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도다
본문 : 갈3:1-5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리고자 하는 즐거움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이 누리기를 원하고 또 누리는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식이 잘되는 즐거움, 사업이 번창하는 즐거움, 가정이 평화로운 즐거움 등 여러 가지가 있는 데 그 즐거움의 밑바탕에는 자기 자신을 과시하는 즐거움이 자리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즐거움도 바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례를 받은 선택된 민족이고, 그 중에서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바리새파라는 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면서 그것을 과시하는 즐거움을 가졌던 것이다. 그들은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종교행위까지 모두 자기를 과시하는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아 버렸으며, 자신들의 그런 즐거움을 부정해 버리고, 공격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관계로 등장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인정을 해주고 칭찬을 해줄 때 그 사람을 자기의 친구로 여긴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충고를 할 때 적대관계로 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목적이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세상을 자기의 ㅣ즐거움이나 자기 중심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 또는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앞서 말한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육체로 사는 사람, 또는 육체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기 과시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람이 뭔가를 하면서도 ‘이것을 보고 남들이 뭐라고 할까’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하고, 과시하고 싶어하는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이 일이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느냐 안되느냐’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과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는 본성을 이길 수 없다. 즉 인간은 날 때부터 육체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을 바꿀 수없다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난 후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졌다고 했다.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고 난 후 인간은 육체가 되었다고 했다. 즉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야 할 인간이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애쓰는 존재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것을 극복할 수 없다. 자기를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신경이 쓰이게 된다. 결국 다른 사람보다 잘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상처를 입게 되고 하나님에게까지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한 존재가 등장을 한다. 그자가 노아이다. 그러나 노아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시키신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았다. 하지만 노아가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았던 것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었다. 창6:8절에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한다. 즉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세상을 육체로 살지 않고 성령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육체로 사는 사람이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적인 방법이나 기술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해야 가능한 일이다. 성령이 함께 해야 그 사람이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는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전12:12을 보면 세상에는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과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과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사람은 차이가 있는데,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과시하고 나타내는 즐거움으로 세상을 살기 때문에 십자가를 깨닫지도 못하고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만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모든 선물들을 감사하며 기뻐할 줄 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다.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무시해 버리는 육체로 사는 사람과 달리 어떤 일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감사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본문 1절에서 가라디아 사람들을 향해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책망을 하면서 시작을 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이같이 책망을 하는 이유는 바울을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오직 은혜를 말하는 복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행위를 주장하며 육체를 신뢰하게 하는 다른 복음을 따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서두에서부터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내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한다. 애당초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으로 된 일인데 지금은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 육체의 사람으로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죄는 사람이 육체로 살려고 하는데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육체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도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것은 우리의 육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육체로 살고자 하는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곧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이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결국은 율법의 행위, 즉 육체를 신뢰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즉 성령이 함께한 성령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오직 주님만으로 만족하다가 나중에는 자기의 즐거움을 위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고, 뭔가 자기의 힘과 노력과 행위로 신자의 모습을 증명하기에 애를 쓰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면 그것이 곧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모습인 것이다.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세상과 같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차츰 차츰 세상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하나님께 기쁨을 구하기보다는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좋게 하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 이것이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것이다. 여러분이 교회를 나오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모두 성령이 하신 일이라면 여러분에게서 보여지는 모든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한다. 헌금을 하든 봉사를 하든 모든 것이 자기 과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 만드신 것은 인간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할 일을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자기에게 입혀진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담이 할 일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는 안식이셨던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살아라고 했다. 그 유혹에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때부터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죄인 된 인간은 남이 나를 위해서 살아주기를 바라고, 남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지 내가 남을 위해서 살고, 내가 남을 사랑하는 것에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육체로 사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여러분의 할 일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살아난 노아와 같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으니 암큼 우리가 나타내고 보이고 전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모습이고 사랑이다. 내 즐거움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모든 일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복종하면서 사는 것이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고 성령에 속한 자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령으로 시작된 것을 육체로 마쳐지게 해서는 안된다. 은혜로 시작하였으면 끝까지 은혜로 나아가기 바란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은혜만 믿고 의지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내 즐거움을 앞에 두고 나를 과시하고자 하는 것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입게 되고 많은 짐들을 지고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치 있는 사람은 자기를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보여주고자 하는 소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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