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갈라디아서

[갈2:11]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코이네' 2019. 3. 10. 22:28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본문 : 갈2:11-21

 

 

신자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며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은 지금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얘기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과연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신자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모든 소망이 하나님 나라에 가 있다면 그 신자는 철저하게 십자가에 다스려지는 삶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사람이 현재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지금의 가치 없는 것은 버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신앙의 모습은 분명히 그렇지를 못하다. 뭔가 하나를 버린 삶이 아니라 다른 하나를 지금의 자신의 삶에다 추가시키는 모습에 불과하다. 즉 현재와 미래 모두를 보장받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좋아서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시킨다고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말하는 모습이 비일비재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2천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이 어떻게 해서 오늘의 우리에게도 구원의 효력을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분명 지금의 우리들은 십자가의 사건을 보지도 못했고, 그 피가 지금 우리들에게 흘려진 것도 아니다. 십자가는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는 지금도 여전히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것은 정말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건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십자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면서 살던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십자가의 말은 했지만 그 삶은 십자가와 거리가 먼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사도 바울의 심정은 가슴을 치고 싶을 정도로 답답한 심정을 가지고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게바를 책망했다는 말로 시작된다.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게 된 이유는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던 중에 유대인들이 자기 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봤다. 그러자 게바는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다가 그만 그 자리를 피해 버린다. 그 이유는 혹시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이방인과 함께 음식 먹는 것을 들킨다면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게바가 자기를 피하자 거기에 같이 있던 다른 사람들도 자연히 게바와 함께 자리를 피해 버린다. 바울은 이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애당초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뭔가 복음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게바는 복음대로 하지를 못했다.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결국 복음 앞에서는 하등의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두려워서 복음대로 하지 못하는 그 모습을 바울이 책망하는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면서도 외식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느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십자가 앞에서, 복음 앞에서 모든 외식을 벗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우리들의 신앙의 삶에서도 외식은 얼마든지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기도를 짧게 하든 길게 하든 그것이 십자가와느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남들 앞에서 기도할 때 기도를 좀더 길게 하면서 기도다운 기도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 기도를 통해서 남들에게 자신을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남들의 눈이 두려워서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 많다. 이것이 외식이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결국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것을 붙들고 있는 모습이다. 바로 이러한 것을 바울이 탄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과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 유대인들의 법에는 저촉이 되지만 복음 앞에서는 전혀 거리낄게 없다. 오직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우리가 붙들 것은 복음이다. 그런데도 복음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공격받는 것을 싫어하고, 따돌림당하는 것이 싫어서 복음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의지하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16절에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대로 하면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 외의 것을 붙들어서는 안되고, 내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믿음외의 것을 내세워서도 안되는 것이다. 믿음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로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을 헐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나의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자신 스스로 생각할 때, 구원의 도리를 알고 잇고 십자가를 말하고 오직 믿음만이 나를 구원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수없이 말하면서도 기독교 아닌 것이 얼마든지 있고, 교회를 말하면서도 교회 아닌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피는 말하면서 피는 눈에 보이지 않고 항상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만 관심이 가 있느냐는 것이 사도 바울의 탄식인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귀한 죽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말한다면 모든 관심은 나를 의롭게 하는 십자가를 향해야 하고, 나를 살리는 것이 세상이 아니고 십자가인 것을 안다면 결국 붙들어야 할 것은 십자가이지 세상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붙들려고 애를 쓴다면 그것이 주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신자는 단지 십자가를 말하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서 눈이 띄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를 향해서 눈이 띄어 있는 자는 십자가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 몸을 버리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연히 주님을 향한 삶을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고 헐어버린 것을 우리가 다시 세우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노력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다. ‘네가 십자가의 피를 믿은 증거로 이러 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십자가의 피의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에게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바칠 것은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피를 믿는 내 속에는 이제는 내 욕심과 내 목표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다스리고 내 욕심은 애 안에서 떠나게 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게 해 달라는 그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피를 믿는 신자이며 사도 바울이 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여러분이 주님의 피를 믿는 신자라면 여러분 안에 주님이 살도록 하셔야 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살아 계셔서 오직 주님의 것만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온통 나의 것으로 감싸져 있다. 내 마음은 모두가 내 욕심과 내 소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주님의 소망은 안중에도 없다. 이것이 십자가의 피를 믿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는 이 말을 너무 많이 들어 온 말이고, 당연한 말이고, 잘 알고 있는 말이라고 해서 지나쳐서는 안된다. 이 말을 지나쳐 버리는 자는 스스로를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신에게서 믿음 없는 모습을 하나하나 발견해야 한다. 주님을 믿지 못하고 나를 믿고 있고, 돈을 더 믿고 있는 자신의 불신앙의 모습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피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좀 더 깊이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헐어버리신 것은 결코 다시 세우려고 하지 맙시다. 신자는 다만 십자가를 믿으면 될 뿐이다. 우리의 신앙행위가 의로움을 얻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절대로 잊으면 안된다. 인간은 신앙 행위로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이미 구약이 증거하고 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것이다. 그 피 때문에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서 그 시랑으로 헌금하고 봉사하고 신앙의 행위를 해야 한다. 그럴 때 그 속에서 사랑이 보여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는 죽고 내 안에 새롭게 사시는 주님의 피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귀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