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로마서

[롬6:1] 본질과 실존

'코이네' 2019. 4. 21. 10:07

본질과 실존

로마서 6:1-11

 

한 사람은 예수를 믿고서 날마다 기쁨 속에서 충만한 삶을 살아갑니다. 얼굴은 늘 웃음이 피어있고 마음은 평안합니다.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불평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하는 것이 기쁩니다. 교회 가는 것이 즐겁고 성도들과의 교제가 즐겁고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에 힘쓰며 주님께 드리는 생활을 감사함으로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똑같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를 믿는 생활이 그에게 하등의 만족도 기쁨도 주지를 못합니다. 얼굴은 우거지 상이고 돈이라도 좀 벌고 좋은 일이 있으면 조금 기분이 좋았다가 어려운 일이 조금 생기면 그것 때문에 낙심하고 괴로워합니다. 신앙생활도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도 의무적으로 그것도 시간 맞추어서 겨우 가고 봉사하는 기쁨도 말씀의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끝나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똑같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한 사람은 충만한 기쁨 속에서 보람을 느끼며 감사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한 사람은 불평과 짜증 가운데 무의미한 신앙생활을 할까요?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그 이유를 진단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자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본질과 실존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인지도 모릅니다. 본질은 존재의 본래의 모습이고 실존은 현재의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넥타이는 정장을 할 때 목에다 매는 장식물인데 가끔 시골 노인네들 보면 허리 끈 대신에 넥타이를 묶고 다니는 것을 봅니다. 신사복을 입는 정장의 도구로 쓰여지는 것이 넥타이의 본질이라면 허리끈으로 사용되고 있는 모습은 넥타이의 실존입니다. 공자는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라는 본질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치의 실존은 당리당략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선한 본질로 창조하셨는데 오늘의 사람의 실존의 모습은 더 이상 선한 모습이 아닙니다본질의 모습에 실존의 모습이 가까우면 가까울 수록 그 사람이나 사물은 행복한 것이며 멀어질 수록 불행한 것입니다호랑이는 깊은 산 속에서 짐승의 왕으로 사는 것이 본질입니다. 동물원의 우리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실존은 불행한 것입니다. 놀기 좋아하고 사람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연예인이 된다면 즐겁습니다. 그러나 연구실에서 며칠이고 보내야하는 그런 일을 한다면 그는 불행한 것입니다.

키엘케골은 이런 예를 들어 이것을 설명합니다.

북유럽에 살고 있는 들오리들은 철새입니다. 그래서 가을이 깊어지면 따뜻한 남유럽 쪽으로 이동을 하고 봄이 오면 다시 북유럽 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어느 해에도 어김이 없이 한 떼의 들오리들이 남쪽을 향하여서 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마리가 밑을 내려다보니 어느 조용한 농가에서 집오리들이 한가하게 모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부러워서 가까이 가서 보기로 했습니다. 내려와 보니 너무도 편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걱정 근심이 없이 살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풍부했습니다. 들오리는 나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 가자하면서 집오리들과 어울렸습니다. 오랜만에 실컷 먹고서 쉬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랐습니다. “내일 남쪽으로 가자하면서 저녁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남쪽을 향하여 가는 들오리 떼를 따라가야하는데 편안함을 한 번 맛보니 며칠 더 있고 싶어졌습니다. ‘며칠 더 있으며 기운을 회복하고 떠나야지이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이렇게 며칠, 며칠 하다보니 그만 들오리의 이동은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날아가는 들오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이 한 마리는 더 부담 없이 집오리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몇 달 동안 했는데 문득 하늘을 보니 수많은 들오리 떼가 북쪽을 향하여서 날아가고 있습니다. 이때 이 들오리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들오리인데들오리는 날아갈려고 날갯짓을 해보니 기름이 많이 끼고 살이 쪄서 힘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자그리고서 주저앉았습니다. 날아가는 들오리 떼를 볼 때마다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있다보니 또 들오리의 이동이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또 철이 바뀝니다.또 들오리 떼의 이동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 내가 들오리지하면서 생각이 들더니 이제는 점점 둔해집니다. 결국 이 들오리는 집오리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인간을 빗대어서 실상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사회성, 어떤 사람은 도덕성, 어떤 사람은 이성.......

수많은 일관되지 않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보아야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본질과 실상 그리고 장래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귀하게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의 영광이요 면류관이었습니다. 이세상의 모든 것이 주어진 만물의 으뜸이요 영장이었습니다. 가장 귀한 사실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을 닮은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을 닮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닮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서로 사귈 수 있는 교통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계속된 교제를 통하여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에덴 동산은 낙원이었고 모든 생명의 충만함이 넘쳤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생명, 충만, 기쁨....

 

하나님의 소망은 인간이 복되게 사는 것을 보는 것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잘 사는 것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내팽개친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함께 살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해서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친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주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에 대하여 가졌던 무관심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나 자신이 되는 것은 바로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실상을 보세요. 나 자신이 되겠다고 하며 자기 뜻대로 살아간 세상의 결과가 어떻게 되갑니까?

전쟁이 없는 날이 거의 없습니다. 사고, 살인, 질병, 환경파괴, 공해, 공포, 무질서, 불안....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고독, 무의미, 공포....., 마음 부칠 곳이 없어 이리저리 뛰어다녀보고, 향락에, 취미 생활에, 좋은 집에, 여행에, 전념을 해보지만 마음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바로 수가성에 살고 있었던 여인처럼 말입니다. 그는 그의 행복을 찾아서 다섯 남자를 바꾸며 한 번 잘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의 삶의 갈증은 사라질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멈출지를 몰랐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오시면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에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너무나 연약하여 마귀의 사슬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알고서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서 마귀로부터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너무나도 무거운 고통이셨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하여서 눈을 뜨게하신 생명의 역사였습니다. 내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게하신 지혜였습니다.

5:17-18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임을 여러분은 고백했습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서 마귀에게서 사셨지만 우리를 종으로가 아닌 친구로 대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신문사에서 친구가 무엇인가?에 대해 설문을 했습니다. 당선작은 다른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 찾아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친구이십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를 잊고 살며 원망할 때도 많지만 그는 결코 우리를 잊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처절한 슬픔 속에 걷잡을 수 없을 때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아무도 나의 외로움에 동참해 주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친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너무도 많은 것들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가 그것들을 누리며 풍성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영원한 생명, 죄 사함, 두려움의 극복, 기도의 응답, 기쁨, 평화, 만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충만한 은혜가 주님을 따르는 신앙 생활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것들이 성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받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풍성함을 가득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가 빈곤하고 답답하게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버지가 부요한데 아들이 빈곤하다면 거기에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거기에는 아마도 부자관계에 이상이 있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한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본질에서 떨어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우리를 불행하게 해주는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에 거슬리는 나의 육체요

우리는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마귀요, 그리고 유혹과 허영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성도는 이런 요인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내 힘만으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속에 성령께서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을 아시고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싸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성령을 거슬리는 나의 육체와 싸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성도의 본질은 예수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입으로 고백하고 삶으로 고백해야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살아 있어서는 내안에 계신 예수께서 활동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 태도가 명확해야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풍성함이 임하게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날마다 변화되는 삶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옛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많은 순간에 이것을 망각하고 맙니다. 세상과 죄에 대하여서는 이미 장사 지낸바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살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임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로 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풍성함과 빈곤함의 차이는 이런 성도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순간에 죽은 것이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것을 우리의 삶에서 경험합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생각해야합니다. “나는 이것에 대하여 죽었다

쓸데없이 세상 것이 좋아보이고 매력적으로 나를 끌려고 할 때, ‘나는 이것에 대하여 죽었다고 여기시며 동시에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봉사의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대하여서 나는 이것에 대하여 살았다는 것을 다짐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살아가시는 본래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을 때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기쁨과 보람이 충만한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이왕 예수를 믿으면서 한 번 정말로 제대로 믿기를 바랍니다. 불안하고 확신이 없고 떠돌이처럼 손님처럼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예비해놓으신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