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갈라디아서

[갈1:6] 그리스도인의 자유

'코이네' 2019. 2. 22. 22:12

그리스도인의 자유

갈라디아서 1:6-10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하느님을 외면하고 또 다른 복음을 따라 가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뒤흔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려고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미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겠읍니다. 누구든지 여러분이 이미 받은 복음과 다른 것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내가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는 줄 압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속에 8절에 " 우리가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란 귀절은 우리 교회에서 일부가 나가는 날 한 사람이 나와서 저를 비판하는 귀절로 인용하던 그 말씀인데 그 의미는 제가 전하는 복음이 자유주의적이기 때문에 다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거기에 대한 반박의 의미는 추호도 없고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엇이며 다른 복음은 무엇이냐 하는 분간을 분명히 하여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울러 성경을 읽을 때 아무렇게나 많이, 열심히 읽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바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아울러 드립니다.

 

Ernst Kasemann 이란 독일 신학자가 "예수는 자유를 의미한다."란 책을 썼읍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런 이야기로써 그의 글을 시작합니다. 1952년에 네델란드가 홍수로 심한 재해를 맞았는데 그 때 암스텔담의 어떤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읍니다. 지금 시내는 홍수로 제방이 무너지고 온 시내가 물바다가 될 지경인데 그 때가 바로 주일예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읍니다. 사람들의 손이 필요하니까 경찰이 목사님께 통지를 해서 무너진 뚝을 막는데 좀 도와달라고 하였읍니다. 그 교회는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교회였는데 이런 긴급한 청을 받고난 뒤에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긴급히 의논을 청하였읍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방을 막으러 가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앞에 예배드리는 시간이니 갈 수 없다고 했읍니다. 목사님께서는 예수님도 제4계명을 말씀하실 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지 않다고 하셨으니 우선 사람들을 구하고 예배를 드립시다 하고 말하니까 교인들 대부분은 하나님은 바람과 파도도 잠잠하게 하시니까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것이 더 신앙적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믿고 예배드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고 말했읍니다.

 

목사님이 곤경에 처해 있는데 어떤 평소에 존경을 많이 받던 한 묵묵한 노인교인이 "목사님, 저는 평소에 늘 생각을 하면서도 말씀드릴 엄두가 안나서 말씀을 못드렸는데 예수님은 어느정도 자유주의자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하고 말했읍니다.

 

문제가 된 것은 주일예배시간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제방이 터져서 사람이 다 죽게 되었으니 먼저 제방을 막아 사람들을 구하고 그 다음에 예배드리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도 그 목사님처럼 우선 제방을 막아 사람들을 구하고 그 다음에 예배를 드리면 더 은혜스럽고 감격스럽고 전도도 되고 좋을터인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의무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배쪽을 택한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 바울사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하나님을 외면하고 또 다른 복음을 따라가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다른 복음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는데 또 다른 복음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에 보면 이미 받은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이해하는데 많은 혼선이 있습니다.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어떤 것이 다른 복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자기들의 보수적인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고 자유주의적 신앙은 다른 복음이라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꺼꾸로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여기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야 말로 자유의 복음이며 여기서 말하는 다른 복음은 이 자유의 복음을 다시 율법적이고 보수적으로 만든 복음을 가리킵니다. 이 점을 제가 성경을 인용해 가면서 증명을 해 나가겠읍니다. 먼저 2:3-4까지를 읽어 보십시다. 나와 동행했던 디도는 그리이스 사람이었는 데도 그들은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읍니다. 그런데 가짜 신도들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몰래 들어와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실상 디도가 할례를 강요당할 위험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디도란 이방사람이 당시 유대인이 모이는 교회에 예수를 믿기 위하여 신입교우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교회에 있던 사람중 이상한 사람들이 디도를 보고 그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디도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할례를 받지 않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을 듣고 자유로운 줄 알고 교회에 들어왔는데 먼저 믿는 자들이 할례를 강요한 것입니다. 이 할례란 것이 당시에 문제가 되었는데 할례는 유대인이 되는 표시이고 유대인이 되어야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래야지만 구원이 있다고 유대인들이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자기들이 독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이 구원의 독점이란 신화를 깨트리고 자신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율법과 조문들을 자기 몸으로 폐기하고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이방인은 할례받을 필요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4-15을 찾아서 같이 읽어 보십시다.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율법조문과 규정을 당신의 몸으로 폐기하시고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大 自由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이 장벽을 허물었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이 장벽을 다시 쌓았다는 말이고 이미 폐기처분한 율법조문과 규정을 다시 적용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예수님의 복음은 율법에서 자유하게 하고 누구나 쉽게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 과정을 다시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갈라디아서 2:11-13을 보십시다. 그러나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책망받을 일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의 책망받을 일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게파가 이방인 교우들과 한 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들어 오자 그는 할례를 주장하는 그 사람들이 두려워서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물러 갔습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안 먹은 체하며 게파와 함께 물러 나갔고 심지어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휩쓸려서 가식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행동이 복음의 진리에 만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게파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유다인이면서 유다인같이 살지 않고 이방인같이 사는 당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기 게바란 베드로를 가리키는데 베드로가 이방인들이 주로 모이는 안디옥교회를 시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 교인들인 이방인들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네바상황으로 말하자면 베드로가 한국에서 있다가 자네바에 와서 포도주을 놓고 마시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목회하는 교회, 본교회쪽에서 아주 보수적인 유대인들이 온다는 전갈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에게 이런 말이 새나가면 시끄러워지니까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포도주을 치우고 그 방을 나가서 이방인들하고 같이 안있었는 척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도 그랬고 특별히 바울과 가까운 바나바까지도 위선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이에 바울이 화가 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끔 이미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고 그리스도는 이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자유를 주셨는데 보수적인 사람들이 와서 구설수에 오를 것 같으니까 얼른 자리를 비키고 안먹은 척하는 졸렬한 행동을 하는데 도데체 그 마음속에 든 복음은 무엇이며 그런 피하는 비겁한 행동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자유를 받은 사람이 왜 그렇게 사람이 보는 것을 구애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0에 보면 "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내가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는 줄 압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닐 것입니다." 했습니다.

 

개역성경에 보면 "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고 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이 무서우냐 사람이 무서우냐, 하나님이 자유를 주셨는데도 사람이 무서워서 누리지 못하면 자유를 받은 셈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자유를 받고 은혜를 받았는데 왜 사람들은 다시 거기에다 규칙을 부가하고 그것에 메여 자유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논리는 사람이 정해놓은 율법보다 하나님의 은총이 훨씬 크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우리가 율법적으로 제한 받는 그런 양심을 해방시켜서 우리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쫓도록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 보면 이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고 더 많은 규칙을 만들어 아주 편협한 사람들이 되어가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할례, 그런 것은 하나님의 자녀되는데 필요없다 하셔서 폐지해 버리셨는데 왜 인간들은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란 규정을 스스로 갖다 붙이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요즈음 많은 세상 사람들이 들어와서 해방이 되고 자유하게 되고 더 너그럽게 되고 더 융통성이 있게 되고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하고 해야 하는데 요즘 교회는 들어오면 그만 편협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 전에는 서글서글하고 너그러웠는데 교회에만 들어오면 이상하게 편협하게 되어 갑니다. 쫌상이 되어 갑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안 그랬던 사람들도 원칙론자가 되고 교조적이 되고 엄격해 지고 지극히 윤리적이 되고, 자기는 별로 윤리적이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윤리적인가 아닌가를 살피는 그런 감시자가 되고 심판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유의 복음으로 이해하지 않고 율법의 복음으로 이해하는 편협한 이해 때문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모두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겸손해 해야 하는데 그렇게 편협해 가지고서는 자기도 그렇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심판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겸손이 아니라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교만이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하셨는데 요즈음 교회 사람들은 구원받는 자는 소수다 하면서 이 사람은 십일조를 안내기 때문에, 저 사람은 성경을 열심히 읽지 않기 때문에, 저 사람은 세례를 안받았기 때문에, 저 사람은 말씨가 기독교적이 아니기 때문에, 저 사람은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십일조도 필요없다, 성경도 읽을 필요가 없다, 세례도 필요없다, 말씨는 아무리 거칠어도 괠찬다, 구원의 확신같은 것은 필요없다란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 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더 큼으로 우리의 형편과 인격과 행동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는데 구애됨이 없으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복음을 오늘 교회는 값을 너무 많이 받고 팔려고하는데 문제가 있읍니다. 이것이 문제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유의 복음을 배우지 못하고 이미 폐기처분한 구리타분한 율법의 복음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바울이 비판하고 있는 다른 복음이란 자유주의적인 복음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이 이미 주신 자유를 온갖 규칙을 만들어 제한하는 보수적이고 교조적인 그런 복음이 그리스도의 자유의 복음과는 다른 복음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모든 복잡한 율법조문과 규칙을 다 폐지해 버리시고 딱 두가지로 함축해 버리셨습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고

2.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출석이나 십일조나 헌금이나 봉사나 찬송이나 의를 위한 핍박이나 이 모든 것은 여기에서 자발적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지 그것이 이 두 길을 우선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을 합니다. 갈라디아 5:1을 읽어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자유를 주셨으므로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굳세게 서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구애받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을 듬뿍 받으라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시원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이미 모든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구원도 주셨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 무엇이라 했습니까? 나 바울로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아무런 이익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온갖 규칙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려면 따로 그리스도가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로워 지시기 바랍니다. 자기도 자유로워 지고 남도 자유하게 해주어야 합니다.로마서 8:32에 그리스도가 자유하게 해주셨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정죄하겠느냐는 말씀대로 나도 자유하고 남의 자유도 해치 말아야 합니다. 여러모양, 여러형편을 넓은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용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심을 배워야 합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앞에 허물이 없어야 하고 교인들도 서로 허물이 없어야 합니다.허물이 없다는 것은 남이 하는 행동을 허물로 잡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그다지 큰 허물로 보시지 않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보다 더 엄격하게 그것을 허물로 보는데 문제가 있읍니다. 허물이 없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한데 신뢰와 이해입니다. 이 신뢰와 이해가 기본적으로 있으면 남의 허물을 잡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신뢰와 이해가 한없이 많으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