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시편

[시9:1] 하나님을 그 중심에 모신 사람의 고백

'코이네' 2018. 1. 24. 18:44

하나님을 그 중심에 모신 사람의 고백

시 9:1-12

 


요즘은 머리는 똑똑하나 심령이 약한 사람들은 살기가 어려운 때입니다. 심령이 약하나 둔하여 외부의 변화에 대하여 별로 민가하지 못한 사람은 그런대로 모르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심령이 약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정치적 긴장과 경제적 불안 요인과 사회적 변화를 모두 감당하기에 힘이 들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1:18)고 한 전도자의 말씀이 바로 이 경우를 두고 하는 것 같습니다.
자연 환경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조용히 그물을 던져서 고기나 잡고 그 잡은 것을 찌개로 만들어 소박하게 먹고 살던 어촌에 이제는 어느덧 현대식 제방이 쌓여지고 곳곳에 음식점들이 들어서는가 하면, 한가한 구석에 소음 공해란 모르고 살던 때가 어제같은데 어느덧 주위에 도로가 생기고 고층 아파트가 하늘을 찌를듯 치솟고, 승용차와 대형 버스들이 집 앞을 정신없이 달리게 되니, 이럴때 마음이 약한 자는 그 변화에 적응하여 살기가 힘이 들게 됩니다.


아마도 이런 변화에 대한 저항감은 인간 속에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염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진리, 변하지 않는 사랑, 변하지 않는 기준, 변하지 않는 가치관을 본능적으로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넣어 주셨다고 이렇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변화없는 세계, 확고한 곳)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
과거 어느 때보다 현대는 확고부동하고,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런 대상을 누구로 정하는가 뿐이지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성에 대해, 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9:1-12절은 바로 여호와를 자신의 지주로 택한 자의 찬양입니다. 그의 믿음의 눈에는 여호와가 확고부동한 분으로서 나타났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연인의 마음이 변하고, 사랑의 철학이 변해도 그분만은 변하지 않고, 일관성을 갖고 우리를 대해 주시는 분으로서 그는 보았습니다. 여호와가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음”(7절)을 그는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전생애를 의탁할 만한 대상을 찾지 못했다면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변함없이 확고부동한 그분에게 우리 자신들을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즐거울 때에도, 성공했을 때에도 우리는 그분께 자신을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 성공의 흥분 때문에 자기 파괴의 쓴잔을 마시지 않게 말입니다. 아플 때에도 맡길 수 있습니다. 그분의 약속, 곧 나를 그분의 영원한 나라로 데려갈 것이라는 불변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중병에 걸렸을 때에도 그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의 평안이 우리 마음 속 깊이 우리를 주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체념으로부터 오는 자포자기의 마음이 아니라, 최종적인 승리가 진리와 함께 내게 있다는 긴 안목에서부터 오는 소망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 맡긴 자들은 시편 기자의 체험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시편 기자처럼 외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시다(9:1,2).
● 하나님은 우리의 통치자이시다(9:3-8).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다(9:9-12).

 

가.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찬양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는 ‘주의 기사’, 곧 주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찬양할 수 있으며, 그 다음은 ‘주의 인격’ 그 자체에 대하여 찬양할 수 있습니다.

 

1.주의 모든 기사 때문에 찬양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1절).
주께서 행하신 일 중 가장 우리에게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구속의 역사입니다. 시편 106편을 읽어 보아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시편 기자는 구속 이외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여호와의 기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사는 크게는 천지창조와 출애굽 사건과 아브라함의 선택과 요셉의 인도하심에도 나타난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개인의 경우를 뒤돌아볼 때에도 하나님께서 모퉁이모퉁이마다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지금도 모든 일에 간섭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붙들어 주고 계십니다. 이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에 대하여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2.주의 인격 때문에 찬양합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2절).
카일과 데일취의 두 주석가는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주님의 성품의 일면에 나타내주는 이름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주님의 높으심에 대하여 노라움을 금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이 이와 같이 높으시고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신데도 불구하고 우리와 교제하시며 우리와 함께 역사하심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붙들고 계신 분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시편 기자가 알았을 때 그는 기쁨이 용솟음쳐서 여호와를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주님의 성품들을 더 깊이 깨닫게 되고, 또한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반응은 찬양과 경배뿐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영국의 찰스 웨슬레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내 주의 귀한 이름이 날 위로하시고
 이 귀에 음악 같으니 참 희락되도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기사를 경험하고 크신 인격에 첩하게 될 때에 그 사람은 더 이상 예전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찬송과 경배를 드릴 수박에 없는 그분 때문에 새로운 소망과 기쁨과 사랑으로 넘치게 됩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시편기자와 같이 주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더욱더 찬송과 경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신앙은 인본주의적인 도덕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신본주의적인 기적적 차원도 소유하게 되어 명실공히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하나님은 우리의 통치자이시다(9:3-8).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의 대상이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통치자이시기도 하다. 통치자에게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통치할 수 있는 능력과 범법했을 때 다스릴 수 있는 재판권입니다. 통치하는데 필요한 능력은 내부의 소요와 외부의 침입을 모두 막을 수 있을 정도의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3절).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5,6절).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있는 나라는 절대로 전쟁에 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 수표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눈 앞에 있는 것도 모르고 내일 일도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향한 뜻이 있으시고 그 뜻에 따라서 모든 것을 이행하시므로 어떤 때에는 믿는 백성들도 전쟁에서 죽기도 하고 참패도 하는 경우가 없지 얂습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악의 세력이 끝까지 승리하는 경우도 없었고, 로마 통치하에 있던 예루살렘이 그랬고, 앗수르, 바벨론 등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모두 잠시 이기는 것 같았지만 결국 하나님의 거대한 뜻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하지 못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로 이 세상을 다스릴 능력이 있으시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였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시9:7,8)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한 나라를 보호하시기도 하며, 다른 나라들을 패망시키기도 하신다는 점입니다.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에 다윗의 적들을 물리치시고 다윗의 위를 견고케 하셨듯이 지금도 한 나라가 존속하고 패망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다니엘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단4:17).
그렇습니다. 어느날 우리는 개인과 개인, 사회와 사회 사이에만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공의가 이루어질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유예 기간이므로 초강대국들이 연약한 나라들을 탄압해도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기를 보류하십니다. 이는 그들도 회개하고 나오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르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그러나 지금 당장은 어떠합니까? 지금도 이 말씀은 유효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기 때문에 존속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위하여 승리를 주시고 적을 물리치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지금도 보호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뿐이지 지금도 아버지께서 살아서 이 세계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1.하나님은 우리에게 공의를 베푸실 의지를 갖고 통치하십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4절상). “공의롤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8절).
최종적인 공의는 아직도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순간, 아니 그 전에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계시하심으로써 공의를 계속 베풀어 오셨습니다. 우리가 단편적으로 사건들을 볼 때에는 하나님께서 공의를 베푸신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가령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무참히 죽인 사건이라든지,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라든가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등을 볼 때에는 공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2,000년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이들 박해자들로 인한 그리스도인들의 순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엄청난 역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독재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었거나 아니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또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하신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그런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도 공의를 이루려는 의지를 갖고 세상 각 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2.하나님은 우리의 재판장으로 통치하십니다.


요즘은 신성시되어 오던 사법계도 믿을 수 없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소위 ‘범죄자를 위한 변호사’들이 돈에 의해 매수되어 범인들을 법망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함으로써 범인들이 범행 후에도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은 그런 범죄자들을 위한 변호가 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재판관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또 변호사도 주님이십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4절). 이런 재판은 잘못될 수 가 없습니다. 의인을 위하여서는 변호사의 역활을 주께서 친히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에게 “여호와께서 영영히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7절)라는 말씀과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8절상) 라는 말씀은 소망의 말씀이요 기쁨과 안도감을 주는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우리의 죄의 댓가를 치르신 분이 우리의 변호사이시며,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의 재판관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히 그 재판에 응할 수 있습니다(요일2:1, 2, 롬8:32, 33, 요일4:18)


반면에 불의한 자는 이 재판을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뇌물도 여기에서 만은 통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돈으로, 권력으로 매수하던 자들이 처음으로 공정한 재판을 받게 되니 말입니다. 이들이 형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통쾌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도덕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확신 때문에 오는 통쾌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인간이기 떼문에 실망하고 좌절되어 우리들 마음대로 살 수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세계와 이를 위한 공의로운 심판과 심판주와 변호사기 있기 때문에 의인들의 마음에는 지금 이 불의한 세상에서라도 의로운 삶을 살고 싶은 의욕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져서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을 때까지 위 마음 속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속에서나마, 그리고 우리가 있는 주위에서나마 이를 누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다.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다(9:9-12)
하나님을 자신의 지주로 삼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찬송의 대상과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실 뿐만 아니라 환난날에 피할 수 있는 피난처도 되십니다.

 


 

 

1. 피할 곳


옛날에는 그래도 방공호가 효력이 있었습니다. B-29전투기들이 그렇게 많은 폭격을 가했어도 방공호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켰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좀 다릅니다. 방공호를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와, 파괴가 되지 않아도 오염으로 우리를 죽일 수 있는 방사성 물질과 , 세균 폭탄들이 너무 많아 그 어디도 안전한 피난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시간과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 진리는 “여호와 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9절)라는 것입니다. 여호아는 아직도 안전한 피난처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가 압제를 당하는 사람이나 환난을 당하는 자에게 산성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난공불락과 같은 맛사다가 있습니다. 로마군이들이 이 성을 포위하고 갖가지 수단을 다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다가 유대인들로 통성을 쌍하 올리게 꾀를 로마 장군이 짜내었습니다. 차마 동족들을 살해하지 못하고 방관하다가 드디어 함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맛사다와 는 다르십니다. 여호와는 세계가 갖고 있는 모든 과학의 힘으로도 정복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피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고 잠언 기자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18:10).
지금이야말로 여호와께 피할 때입니다. 누구든지 혼들리며 불안하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안전한 여호와께 나오십시오. 여호와께만이 안전합니다.

 

2. 구할 분


여호와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보호해주실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우리가 부르짖을 때 호응하시는 분임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다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10-12). 주께서는 피흘리게 함을 심문하시며 가난하여 세상 사람이 무시하는 사람들의 간구까지 들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산성되시는 여호와께 피할 뿐만 아니라 여호아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여호아께서는 우리를 안전케 하시며,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결론


이 시편은 다윗이 시리아와 암몬 연합군을 쳐부순 후, 아니면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이긴 후에 쓴 것일 것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은 어떻든 이 시편이 주는 진리는 하나님의 게시입니다. 현대적인 많은 적들 사이에 살고 있어 흔들리고 불안해 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편 내용은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by 코이네설교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