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출애굽기

[출19:11] 하나님을 만날 준비

'코이네' 2020. 8. 4. 17:15


하나님을 만날 준비 

본문: 출 19:11-15   

 

오늘 우리는 하나님 만나 뵈려고 여기에 나왔습니다. 나는 과연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뵙고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는가? 스스로 점검하여 꼭 하나님을 만나뵙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내일 새벽부터 40일 특별새벽기도 제1부가 20일동안 시작됩니다. 저는 1부기간동안의 주제를 “하나님을 만나자”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어디서 부터 생깁니까? 신앙의 문제, 가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가 어디서 부터 시작됩니까? 하나님 만나지 못하는데서 부터 비롯됩니다. 그러면 반대로 이러한 문제들이 어디서 부터 해결됩니까? 하나님 만나는 데서부터 해결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헤어짐으로 불행이 시작되었고 그 후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다시만남으로 행복을 되찾았습니다. 탕자도 아버지와 헤어짐으로 불행했었고 아버지와 다시 만남으로 행복해 졌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만남으로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이는 사랑의 관계요 긍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자녀되는 우리 사이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예의가 있고 예절이 있는 법입니다.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하고 귀귀엽게 여기니까 그만 자식이 예의가 없고 버릇이 없어 무례하게 아버지 명예를 손상시키는 불출자식이 가끔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넓고 끝이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격하고 헤아릴 수 없기에 그만 버릇이 없어져서 하나님앞에 예의를 갖추지 못하는가 하면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그리스도인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구약시대처럼 이렇게 예의 없고 무례한 사람이 본문에서 처럼 돌에 맞아 죽는다든지 살에 씌워 죽는다고 하면 이자리에 살아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구약시대를 생각한다면 좀 더 하나님앞에 엄숙하고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절실해 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편에서 그렇게 후대해 주시면 받는 입장에서 감사하고 감격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고마우심에 대한 예절,예의,바른자세...를 마땅히 가져야 할것입니다.

지금 본문의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면 애급에서 애급법따라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광야로 인도하신 뒤 이제는 애급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
성에 걸맞는 하나님의 법, 십계명을 주시려고 지금 시내산에 강림하시기 직전에 있습니다. 강림전에 모세를 불러서 이리저리 준비하라고 명하시고 모세는 그 명을 받아 백성에게 옷을 빨것과 성결할 것과 지경을 범치 말것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준비를 다 마쳤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빽빽한 구름속에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오셨습니다. 우뢰가 우릉거리고 번개가 번쩍거리고 시내산이 그 영광감당 못하여 오들오들 떨고 긴 나팔소리와 함께 하나님이 임재하셨습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앞에서 엎드려 떨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빽빽한 구름속으로 들어가 출20장 이하에 기록된 십계명을 받게 됩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속에서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자”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40일 특별새벽기도기간에는 우리가 기어이 하나님을 만나야 겠습니다. 하나님 만나기 위해 새벽에 나와 부르짖고, 저녁에 나와 부르짖고, 그래도 못만나면 금식해서라도 부르짖고, 그래도 못만나면 옷을 찢고 재를 머리에 뿌리더라도 기어이 기어이 하나님을 만나야 겠습니다.

신약시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실 때 성전휘장 찢어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양을 잡을 필요가 없고 송아지 잡을 필요가 없고 제사장의 도움 받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앞에 나갈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고 불러주셨기에 지탄없이 하나님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신다”는 말씀을 볼 때 덮어놓고 촐랑거리고, 까불고, 준비없이 나가도 된다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것이 그저 제맘대로 놀 것 다놀고, 갈 곳 다가고, 할 것 다하고...이러면서 하나님 만나게 되느냐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신약시대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만나려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예절이 있고, 준비가 있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1. 먼저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은 “고기가 물을 만난다” “초목이 흙을 만난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근본이시요, 행복의 근본이시요,즐거움과 평안의 기초이십니다. 오늘 사람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 개인적으로 온갖 비극이 있는가 하면, 가정적으로 파탄이 있고, 국가적으로  쇠망이 있습니다. 마치 물을 떠난 물고기가 퍼덕거리는 것 같이,
흙을 떠난 초목이 말라 비틀어지는 것 같이 인간이 그러하고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 또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는 물을 떠난 고기가 물을 만남이요 흙을 떠난 초목이 흙을 만남이니 이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급하고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길을 열어 성전 휘장을 찢으시고 외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오직 그분으로만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적어도 세가지 면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첫째, 매일 생활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사는 것 보았습니까? 초목이 흙을 떠나 사는 것을 보았습니까? 잠시도 떠나서는 안될 관계가 물과 물고기와 관계요 흙과 초목과의 관계입니다. 하루종일 물떠나 돌아다니다가 필요하면 물에 돌아왔다가 또 물밖에 나갔다가 하는 물고기 보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하면 하나님 찾고, 필요없으면 버리고...인간은 그리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시간은 하나님 만나러 오는 시간입니다.
예배시간은 하나님과 만남을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가? 혹 삐뚤어지지나 않았는가? 점검하는 시간이 바로 예배시간입니다. 그래서 만남이 바른 관계에서 감사하고 경배드리고 영광드리고 또다시 만남을 분명하게 확신한 다음 이 문을 나서는 것이 예배의 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지 못한 예배는 이미 예배가 아닙니다.

셋째, 심판대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는 절대적이고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최후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가룟유다도 심판대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부자도 하나님없이 살았지만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나사로도 거지로 살았지만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세가지, 매일 하나님 만나며 살고, 예배속에서 다시한번 확인하고, 이렇게 살다가 마지막에 심판대앞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만나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2.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만난다는 사실은 쉬운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속해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손에 만져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
나님을 만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머리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까? 마음으로 하나님을 이렇게 저렇게 상상하는 것을 말합니까? 아닙니다. 이런것들은 다 사람 나름대로의 잠꼬대요 몸부림이요 짝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친구를 만난다고 대문앞에 와서는 “여보게, 아무개 있는가?” 불러놓고는 대답도 안했는데 “ 나 아무개일세. 무슨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어쩌구 저쩌구...”일방적으로 말만 해놓고 “그럼 잘있게, 나가네” 하고서는 돌아왔다고 합시다. 비록 할 말은 다했지만 사실은 친구를 만나 교제를 나눈것은 아닙니다. 그저 혼자 지꺼리다 돌아왔을 뿐입니다. 예배중에도 혹 이런 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혼자 찬송하고 돌아가는 사람, 혼자 기도하고 돌아가는 사람, 혼자 중얼거리다가 한시간 다 보내버리는 사람, 이런 사람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한시간 예배를 드렸다고 할지라도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헛수고 없기를 바랍니다. 모두 모두 하나님 만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럼 예배시간에 하나님 만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과 마주앉아 내말 하나님이 들으시고 하나님말씀 내가 듣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히개하면 “오냐, 괜챦다. 내 독생자가 이미 다 용서해 주었느니라. 그러니 다시는 그런죄를 범치말라.” 고 말씀하시고 혹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묻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있으면 듣고..이런 행복과 감격안고 “하나님, 저 한주일 동안 잘 살겠습니다. ” “그래, 조심하며 살거라. 내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마.” 이쯤되어야 하나님 만나고 돌아가는 것이지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면 하나님 만난것이 아닙니다. 애급으로 내려가기를 벌 벌 떨었던 모세였지만 하나님 만난후 당당하게 내려가는 그 늠늠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 만난 증거입니다. 죽을 상하고 교회왔다가도 하나님 만나면 환한 얼굴로 나가야 하나님 만난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일주일동안 내내 돈 생각하고, 세상 생각하고 욕심따라 부글부글하는 행활하다가 주일낮 교회와서 떡 앉았다고 하나님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유리창에 커튼이 쳐저 있으면 저 밖의 햇빛이 들어올 수 없듯이 우리 마음에 세상이라는 커튼이 둘러쳐저 있으면 예배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에워싸고 계시지만 세상이라는 커튼 때문에 우리안에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커튼이 쳐저 있는 사람은 찬송한들, 기도한들, 말씀 들은들 하나님 만나지 못하고 답답한 상태가지고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활에 변화가 없고 능력이 없고 하나님 자녀다운 당당함이 없는 것입니다.


3.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는 준비가 무엇입니까?

 

첫째, 옷을 빨아야 합니다. 이는 외적인 준비를 말합니다.

혹 예배드리는데 무슨 외적인 것이 중요하냐고 물으실 분이 이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마음은 깨끗한 외모로 나타는 법입니다. 마음에 그렇게 하나님을 사모하고 간절하게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연히 옷 매무새가 달라질 것입니다. 앉고 서는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주일날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면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세가 달라질 것이고 세수하고 면도하고 화장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저희 3남매 키우실때 주일날 아침마다 새옷입혀 교회에 보내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대에는 예배드리는 날 이른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의관 정제하고 농담도 삼가고 주일날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그런 정성이 우리의 신앙선배들에게는 있었는데 오늘날은 다 까먹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먼저 옷을 빨라고 했습니다. 때묻은 옷, 땀내나는 옷, 비리비리한 냄새나는 옷...부부지간에도 이러한 냄새나면 싫어하거늘 하물며 하나님앞에 예배드리러 오면서 이런 옷을 입고 와서 되겠습니까? 물론 새옷을 입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빨아서 다려놓았다가 깨끗이 입고 나올만한 정성이 없다면 하나님 사랑한단 말도 거짓말이요 경외한다 말도 거짓말입니다.

 

둘째, 성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내적인 준비를 뜻합니다.
먼저 도덕적으로 성결해야 합니다. 마음에 꺼리낌이 없도록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회개할 것은 회개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월삭도 잘 지키고 제물도 잘 바쳤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하나님은 거절하셨습니까? 죄가 있는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허물이 있거든 해결하고 나와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하며 하나님 만나러 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원한을 품고 앉아 하나님 만날 수 없습니다. 찬송을 부르건만 그 사람의 찬송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기도를 하건만 그 사람의 기도속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형제와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이 하나님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성결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만큼 그리 깨끗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한 것이고 성령의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예수 보혈 의지하고 성령을 힘입어야 하나님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성령이 인쳐주셔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가지고는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니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 보아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이지 우리힘으로는 도저히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셋째, 지경을 정하여 범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영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속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한계가 있고 인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한계를 도저히 측량할 수 없습니다. 겨우 30Cm 자가지고 광년을 단위로 하는 우주를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한계가 30Cm 자라면 하나님의 한계는 우주와 같습니다. 바가지 하나로 태평양 바다를 잴 수 있겠습니가? 인간의 한계가 바가지라면 하나님의 한계는 태평양과도 같습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똑똑한들 감정이나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 만나려고 해도 만나지지 않을 뿐더러 하나님께 대한 망령된 행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반딧불이 나도 빛이라고 거들먹거리며 “태양아, 나와 벗하자” 고 한다면 이 얼마나 참람된 행동입니까? 인간이 제아무리 선하고 의롭다 해서 “하나님아, 나와 벗하자.” 고 한다면 이 얼마나 참람된 행동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영역을 인간이 침범하는 것입니다. 구더기가 변소간에서 아침상을 차려놓고 “이전도사야, 나와 함께 식사하자”고 한다면 이 얼마나 지독한 모독입니까?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하나님과 같이 하자고요? 이 얼마나 망령된 행위입니까? 인간의 한계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만 하나님 만날 수가 있는 것이지 인간 자체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은즉 인긴은 인간의 한계를 지켜야 합니다.

 

말을 맺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만나려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일분일초라도 하나님과 끊어짐이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하나님앞에 한번은 서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합시다. 옷을 빱시다. 외형적인 생활에서 하나님 만난자 답게 삽시다. 몸가짐도, 옷매무시도, 언어생활도 조심합시다. 그 다음 성결합시다. 먼저 인간의 도덕 윤리에 벗어남이 없도록 합시다. 그리고 영적으로 성결합시다. 나 비록 거룩할 수 없지만 십자가 보혈로,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한계를 지켜 인간이 설자리에 서고 앉을 자리에 앉아 아버지를 만납시다. 그래서 영원앞에서 “하나님 제가 왔습니다.” “이제 오느냐, 어서오너라. 세상살이 고생많았지” 이러한 영접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