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시편

[시42:1] 고난 중에 부르는 노래

'코이네' 2018. 10. 3. 19:09

고난 중에 부르는 노래

 

시편 42

 

시작하는 말

 

성도가 마음이 즐거울 때 찬양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 그리고 마음이 유쾌할 때 콧노래로 부르는 찬송 가락은 우리의 영혼에 향기로운 향수를 뿌리는 것과도 같이 상쾌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좋은 일은 좋은 일에서만 찬송을 부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우울하고 슬픈 날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찬송을 하는 일입니다.

슬픈 날에, 그리고 우울한 날에 찬송을 불러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밝은 날에 부르는 찬송보다 어두운 날에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을 향하여 훨씬 진지한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곤고함과 낙심 중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의 순간은 호소가 깃들인 찬양을 드리는 순간이요, 마음 깊은 곳 영혼의 골수에서 울어 나오는 기도가 드려지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시편 42편은 바로 고난과 낙심 중에 드려지는 찬양입니다. 이 시는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가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먼저 첫 번째로 시인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신의 모습을 목마른 사슴으로 표현하는 말씀에서 도전을 받고자 합니다.

 

본문 1절에서 노래하기를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구절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을 현대어로 옮겨 번역해 놓은 현대어 성경을 인용합니다.

암사슴이 시원한 시냇물을 애달아 찾듯, 하나님, 이 몸 주님 그리워하기를 그리합니다. 그렇게 애달아 주님을 찾습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목이 말라서 애타게 시냇물을 찾고 있는 한 마리의 사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막을 배회하는 한 마리의 사슴이 연상됩니다. 그는 물을 마시지 못해서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을 정도로 갈급합니다. 눈마저 습기를 잃은 채 붉게 충혈 되어 있습니다. 내뿜는 입김엔 수분이 없어 먼지만 날릴 뿐입니다. 사슴은 물을 찾아 물을 찾아 울부짖습니다. 죽어 가는 사슴은 생명을 간신히 유지하느라 호흡하지만 그것은 호흡한다기 보다는 헐떡이는 모습입니다. 앙상히 드러난 갈비 사이로 들썩이는 뱃가죽만이 호흡을 위하여 마지막 안간힘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슴은 물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합니다. 그는 애타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스스로의 성찰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아주 간절하고 간절하게 주님을 찾고 있는데 나도 과연 이렇게 하나님을 애타게 찾고 사모한 적이 있었는가 하는 성찰입니다. 내 평생에 하나님을 너무나 사모하여 그분의 은혜를 목마른 사슴처럼 울부짖으면서 찾은 적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하는 질문은 스스로에게 한번쯤 던져볼만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는 단순하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은 사실을 접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면 그들은 한결 같이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임의 은혜를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간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배우는 것은 그들은 몹시도 간절하고도 애타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사모하면서 세상을 살다가 갔다는 사실입니다누가 은혜를 받고 누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바로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성도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바로 발달된 물질문명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예전에 문제를 하나님 앞에 들고가던 것을 이제는 과학 앞으로 가져갑니다. 과학 만능 주의는 어느새 하나님을 밀어내고 과학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신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정신을 버리고 인간의 지혜나 물질 , 곧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 역시 하나님을 의지하던 일을 버리고 이재 재물의 힘을 빌어 만사를 순조롭게 해보려는 불신 풍조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애타게 구하지 않게 된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 지향적인 신앙 형태 때문일 것입니다.

 

성도들은 흔히 모여서 이야기를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 내용의 시제가 과거형이 많다고 생각합니까, 현재형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미래지향적인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알건대 과거형이 훨씬 많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흔히 내가 옛날에 얼마나 엄청나게 기도했고 과거에 얼마나 엄청나게 전도했으며 옛날에 내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사모했는가를 무슨 무용담처럼 신나게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내가 지금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적습니다.

앞으로 주님을 위해서 내가 어떤 충성의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미래에 대한 말도 적습니다. 이렇게 내 지나간 과거의 무용담을 많이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현재는 그만큼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굉장했었다는 이야기는 지금은 그 굉장함과 열심을 모두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는 말과 동일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현재에 열심을 잃은 사람일 수록 과거 속으로 숨어들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현재에 불충하다는 갈등을 과거를 회상함으로 해소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에겐 과거도 없다 미래도 없다 오로지 현재뿐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겐 현재만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사는 것도 아니고 미래를 사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단지 현재에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가장 좋으신 성도는 현재에 열심히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도 결국 과거형 신자보다는 현재형 성도가 많아야 활력 있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거에 잘했다와 현재에 잘하고 있다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과거에 난 못했다 그래서 현재도 못한다 따라서 미래도 못할 것이다.이러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여러분, 현재에 열심 있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건강이 없어 과거 보다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드셔셔 과거보다 열심을 내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힘도 있고 건강도 있고 나이도 있고 재물도 있는데 못하고 계신 분들은 하나님께 어떤 핑계를 대시겠습니까?

 

저는 바라기를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현재의 시간에 목마른 사슴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찾고 찾으며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흠모하는 자가 하나님의 도움을 입습니다. 은혜를 애타게 찾는 자는 그의 충성도 간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까? 우리가 만나는 심각한 위기, 그 위기의 정도에 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 은혜를 기대하는 그 마음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잠언 817절은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이여 나는 목마른 사슴입니다. 당신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기도원에 가면 산 이곳 저곳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기 저기 목마른 사슴들이 은혜의 물을 찾아 울부짓고 있으며 또 여러분 중에도 그런한 경험이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에 목말라 있습니까? 어떤 이는 물질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간구를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물질에 목말라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은사를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은사를 구하는 마음의 배경에는 명예심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값싼 명예심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병을 고치는 기도에 매달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가 다 잘못된 기도라는 것은 아니지만 건강을 구하는 그 심리 배후에 보다 안락한 인생살이를 꾀하는 정신이 숨어 있다면 그는 육신적인 것에 목말라 있다고도 봄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시인은 목마른 사슴이 되어 오로지 하나님 자신을 찾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의 생사 화복이 주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의식합니다. 사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오는 것이지만 원초적으로는 하나님 사랑의 결핍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시인은 원수들로부터 압제와 멸시를 받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원수들의 압제를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헤어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생의 문제 자체보다는 하나님 자신을 구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울꼬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생의 문제를 당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잠시 모든 문제와 상황을 떠나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와 찬양을 드려야 함이 옳습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있게 하다가도 없게 하시며 없게 하다가도 있게 하시며 하루아침에 나를 높이 두시다 가도 낮이 두시며 기쁨을 주시다가도 슬픔을 주시며 절망을 주시다가도 희망을 주십니다. 모든 열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모든 생의 문제의 해답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원하고 하나님을 알기를 소망하시고 하나님과 만나는 그 순간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시 속에서 사람이 침체와 절망에 빠지는 이유와 그 침체를 벗어나는 방법을 그 교훈으로 찾고자 합니다.

 

시편 42편에는 인칭 대명사가 51개가 등장합니다. 시인은 여기서 라는 말을 주격으로 14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이라는 목적격으로 일인칭 대명사를 16번 사용하고 있고 나의라는 소유격으로 21번 사용하고 있어서 이렇게 도합 나라는 말을 51번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말은 20, 그리고 여호와라는 말은 1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 길지 않는 본문에서 나라는 인칭 대명사가 51번이나 사용되고 있음을 보는데 이것은 좀 지나치게 많은 숫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암시합니까?

그것은 시인이 강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자시 자신만을 바라보았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이 시인은 몹시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지향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그가 1절에 애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을 두고 있었지만 중반에서 와서는 차차 그 용기가 사라지고 자기 자신만 바라보게 됨을 봅니다. 이처럼 한 인격에서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모함과 자기 자신의 연약을 바라보고 침체에 빠지는 나약한 심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보면 매우 재미있습니다. 결국 잘하다가도 금방 침체에 빠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 친구는 누군가가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도 그는 자신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불행해야 만 하는 것입니다.

(예화:나르시즘-자기를 몹시 사랑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몹시 연모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자아의식이 강한 사람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나 진리보다는 자신의 감정이나 자기의 주장으로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더 나아가서는 선악의 판별마저 자기 자신을 척도로 삼습니다. 자기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선인이고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악인이다. 그러한 주관적인 의식이 그런 사람에게 가능합니다. 이렇게 모든 삶의 중심이나 가치 판단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사람은 침체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라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며 인간은 반드시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언제나 실수가 가능한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자기를 척도로 두고 있는 사람은 결국 자기의 실수에 의하여 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시인도 자기 자신의 연민에 사로잡혀 침체에 빠지는 과정을 우리가 엿보게 됩니다. 그는 해마다 절기를 지켜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던 일을 기억하며 가지 못함을 슬퍼하였습니다. 그의 감정은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음식 대신 눈물을 먹고 있었습니다. 대적들은 조롱하고 있었으며 아무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자기 연민의 늪에 빠지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뵈울꼬?”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왜 슬프게 다니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는데서 떠나 자기 자신의 슬픔과 연약성에 잠기고 맙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데 너무 바빠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 위에서의 승리가 이스라엘의 신앙을 부흥시키는 첫출발이 될 줄로 기대했다가 그렇게 되지 못하고 이세벨에게 쫓길 때 나는 내 열조보다 못하나이다라고 절규하며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하며 침체했듯이 시인도 여기서 지금 그러한 과정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바라보는 것은 위험합니다. 내 자신의 연약함, 내 가정 환경의 불우함,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데서 오는 상대적인 빈곤, 자기 무능력에 대한 지나친 집착, 이런 것들은 바로 신앙의 침체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나는 왜 이럴까? 이렇게 한번만 생각하고 내가 연약하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리라.“”고 생각하고 다시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지나치게 자기의 연약함에 몰두하는 것은 자신감과 진취적인 용기를 갉아먹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자기의 연약과 약점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연약도 무능력도 다 하나님께 맡기시고 그분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너무 슬프게 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사람의 기도를 들어보면 주여 저는 벌레이오며 구더기같이 천하여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옵니다. 하나님도 나에 대하여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까 봐 두렵습니다만 사실 나는 무능력한 사람입니다. 오 주여 나는 지렁이 같이 약하고 먼지와 같은 존재이오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런 식의 기도로 일관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줄 아십니까? “, 내가 구더기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보냈고 지렁이를 위해서 십자가에 나의 아들을 못 박히게 하였느냐?” 내가 구더기의 아비이냐? 라고 화를 내실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부르는 찬송도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가스펠 송은 너무 염세적입니다. 슬프고 비참하게 불러야 찬송인 줄 압니다. 슬프고 비참한 곡조로 부르니 그 영혼이 슬프고 비참한 침체에 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확신컨대 성도는 슬퍼하나 계속 슬퍼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고 가슴 아파하나 자기 가슴을 칼로 찔러서는 안되며 자기 무능력을 고백하되 비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지만 이제는 용서받은 죄인이고 하나님 전능하신 왕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연민과 스스로의 한탄에 빠지셨다면 지금 그 늪에서 나오시길 바랍니다. 자기라는 감옥에서 은혜의 창문을 열고 나를 향해 밝은 소망의 햇빛을 비춰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시의 종반 부에 가서 시인은 다시 자기 냉정을 찾습니다.

그는 5절에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그는 드디어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11절에서 다시 이 구절이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 로다.”

(예화: 찰스 스퍼젼)-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생깁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는 목마른 사슴으로 회복됩니다. 더 나아가 이제 그는 침체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고난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찾아 드디어 천국의 노래를 부룰 수 있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결국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며 마음의 용기와 위로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현재에 구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도 자기 연민과 슬픔의 자아에 빠지시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자기 영혼에 스스로 타이르고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 용기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찬송이 좋은 날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드려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힘주심으로 여러분이 고난 속에서 부르는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