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갈라디아서

[갈1:6] 다른 복음은 없다

'코이네' 2019. 2. 19. 22:35

다른 복음은 없다

갈 1:4-10

 

4절에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함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함뿐 아니라, 이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함입니다. 쉽게 말하면 깊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를 건져내어 올리듯이 우리를 건져내어 살리기 위함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건지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이 악한 세대', this present evil age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입니다. 오늘의 세대는 특별히 상대주의 사조와 다원주의 사조로 인해서 절대 진리를 거부하는 세대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물질과 쾌락을 왕으로 삼고 살아가는 패역한 세대입니다. 왜 이 세대가 악합니까? 세대가 악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에 이 세대가 악해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악하여 남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이 돈만 벌려하기 때문에 무서운 참사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악하여 정치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고 비난을 받습니다. 성도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교회가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악하여 세상은 악의 유혹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악한 세상에서 건진다고 하는 것은 악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데려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를 건져내어 악한 세상에서 복음의 빛을 발하고 소금의 맛을 내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건진다'는 말에는 '회복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회복하는 능력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됩니다.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황태자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갈3:26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둘째는 화목의 관계로 회복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롬5:10절은 말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과 화목된 자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나아길 담력을 얻습니다. 사단의 권세를 파하고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을 뿐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사흘만에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하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확신 가운데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4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셨고, 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11,12절에 보면 이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5절을 봅시다.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언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납니까? 내 뜻대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우리 주님의 뜻대로 살 때입니다. 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뜻대로 일을 저질러 놓고 수습할 수 없으면 '이것은 주님의 뜻이야'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또 주님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지만 지혜가 부족해서, 믿음이 연약해서 결국 사람의 뜻을 좇아 행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해야 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왜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고, 우리를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도 사랑하시는 주님을 위해서 몸을 버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노라"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고전5:19,20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남의 것을 가지고 내 것으로 여기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도적의 마음입니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여기고, 주님 뜻대로 살 때, 주님께서 우리를 보살펴주실 것입니다. 소원을 성취해주실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6-9)

 

6절을 봅시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라디아 성도들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황공주요 황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직분을 받은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 행위나 공로로 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은혜를 따라서 각양 은사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봅니다. "자네가 누군가?" 정말 주님 앞에 부끄럽기가 한이 없습니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교만과 이기심과 정욕과 세상 욕심과 온갖 죄의 소욕으로 가득하여 이 땅에서 좀 좋은 일을 한다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부끄러운 열매를 맺을 자였습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외면 당하여 영원한 지옥형벌로 떨어질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주홍 같은 죄들을 다 그 아들의 피로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황태자로 영접해주셨습니다.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일생을 통하여 섬길 거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필요한 것들을 늘 채워주십니다. 저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너무나 엄청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이 모든 축복을 주셨습니까? 우리가 자랑할만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얼굴이 예뻐서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수동태입니다.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선한 행실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 죄를 속량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직분을 받았고, 우리가 지금 한 자리에 모여 주님을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을 때, 그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면 죽은 자가 살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요, 복음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행20:24절은 말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정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은혜의 복음으로 부르심은, 15절에 보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니까? 16절에 보면,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은혜의 복음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모든 자들에게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이 은혜의 복음을 갈라디아 지방에서 증거할 때 사람들의 무시를 받았습니다. 냉대도 받았습니다. 거짓 전화번호도 받았고, 수 없이 바람도 맞았습니다. 한번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난 후에 옷에 먼지를 털고 다시 그 성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바울을 쓰셔서 마침내 갈라디아 여러 지역에 예수님을 믿고 중생하는 열매들이 맺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후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기들을 구원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았습니다. 여기서 '다른 복음'이란 또 하나님의 다른 복음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왜곡된 복음을 말합니다. 그들은 왜곡된 복음을 좇았습니다. 그것은 행15:1절에 보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바울은 생명을 드려 복음을 전해주어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단 사상에 빠지는 것을 보고 심히 안타깝고 놀랐습니다.

7절에서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바울은 단언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은 하나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순진한 성도들을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하는 것뿐입니다. '요란케 한다'는 것은 '흔들다', '선동하다'는 뜻입니다. 사단이 역사하는 곳에는 항상 말이 많고 잡음이 일어납니다. 바다의 풍랑에 배가 요동하듯이 교회가 요동합니다. 사단은 교회를 요란케 하려고 끊임없이 역사합니다. 이단은 복음을 변질시킵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8,9절을 봅시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변질시켜 전하는 것은 영혼을 실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문제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10)

 

우리 믿는 신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어떤 사람이 올바른 그리스도의 종입니까? 10절을 봅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첫째로,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언제 신앙생활에서 낭패를 당합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할 때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비위를 맞춰보려 할 때 사단이 틈을 탑니다. 하나님에게서보다 사람에게서 기쁨을 얻고자 할 때 시험에 듭니다. 왜 복음을 변질시킵니까? 하나님보다도 사람을 기쁘게 하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값비싼 십자가의 복음을 '값싼 복주머니 복음'으로 전락시킵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 앞에서 살 때, 눈치를 봅니다. 열등감을 갖거나 우월감을 갖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 때, 교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늘 세리처럼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에게서 기쁨을 구하는 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에 기쁨을 쏟아부어 주십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쾌락을 통해서 얻는 그런 순간적인 기쁨과 다릅니다. 이 기쁨은 심령 깊은 곳에 차고 넘치는 기쁨입니다. 고난 중에서도, 환난 중에서도, 누리는 그런 기쁨입니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기쁨입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오직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믿는 자입니다. 본문에 '좋게 하랴?'는 단어 '페이도'에는 '신뢰한다' '의뢰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된 바울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만 의뢰하고 하나님만 믿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실패하는 때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할 때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행5:29절은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중간에 서서 서성거립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아니할 때 세상에서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하고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칼빈이 말한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곳으로만 가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머무는 곳에서 멎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바울은 24절에서 간증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나로 말미암아'란 '나 때문에'란 뜻입니다. 바울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신자들의 생애는 나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애가 되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른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가? 그렇지 않고 나의 불신의 말 불평의 말 때문에 믿언 사람까지도 실족하지는 않았는가? 이것이 우리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형제의 가슴에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가? 나 때문에 형제가 격려를 받고 은혜를 받았는가? 요나 때문에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요나'라는 이름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나를 바다에 던지라' 하므로 바다에 던져졌을 때,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나를 죽이고, 교만과 혈기와 이기심을 은혜의 바다에 던지울 때,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교회는 순탄한 항해를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려고 자기의 단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시키셨습니다. 이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 곧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 부활의 복음만을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