로 그 서론 부분입니다.

 

그 다음 본론 부분이 나옵니다. 대개 본론은 자신의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설명과 기도 내용, 하나님의 성품과 명예와 역사(役事)에 입각하여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시키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시편 7편은 다윗왕이 압살롬의 반란 때가 아니면 사울왕의 핍박을 받았을 때 썼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데일리취 같은 주석가는 사무엘상 24-26장이 곧 이 시편의 배경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배경이 어떤 것이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윗이 애매하게 고통을 당했을 때 그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해결책을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직장에 나아가서 서로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의 숲에서 살아야 하는 직장인들이나, 복잡한 가족관계 가운데서 옴짝달싹도 못하는 가정주부들이나, 노사관계에서 정치권에서 교육계에서 인신공격을 당했을 때나 고통을 받게 될 때 자신의 방법대로 문제를 해결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시편 기자처럼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다음과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도우심 (7:1, 2)

● 이기는 능력 (7:3-5)

● 공의로운 응징 (7:6-16)

● 감사와 찬양 (7:17)

 

가. 하나님의 도우심 (7:1, 2)

 

종종 우리가 최악의 경우라고 생각하는 때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도 그랬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쫒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이런 기도 중 시편 기자에게는 피난처가 벌써 나타났습니다. 히브리어의 시제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암시해 줍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완료형을 씀으로써 아직 실제로 이루어지지도 않은 상태였으나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프로운이라는 주석가는 이 사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굴이나 바위틈이나 산이나 민첩함 등과는 비교되 할 수 없는 정도의 안전한 피난처에서 그는 자기의 피를 취하려는 원수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운 환경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우리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그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 사실을 체험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이와같은 하나님의 크신 팔에 자신을 매일 맡기지 않고 어떻게 이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비록 오늘날 우리에게는 사울왕같은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적은 없을지 몰라도, 우리를 초조하고 두렵게 만들며,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요소들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깜박등도 켜지 않고 언제 갑자기 끼어들지 모르는 수많은 도로에서의 위기 일발들, 유난히도 많이 발생하는 각종 암이나, 사업적인 위기의식 등은 매일같이 우리가 싸워야 하는 적들입니다. 이러한 적들 앞에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당신 앞에 나는 나의 피난처를 얻었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가장 큰 원수 앞에서도 우리는 기억합시다. 그 큰 원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되시며, 우리가 원수의 목적에서 안전함과 충만함을 누릴 수 있게 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 이기는 능력 (7:3-5)

 

한 무역회사 직원이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일하고 어떤 때는 고객을 데리고 자정까지 술좌석을 마련하는 일까지 했습니다. 어느날 아침 잠이 깨자 심한 복통과 요통이 있어서 하루를 결근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상관은 그를 태만한 자로 여겼습니다.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하고 그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그는 신경쇠약증으로 쓰러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리더스다이제스트에 나온 한 일본인에 관한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라고 떨져 버리기엔 너무나 우리 사회에서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최선을 다하나 애매하게 취급을 당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여기에서 부당하게 정죄를 받았습니다. 프로운은 시편 기자의 반응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신의 정직성을 열렬하게 주장했고, 그의 심령은 격한 감정으로 복받쳤습니다. 그가 자신이 부당하게 공격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격렬한 어조로 이를 항의했다.”고 말입니다. 앞의 경우의 일본인은 정신적으로 와해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이길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시편 기자는 이길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최소한 두 가지 근원으로부터 이 힘을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이것을 얻었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그는 외쳤습니다. 아마 시편 기자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내 심정을 알아 주지 못해도 전능하신 하나님만큼은 나의 억울함을 알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시편에서도 고뇌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여호와가 어떤 역활을 하시는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원수들을 물리친 후 다윗은 여호와에 대하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억울함을 알아 주실 것이다.” 우리는 다른 시편에서도 고뇌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여호와가 어떤 역활을 하시는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원수들은 물리친 후 다윗은 여호와에 대하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18:1, 2). 여호와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해 지금도 시편 기자가 말씀하신 내용대로 역사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환난날에 피할 반석이십니다. 그 이름 안에서 우리가 안전을 얻을 수 있다고 잠언 기자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18:10).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여호와께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한 찬송가 작가는 이런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둘째로, 그는 그의 거룩한 삶에서부터 무고한 정죄를 이기는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마치 네 개의 조건문이 나와 있는 것처럼 쓰여졌으나 히브리어를 보면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세 개의 조건문을 사용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아무 이유없이 나를 원수로 여기는 자를 내가 건지기는 했어도) 앤더슨이란 주석가는 이것을 세 개의 ‘자기 저주’의 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이 세 가지 내용이 사실이라면 5절에서 말한 것처럼 완전히 자신을 짓밟고 파괴시켜도 아무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5절). 이 말은 시편 기자가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적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이 악독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악독한 일을 하지 않았소.” 그것은 신약에서도 가르치고 있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5장1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오늘날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주께서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통해 우리는 많은 정죄를 물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책망하며 회개를 외치며 떳떳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만일 천만 한국 교인 중에 절반만이라도 이렇게 산다면 18세기 웨슬레시대가 경험했던 사회 정화 운동을 오늘날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이기고, 또 악을 이용하여 고소하는 마귀의 정죄도 이기며 살 수 있습니다.

 

다. 공의로운 응징(7:6-16)

 

다윗은 범세계적인 공의가 실현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의의 실현은

첫째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나타납니다(6-11절). 심지어는 의인도 심판을 모면하지 못합니다. 다행히도 의인이 받는 심판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고 구속적인 것입니다(고후5:10, 롬14:10)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8,9절) 다윗은 자신이 정직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공정하게 판단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의인에게는 이와 같이 공의로운 심판이 있기 때문에 커다란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는 조그마한 공의로운 일도 비록 이 세상에서는 묵살되거나 모함을 받는 구실이 될 수 있으나, 의로운 재판관이 계시므로 어느날 행한 대로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우리는 더욱더 악과 싸우며 의를 행할 용기를 얻게됩니다. 물론 여기서 의인은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를 기초로 하여된 의인을 의미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의롭다 할 사람은 구약이나 신약시대를 통털어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나의 방패”(10절)와 “정직한 자를 구원하는”(10절) 등의 표현은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심판의 범위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 넓은 데까지 미칩니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6,7,9,11절). 인간은 악과 싸우다가 어떤 때가 되면 지쳐서 악에 대해 미지근한 태도를 가질 때가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악에 대한 심판을 내리는 데 있어서 지치지도 않으시고 변하지도 않으십니다.

 

둘째로, 이러한 심판 뒤에는 징벌이 따라옵니다(12-16). 회개치 않는 자는 직접 그 자신이 징벌을 받게 됩니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을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12,13절). 여기에는 하나님의 징벌에 대한 ‘결의’와 ‘성격’이 나와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이미 확정되었고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회개치 않는 자는 허망된 삶을 이 세상에서도 살게 됩니다.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14절).

원래 사람은 의와 평강과 사랑과 기쁨 등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악을 해산하여 무서운 잔해(殘骸)와 저속한 속임수(퀘휼)를 쏟아 놓으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삶은 시편 1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바람에 나는 겨와 같으며, 하나님 눈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삶입니다.

회개치 않는 자는 자기 죄의 결실을 먹고 살게 됩니다(15,16절). 물질적인 차원에서는 악한 자가 언제나 손해를 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악한 자는 항상 자기가 낳은 악으로 망합니다. 자기가 판 웅덩이에 자기가 빠지고 자기가 낳은 해와 악에 자기가 부딪히는 것이 죄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이와 같은 영적인 법칙을 아는 자는 더이상 악인의 핍박과 거짓말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의로하게 됩니다.

 

라. 감시와 찬양(7:17)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라는 말씀을 칼빈은 하나님의 ‘미쁘심’ 때문에 감사한다는 내용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변함없이 공의를 베푸시어 세상은 비록 우리를 애매하게 정죄하고 괴롭혀도 하나님은 늘 공의로 우리를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극히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찬양입니다. 감사하는 이들은 찬양하리로다.“ 깊은 확신이 없이는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환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깊은 확신을 갖게 되고 따라서 믿음으로써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을 선언합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볼 때 어찌 의인이 애매하게 비난을 받거나 고난을 당하게 될 때 비극이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그 고난을 당면할 때 적어도 하나님의 도우심, 이기는 능력, 공의로운 응징 그리고 감사와 찬양이 있는데도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신앙심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자랄 것을 믿음의 눈으로 내어다 보고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다(성숙)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하나님의 도우심 (7:1, 2)

● 이기는 능력 (7:3-5)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이것을 얻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그의 거룩한 삶에서부터 무고한 정죄를 이기는 힘을 얻었습니다

● 공의로운 응징 (7:6-16)

첫째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나타납니다(6-11절

둘째로, 이러한 심판 뒤에는 징벌이 따라옵니다(12-16)

● 감사와 찬양 (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