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출애굽기

[출20:8] 주일성수의 기본 정신

'코이네' 2020. 8. 6. 17:32

 

주일성수의 기본정신

(20:8-11)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두 날이 있는데 엄격히 말해 한 날은 제사날이요 한 날은 예배날입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이레중 끝날인 안식일을 제사날로 정했고 신약은 이레중 첫 날인 주일을 예배의 날로 정했습니다. 즉 안식일은 엿새동안 잘 살았으니 제7일은 쉬어라행위의 댓가로 주시는 율법적인 성질의 제사날이지만 주일은 엿새동안 잘 살기 위해 미리 은혜로 주시는 감사의 예배의 날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에서 지키는 안식일을 지키는 백성이 아니고 은혜아래서 주신 주일을 감사로 지키는 행복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입니다. 따라서 이와같이 은혜로 주신 이 하루가 우리 하나님께 과연 어떤 날이며, 나 자신을 위하여 어떤 날이며, 우리 성도에게는 이 날이 있으므로 해서 어떤 유익이 있나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주일은 주일만의 주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주일은 지난 한주간을 정리하는 날이 되어야 하며 오는 한주간을 준비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일을 꼭꼭 지키면서도 지난주간에 철저한 정리가 없기 때문에 무거운 짐이 다음 주일에 또 다음 주일로 또 가중 되어 넘어가고 있으니 1020년 주일을 지켜 오면서도 실패가 되풀이 되는 생활이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주일을 지키고 돌아가 무엇이 우리 생활에 남는게 있는가? 이렇게 한주일을 지키고 돌아가 우리 생활에 무슨 보탬이 있는가? 약을 먹었으면 효과가 나타나야지 효험없는 약을 무엇 때문에 계속 먹겠습니까? 여기에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근본 정신의 재검토가 절실히 필요한 것 같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형식은 비교적 잘 갖추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 가게문도 닫습니다. 생활필수품 사고 팔지도 않습니다. 외상도 안하고 금전거래도 안합니다. 가족이 함께 예배에 참석도 합니다. 예배 의식에 꼬박꼬박 잘 참석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정신으로 이날을 쉬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정신으로 가게문을 닫고 어떤 정신으로 물건을 사고 팔지 않으며 어떤 정신으로 찬송하고 어떤 정신으로 기도하고 어떤 정신으로 예배에 참석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정신이것이 바로 예배의 근본정신 문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즉 형식적인 것이 비교적 완전하게 갖추어 졌을지라도 그 근본적인 요소가 빠지게 되면 그것은 결코 주일을 결코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못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11-15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앞에 형식적인 예배는 잘 갖추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며 너희 무수한 예배순서가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송아리지로 배불렀고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에는 이런 제물을 바치라고 해놓고 이제와서 귀챦다 거절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변덕장이 십니까? “너희가 내 앞에 벌려놓은 그것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이냐? 나냐 아니면 사람이냐? 너희는 쓸데없이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그물교회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네 찬송이 무슨 소용이 있고 네 기도와 헌금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헛된 제물을 가지고 오지 말아라. 분양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형식은 잘 갖추었다만은, 예배 의식은 잘 갖추었다만은 너희의 생활과 정신이 근본적으로 틀려 먹었으니 내가 너희 예배를 받을 수 없구나.”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앞에 드리는 이 예배는 괜챦습니까? 우리의 예배를 보시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물교회 교인들아, 너희가 이 자리에 거룩하게 앉아 있다만 정말 지난 한주간의 너희 행위도 그렇게 거룩했더냐? 한주일동안 나와는 상관없이 너희 마음대로 살다가 그래 저주받는 것이 두려워, 사업이 안될까봐 두려워, 가정에 우환이 있을까봐 두려워 억지로 억지로 주일을 지킨답시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더냐?” 하고 묻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주일예배의 근본자세는 무엇입니까? 정말 하나님이 뵙고 싶어 어린아이 소풍날 기다리듯 손꼽아 기다리다 기다리다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주일 안지키면 저주받는 다니까, 아니면 찜찜하니까, 아니면 그냥 습관이 되었으니까 나오셨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아침부터 교회에 나오기 까지 집안에서 어떠하셨습니까? 모처럼 쉬는 날이라고 늘어지게 자다가, 아니면 여전히 잠옷차림으로 이불속에 누워 텔레비젼을 보다가 11시가 넘은 시간에 겨우 겨우 일어나 애 들춰 업고 오지나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과 약속한 예배시간을 정확하게 지켜본 적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152-3번의 주일중에서 과연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날이 몇 번 정도입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이 모습을 보시고 사11장과 같이 탄식하고 계시지나 않는지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주일의 정신적인 자세는 어떠해야 할것인가? 세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이 날은 하나님께 영광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즉 그 중 예배의 목적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목적은 더더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날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칠만한 거룩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진실한 것도 의로운 것도 없습니다. 완전히 부패하고 타락해서 생각도 욕심도 행하는 예배 의식도 하나님이 탄식하시리만큼 썩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첫째, 통회하는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겠습니다.

51:17을 보니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로다.”고 하셨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범죄했으면 범죄한 그대로..... 뉘우치며 회개하는 심령,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될 우리가 바칠 예배의 제물인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릴만한 것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입은 것은 누더기 뿐이요, 몸은 때투성이요 온통 돼지 냄새 뿐이요, 배는 텅텅빈 거지입니다. 그러나 이 탕자가 아버지께 즐거움이 되어드릴 수 있었던 것은 나 아버지 없이는 못살겠습니다.” 하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그 모습 그대로를 아버지는 기뻐하셨고 즐거워 하셨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아버지 찾아 회개하는 마음 가다듬어 통회하는 심령을 제물로 아버지 앞에 바칠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되는 날이요 그리할때 우리 아버지 하나님 말씀하시실 오냐 오냐 주홍같으면 어떠냐? 진홍같으면 또 어떠냐? 어서 이리 오너라.” 얼싸안고 눈과 같이, 양털과 같이 희게 하시는 이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날이 바로 오늘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죠지 워싱턴이 어렸을 때 선물로 받은 도끼를 가지고 아버지가 아끼시는 나무를 찍어버렸다가 정직하게 말해서 용서받았다는 에피소드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때 워싱턴의 아버지는 거짓말하지 않고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을 듣고 그 어린것을 안고 네가 만일 거짓말을 했더라면 수많은 나무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내게는 더 큰 손실이었을 것이다. 진실을 말한 것이 수많은 나무를 얻는 것보다 내게 더 큰 이익이었다며 기뻐했습니다.

 

진실을 고백하는 자식이 부모에게 그렇게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면 우리 모두 진실하고 솔직할 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그러니 회개 회개 회개하는 마음, 눈물어려 통회하는 마음, 상한 심령으로 자복하는 마음 가다듬어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 이 날이 하나님께 기쁨의 날, 영광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간을 돌아보면 회개할 것이 어찌 한두가지 뿐이겠습니까? 가증하면서도 안그런 척, 거짓되면서도 안그런 척, 했으면서도 안한한 척, 악하면서도 선한 척, 이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것 뿐이요 결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업수히 여기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태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범죄했으면 범죄한 그대로, 물질문제로 범죄했으면 범죄한 그대로, 입으로 범죄했으면 범죄한 그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 은헤받은자 답게 살지 못했으면 살지 못한 그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했으면 살지 못한 그대로 하나님앞에 바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어야 겠고.....

 

둘째, 지난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바쳐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부족했읍니다만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었습니다. 나는 범죄했습니다만은 하나님의 긍휼은 한이 없었습니다. 아직도 나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오늘도 이자리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긍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는 이 감격, 이어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이어이 십자가의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이 모든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도 내 입에 찬송이 있는 까닭은 십자가가 있기 때문이요, 오늘도 내 마음에 하늘의 영광이 가득찬 것은 구원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요, 오늘도 저 영광된 소망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권고하심때문입니다.

 

이렇게 지난 한 주간을 회고하고 이 시간 하나님앞에 감사의 예물을 바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것이니 감사안해도 되는 것은 단 한가지도 없습니다. 건강이있습니까? 감사할 이유요, 가정에 화락이 있습니까? 감사할 이유요, 아직도 일 할 자리가 있습니까? 감사할 이유요, 자녀가 건강하게 잘 자랍니까? 감사할 이유니 겸손한 마음 가다듬어 감사, 진실한 마음 가다듬어 감사, 이렇게 감사로 하나님앞에 바칠때에 이날은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날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셋째, 내일을 다짐하면서 하나님, 제가 내일은 이렇세 살겠습니다.저렇게 살겠습니다.” 마음을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난날의 부족을 회고하면서 내일은 이렇게 살리라. 저렇게 살리라. 여러분의 마음이 다짐이 없습니까? 지난 인생을 돌이켜 보니 내 인생의 반이 지나갔구나. 남은 생애 멀지 않았으니 그 세월동안 나 이렇게 살아 바치리라. 나 저렇기 살아 바치리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생을 내놓고 다짐하는바 없습니까? 받은 사랑 생각하면서 내일은 이렇게 살리라. 얻은 구원 생각하면서 내일은 저렇게 살리라. 무수한 사람이 오늘도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살았구나. 이 생명가지고 나 이렇게 살리라. 무수한 사람이 질병에 신음하고 불구자가 되어가고 있는데 나는 아직 사지가 멀쩡하게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이 몸가지고 나 이렇게 살겠습니다. 저렇게 살겠습니다. 전도사면 전도사로서 나 이렇게 살리라. 집사면 집사로서 나 이렇게 살리라. 조용히 머리숙여 마음 가다듬어 하나님의 은혜앞에, 하나님의 사랑앞에 나 내일 이렇게 살리라.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2. 이날은 성도가 교제하는 날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백성의 병원이니 영적인 병은 여기서 고치고, 교회는 하나님 백성의 학교이니 신령한 교육은 여기서 받고, 교회는 하나님 백성의 가정이니 단란한 화락한 교제는 여기서 얻어져야 합니다. 한 주간 동안 흩어져 여기저기서 지내던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한가정에 모이는 이 행복와 영광이 이 예배를 통하여 와져야 합니다. 여기에는 김가도 없고 박가도 없고 이가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가난한 사람도 부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기는 유식한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그리스도의 한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한 가족 한 형제만 앉아 있을 뿐입니다.

 

첫째, 그러니 성도는 서로 연합하여 교제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성도의 교제가 무엇인가에 방해가 되어 금이 가고 담이 쌓인다는 사실은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포도나무 큰 가지 하나가 원둥지 사이에 금이 가 이 가지끝에 붙어 있는 적은 가지 더 적은 가지 더 적은 가지가 이 큰 가지의 고장때문에 원둥지의 혜택을 받지 못하듯이 혹시 나 하나가 그리스도와의 단절때문에 다른 성도가 그리스도와 피가 통하지 못하고 생명이 통하지 못하도록 방해가 되지 않는가? 나의 무슨 잘못때문에 성도의 교제가 단결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 때문에 나 때문에...우리 한번 반성해 보아야 겠습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하는 그 미움때문에 그리스도의 피가 통하지 못하고 성령의 호흡이 통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내가 누구에게 품고 있는 원한때문에 그리스도의 피가 온통 꽉 막혀 있지나 않는지... 내가 어떤 사람에게 섭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해서 기도문이 열리지 않아 그것 때문에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사람 저사람까지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교제에 금가게 하는 일은 없는지.....기도하여 성령의 도움심아래 성도의 교제가 방해되는 것이 제거된 후에 이 예배가 하나님앞에 상달되어 지고 예배의 결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피와 성령의 호흡이 확---통하는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 질것입니다.

 

둘째, 다같이 예배드리므로 성도의 교제가 깊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한자리에서 기도하고 있고, 한목소리로 찬송 부르고 있고, 다같이 앉아 한말씀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한 넝쿨의 포도나무 가지같이 한 피가 통하고 한 생명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목장의 양과 같이 한 목자아래 푸른 방초동산 푸른 시냇가로 이끌려 가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한 핏줄,한 둥지에 연결되어 있기에 한 꽃을 피우고 한 열매를 맺는 것 같이 성도의 교제는 그러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한 몸이 되어 예수 꽃이 여기에 피어지고 예수의 열매가 맺어져야 합니다.

 

셋째, 대화를 통하여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 져야 합니다.

산 사람끼리는 서로 이야기 하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끼리 얘기가 끊어지면 이를 보고 산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인사가 없고 대화가 없습니까? 웃으면서 나누는 인사, 반가움에서 나누는 인사, 뜨거움에서 나누는 인사, 아쉬움에서 나누는 인사.....이 인사속에 우리 성도의 교제가 더욱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그립던 식구들입니까? 한주간 동안 여기 저기서 흩어져서 세상과 싸우던 우리의 전우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예배후에 성도끼리의 기쁨의 대화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돈 얘기 말고, 계돈 얘기 말고, 남의 흉보는 애기 말고, 중매 얘기 말고, 선본 애기 말고, 신앙의 대화속에서 인사, 은혜로운 얘기속에서 인사, 승리로운 간증을 들으면서 인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사....이러한 성도의 교제가 하루 종일 성전에 있으므로 교회의 진리는 두터워 지고, 활기를 새로워 지고, 애정은 뜨거워 지고... 그러니 주일날 예배시간이 기다려 지고 오지말라고 해도 그 시간이 그리워 기다렸다가 오니 얼마나 즐겁습니까? 이 얼마나 큰 영광과 행복입니까? 이자리에 계신 여러분이여, 성도의 교제속에 수많은 행복이 여러분 위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장성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하루의 거룩한 날을 지킴으로서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로서 달라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하루를 공부했으면 무엇인가 배워서 돌아오는 것이 있어야지, 흔히 애기하기를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면 다 빠져버려도 그래도 자라는 것이 있다는 식으로 그래도 교회에 왔다갔다하면 무엇인가 콩나물 자라듯이 자라는 것이 있다는 것인데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런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 생활 10년에 자란것이 무엇이며 집사생활 수년에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콩나물은 빠져버리는 물에 자랄런지는 모르나 생각없이 이 자리에 나와 앉았다가 돌아가는 심령에게는 아무것도 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3년을 믿고 10년을 믿었다고 하는데 달라진 것은 얼굴의 주름살뿐 전혀 그 얼굴에 기쁨이 없다면 어찌 자랐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그 생활과 그에대한 소문이 여전히 나쁘다면 어찌 자란 것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라야 합니다. 하루의 예배위에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로서 자람이 있어야지, 이 자리에 들어올때 보다 한 시간 예배드린 후 나갈때 무엇인가 달라져야지, 예배드리는 결과가 있어야지, 찬송한 결과 있어야지, 기도한 결과가 있어야지, 말씀받은 결과가 있어야지, 성도의 교제를 나눈 결과가 있어야지...

 

첫째, 적어도 신앙의 지식의 성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참 답답한 것은 부흥사가 와가지고 설교할 때 교인들이 참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씀이다라고 말할 때 참으로 답답합니다. 제가 수십번 말씀드린 것인데도 제 말은 코로도 안듣고 부흥강사가 와서 하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이라는데 참으로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부흥강사가 당신 죽으면 천국갈 수 있느냐고 구원의 확신을 물어보면 쭈빗쭈빗 대답을 못하고 망설일때 참으로 복창터질 노릇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지식이 자라나야 하고, 구원의 은혜의 체험이 살아나야 하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로 예의가 자라나야 합니다. 10년전이나 오늘이나 장성이 없으면 이것이 병든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문둥이가 너무 많아, 앉은 뱅이가 너무 많아, 혈루병환자가 너무 많아, 먹기는 먹는데 성장으로 가지 않아, 수십년 신앙 연조를 자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좀 신앙지식의 장성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한 주일 지키고 가고 두 주일 지키고 가는 거듭되는 동안에 지식의 장성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영력의 성장이 있기를 바랍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 불의를 이길 수 있는 능력, 혈기를 이길 수 있는 능력,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예배 마치고 저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옛사람으로 돌아가 그 생활 그대로 되풀이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무엇때문에 주일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찬송을 불렀다면 영력의 장성함이 있어 세상을 이길 수 있어야 할 것이요, 기도를 드렸다면 영력의 장성함이 있어 죄를 이길 수 있어야 할 것이요, 말씀을 들었다면 이 말씀을 검삼아 승리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생활의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너무 거창하니 그만두고 가정의 빛이라도 되야 할텐데....내 직장의 소금이라도 되어야 할터인데.... 내 이웃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터인데...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이 예배일을 지킴으로 우리의 생활에 변화와 장성이 있어야 겠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무엇인가 변화된 모습으로, 장성한 모습으로 이자리에 나옵시다. 좀 더 거룩해 지고 진실해 져서 장성된 모습으로 말입니다.

 

말을 맺습니다.

이 하루는 지난 주간의 정리요 오는 한 주간의 완벽한 준비의 하루입니다. 그래서 주일 실패는 한 주간의 실패인 것입니다. 주일을 실패하고 어떻게 한 주간을 성공하면서 살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일은 옛생활을 청산하고 새생활을 준비하는 하루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감사함으로, 다짐하므로 영광바쳐 바른 관계 맺어 청산과 준비가 있기를 바라며, 성도끼리 기도와 예배와 대화속에 교제가 있어 물샐틈 없는 단결속에 과거가 청산되고 새 생활이 준비되기를 바라며 내일을 내다보면서 장성하여 오늘보다 다음 주일 다음 주일 보다 그 다음 주일.....점점 새로와 지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