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로마서

[롬2:1] 하나님의 관점 사람의 관점

'코이네' 2021. 6. 23. 21:47

 

하나님 관점, 사람의 관점

 

본문 : 롬 2:1-16

 

 

제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일을 파악하려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아전 인수라는 말또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이라면 모두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마도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때문에 한가지 사건을 가지고도 서로 해석하는 방향은 현저히 틀려짐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부동산 실명제라는 말이 방송가와 정계의 핫이슈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념 하나만 가지고서도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의견들은 찬성과 반대의 의견으로 나타나는데, 찬성하는 측에서는 주로 부동산이 매우 적은 사람들의 주장이긴 합니다마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세금을 비 도덕적인 방법으로 탈세하는 사람들을 색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거의 부동산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여러 편법을 동원하여 남의 이름으로 등기해 놓은 사람들의 의견입니다마는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인 재산권과 자유계약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일견 한쪽의 의견만을 들으면 우리는 그렇게 수긍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쌍방의 의견을 다 들어보면 둘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임을 찾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누구든지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을 어느정도는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너무나도 일방적인 입장에서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 작게는 부부간의 의견 대립으로 부터 크게는 정치적견해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우리는 자신들의 입장을 꺽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판단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방인들을 향해 그 죄상을 낱낱히 열거하는 바울의 고발에 유대인들은 환성을 올리며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바울은 그 예리한 고발의 칼날을 유대인을 향해 돌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자신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남들을 판단하고 그 잘못을 찾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받은 민족임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율법을 통한 자신들의 의를 한없이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남들로 부터 자신이 판단을 받는 것은 매우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가치기준아래서 남들의 잘못을 판단하는데는 너무나도 빨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준엄한 논고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는 이방인들은 한없이 불의해 보였고 자신들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한결같이 불의한 자들이었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그런 짓을 똑같이 해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유대인들 역시 이방인들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서 1장을 통해 이방인들을 정죄하실 때 유대인들이 박수를 치며 그들을 판단 했드시 이제는 유대인들 역시 자신의 유죄를 솔직히 인정해야 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이방인들이 유죄라고 비판했으니 네가 똑같은 행동을 하였으므로 나 역시 너를 유죄로 고발한다. 바로 네가 그들을 유죄라고 판단했던 그 판단이 너를 오늘날 유죄로 만들었다고 하나님께서는 선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했습니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니였습니까? 과연 우리는 얼마나 남을 판단하기에 눈과 귀와 입이 빨랐습니까? 그리고 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무딘 눈과 귀와 입을 가졌습니까? 오늘날 인간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중의 하나가 남에대해서는 너무도 정확하게 판단하는 반면 자신에 대해서는 또한 너무도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려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 앞으로 달리고 있던 자동차의 기사는 불이 바뀌기 전에 얼른 지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노란불을 보면서 앞으로 전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너무도 바쁜 한 행인이 불이 채 바뀌기 전에 차도로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그 둘은 가까스로 사고를 피하고 횡단보도 중간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는 동시에 화가나서 이렇게 외칩니다. 아니 이사람아 당신 그렇게 하면 어떻게해!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입니다. 둘은 서로 약간씩 잘못을 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보면 상대방이 지은 잘못과 똑같은 잘못을 바로 그순간 자기도 범하고 있었음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이방인들과 똑같은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그 죄를 벍히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바로 이 유대인의 죄를 고발했기 때문에 동족인 유대인들로 부터 그 험한 배척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또 예수님 역시 똑같은 이유로 십자가에 못박히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실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엄청난 복을 받아 누리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과 인도하심은 이스라엘이 권위주의에 사로잡히라는 뜻이 아니라, 받은 그만큼 더욱 순종하고 베풀라는 하나님의 요구였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인들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사실 몰라서 못하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알면서도 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 놀라운 사랑을 베푸심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것을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져버리고 오히려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던자들과 똑같이 행한다면 오히려 더욱 큰 징계를 받아야함이 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들을 향한 이 고발을 거울삼아 함부로 밤을 비판하는 일을 삼가하도록 노력해야만 할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기 보다는 그것을 교훈삼아 나의 삶의 모습을 가다듬는 기회로 삼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산에 있는 돌을 교훈삼아 나를 바로세운다는 뜻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 교훈을 거울삼아 남을 비판하기보다는 나를 먼저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올바로 세우는 기회로 삼는 슬기로운 성도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너희는 남을 비판하지 말라 네가하는 그 비판으로 네가 비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으며, 용서하되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한없이 회개의 기회를 마련해 놓으시고 이스라엘의 회개를 기다리셨던 그 하나님의 은총까지도 이제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무릇 율법이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이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이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이는 율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선택해 주신 증거라고 자부하던 그들에게 오히려 올무가되어 그들의 삶을 정죄하고 그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게 된다는 경고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율법아래서 유대인들이 법한 이방인들과 똑같은 잘못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은 먼저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는 완고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그 삶속에 쌓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26절로 11절까지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한 행위대로 보응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기본적인 사상인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과는 너무도 동떨어진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2절을 함께 읽을 때에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이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해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선물을 제공하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진리에 따라 그에 합당하게 나타나는 열매와 삶을 통해 하나님께 속한자를 가려내신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온전한 회개의 제물로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없는 믿음과 신앙과 영광의 상징으로 추앙받던 다윗은 다른 사람과 별다른 점이 없는 보통사람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왕권은 이용하여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았던 탐욕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위해 온갖 충성을 다바치던 우리야의 아내가 탐나서 온갖 술수로 자신의 충복을 죽여버리고는 그 아내를 강탈한 파렴치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오늘날까지도 하나님의 사람을 대표하는 표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 잘못을 지적하는 나단을 향해 그잘못이 깨우쳐지는 순간 순간마다 눈물로서 금식하며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받기를 싫어하고 완고함을 버리지 못하는 이스라엘과 다윗의 차이는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두번째로 유대인들은 겉으로 나타나는 부분에만 신경을 쏟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밖으로 나타난 것을 중요시 여기는 분이 아니라 그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임을 깨달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의 판단은 주로 밖으로 나타나는 외식적인 부분에만 치우쳐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누가 소유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되어야 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조목조목 행동 강령을 정해 놓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 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하고 어떻게 하나님께영광을 돌려아 하는가가 더욱 중요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선 율법을 듣는자가 의인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만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참된 행함만이 하나님 앞에 우리를 의로운자로 설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외면으로 나타난 겉치레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은밀한 것 까지도 심판하시는 분임을 명심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율법보다도 더욱 우리의 양심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율법은 최고의 양심을 선포하는 증거였으며 때문에 율법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이방인들에게까지라도 양심의 행동으로 율법을 삼아주시겠다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양심을 회복하여야만 합니다. 우리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의로운자로 불러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돌이켜야만 합니다. 여러분 다른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해보십시요. 그에게 향한 손가락은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는 하나님을 향하고 나머지 세개는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먼저 나 자신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남을 판단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나 역시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지 않는가 회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잘못을 덮어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참평안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꿇고 회개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교만함을 부리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눈물로 회개한 자를 더욱 귀하게 들어 쓰시기 때문입니다. 진정 인간의 은밀한 것으로 심판하시는 그 분께서 인간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항상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회개와 겸손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바로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의 강령이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