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시편

[시6:1] 하나님의 징계와 긍휼

'코이네' 2017. 12. 27. 16:11


하나님의 징계와 긍휼

시 6:1-10

 


시편 6편은 7개의 고해시(단문 표시)중에서 첫번째 것입니다. 오리겐(Origen)때부터 시편 6, 32, 38, 51, 102, 130, 143편을 고난 기간 중에 사용했고 이들을 고해시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시편 6편 1-7절까지 주로 하나님 앞에서 깊이 통회하는 내용들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특별한 제목을 가지고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공의대로 자신을 심판하지 말아 달라는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8절부터는 통회하는 마음이 변하여 믿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은 특별한 죄의 내용이나 사건들이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 배경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시편은 고해시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필경 어떤 시편 기자는 커다란 역경을 당하게 되었고, 그는 그 역경을 하나님의 징계로 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통회하였을 것입니다. 통회하는 중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혜의 손길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8-10절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우리는 읽게 됩니다.

 

요즈음은 너무 인본주의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나는 신음소리가 차츰차츰 교회에서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만족이 있는가 또는 없는가가 중요하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때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침해되었기 때문에 무서움에 떨고 몸부림치는 것은 비현대적 개념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조류는 성경에 기록된 예들과 거리가 먼 것이고 결코 건전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사사시대에 대하여 성경이 기록하고 있듯이 현대에도 참된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해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등 구약시대 선지자들은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들을 생각하는가에 대하여 너무나 민감하였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에도 깔벵, 루터, 웨슬레 형제 등 우리 앞서간 분들은 하나님 앞에 떨며 하나님의 뜻을 한없이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기독교가 알아지면 알아질수록 참된 징계는 희귀하게 나타납니다. 에디슨 쉐퍼(그린시스 쉐퍼의 부인, 82년 시카고 근교 초청 집회시)는 이런 현상을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절연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분석하고, 다시 한번 우리가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때 반드시 기쁘고 행복하게만 느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면 죄가 죄로 드러나고 불의가 불의로 나타나고 징계가 필요한 곳에 징계가 나타나는데, 어찌 시편 기자와 같은 외침이 없겠는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찢으시면 우리는 비록 그것이 일시적으로 아프더라도, 일시적으로는 우리가 통회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에게 궁극적인 유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하나님 앞에 더욱더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를 받고, 시편 기자처럼 주께서 마음에 흡족하게 역사하여 확신을 주실 때까지 애통한 마음으로 울부짖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잘못을 범하지 않았어도 깊은 정죄 의식을 느끼며, 마치 하늘이 온통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으로 가득찬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 중 다수가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주지도 않는데 우리가 마치 징계를 받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를 우리는 대략 네 가지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완전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대하여 한없이 사랑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자라오는 과정 가운데 완전주의적인 성격이 형성되어 내가 하는 일을 무조건 검은 안경알 너머로 보는 것이 바로 이 경우입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자존감이 아주 낮은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한없이 들볶습니다. 그리고 너무 자주 자신이 비참하게 느끼도록 정죄합니다. 이런 사람은 대개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를 징게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실상은 자기가 자기를 징게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같이 만드는 경우입니다. 서로 잘 믿어 보자는 의도는 좋겠으나, 신자와 신자 사이에 사람이 만든 기준을 놓고 서로 판단함으로써 비참한 마음을 갖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이런 사람들보다 너그럽고 사랑이 크십니다.

 

셋째는, 거짓말의 창시자인 마귀가 마치 우리가 어떤 커다란 죄(혹은 작은 죄)를 범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를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요한 사도는 현재 우리를 참소하는 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마지막 때 쫓겨날 마귀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게12:10하), 이런 마귀의 참소는 우리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있는 것같이 느끼게 합니다.

 

넷째로, 우리가 우울증과 같은 질병으로 고생하는 경우입니다. 우울증의 원인은 너무 다양하여 전문의의 치료를 받지 않고서는 안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울증은 종종 죄와 상관없이 나타납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아주 멀리 계신다고 느끼거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징계하고 있다고 느끼기가 쉽습니다. 이런 증세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목회자나 교인들은 이를 단순히 그가 범죄했기 때문에 느끼는 증세로 일률적으로 단정하기 쉽습니다.
이상과 같은 경우 대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보혈의 능력에 대하여 더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경우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시편 기자가 사소한 것을 가지고 이렇게 느낀 것이 아닌 듯 싶습니다. 그는 양심에 깊이 찔리는 것이 있어서 이 시편을 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병의 원인이 최소한도 그에게는 분명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불만족을 표명한 징계의 수단으로 병이 나타났음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처럼 우리를 징계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징계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필경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8). 우리가 징계를 받을 때에 최소한도 다음 두 가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심한 두려움과 연약함(6:1-3)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2절),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3절상). 이는 모두 시편 기자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씀들로 온 인격이 연약하고 두려움이 싸여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하나님을 친구처럼 너무 가볍게 대합니다. 우리나라 교인들은 그래도 서양사람들에 비하여 이런 면에서는 앞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갈 대마다 경건하게 기도하고 하나님께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표명합니다. 그러나 종종 서양사람들 중에는 마음만 성실하면 태도야 어떻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누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친구처럼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징계도 가법게 넘겨 버릴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경우 이와는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느낀 그는 심히 연약하고 두려웠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만 아니라, 동시에 거룩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옳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진노로 다스릴 것이 두려웠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진노만큼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받은 핍박보다 휠씬 무서울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국가가 주는 형벌은 두려워할 줄 알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진노로 다스리는 것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위험한 일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교회가 잘못하는 것과 사회가 잘못하는 것과, 정치인들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 마치 자신이 하나님께 잘못하여 징계받는 것처럼 알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게서 진노 대신 긍휼을 베푸실 때까지 매달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호소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서 고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데서부터 오는 슬픔(6:5-7)

 

프론이라는 주석가는 구약시대의 사망 또는 음부에 대한 개념은 아직 신약시대처럼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이때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확신을 가지고 외친  것처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1:23)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사망과 음부는 산 자들로부터 단절되고, 다시 돌아올 수 없고, 어둡고, 어렵고, 무기력하고,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석가 앤더슨은 구약은 이곳을, 구원의 손길이 없고 주님께 경배드릴 수 없는 곳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 곳으로 종종 묘사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사실은 비록 구약의 저자들이 사후의 세계에 대하여 신약시대 사람들만큼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부활의 개념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시16:10, 17:15, 행26:19, 단12:1-3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자신이 받은 징계로 말미암아, 사망, 곧 음부에 내려갈 때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감사가 없을 것에 대하여 심히 슬퍼했습니다.

 

죽음 때문이든, 아니면 사는 동안 경험하는 것이든 그 원인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으면서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그날 그날을 사는 것은 필경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생명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던 사람이 징계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될 때 처음부터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보다 더 비참해질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런 심정을 이렇게 표명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며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이런 때에는 스스로 자신을 도울 수 없으며, 좋은 충고도 효력이 없습니다. 기도도 메마르고, 기쁨은 물론 찾아 보기 힘듭니다. 설상가상으로 시편 기자의 경우처럼 그 대적으로부터 오는 고통까지 받게 될 경우는 절망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범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노로 다스리려고 하실 때에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역설적인 말 같지만 그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오히려 아무런 근심없이 범죄하며 사는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무감각한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를 끝내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데도 이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 두려워 하나님 앞에 애통하고 심히 두려워하는 자들은 시편 기자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긍휼’(2절)과 ‘인자’(4절)를 받을 수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거룩한 하나님의 탐조등(조명등)이 우리의 양심을 샅샅이 비추일 때 우리가 하나님께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 온 선행도, 하나님을 위해 한 봉사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물질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이때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진정으로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과 사람에게 정죄를 받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파괴시킬 목적으로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런 공격은 우리가 보혈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물리치시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징계는 그 동기가 구속적인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그처럼 아프고, 두렵고, 떨리다가도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용서하셨다는 확신이 생기면 갑작스러운 변화가 오게 됩니다.

 

첫째는, 더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8,9절)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의 죄를 용서하셨고, 하나님의 징계가 끝났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한 사람은 더이상 연약한 마음과 두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동안에는 그렇게 어둡게만 보이던 것들이 갑자기 환하게 보이게 됩니다.

 

둘째로, 승리에 대한 획신이 생깁니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10절). 이 경우 실제로 원수들이 가까이 있었는지, 혹은 심리적으로 그렇게 느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 주셨고 원수를 물리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사람들은 시편 기자가 살던 때나 지금이나, 어느 때이든 결코 그것을 즐겁게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의 허물이 드러나고 거룩한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를 받게 되어 일시적으로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며 결국은 통회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징계를 받을 것이 나타나지 않게 되고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시적으로 쾌락을 누리며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징계를 받는 것은 마치 고난을 받는 것처럼 받는 사람들이 올바른 자세로 하나님을 대할 때 커다란 도약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10년, 20년 동안 아무런 징계도 없고 아무런 고난도 없는 때보다 이런 때 더욱 크게 자랄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시편 6편에 나오는 것과 같은 신음을 더욱더 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교역자도, 평신도도, 누구든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의 매를 맞고 우리가 싸맴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더 큰 위혐에서 건짐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이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6:1-3).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