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시편

[시5:1] 심령의 호소를 들으시는 하나님

'코이네' 2017. 12. 20. 22:57

 

심령의 호소를 들으시는 하나님

 

5:1-12 예배의 부름(10:19-20,22)

 

 

현대인들이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을 만나는 것입니다. 휼륭한 부부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배우자가 곧 그 대화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또 아내는 남편에게 그날의 좋았던 일, 궃었던 일, 가슴을 베는 듯한 아픔을 느꼈던 일들을 자유롭게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부라면 어떠한 어려운 강이라도 건널 수 있는 저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부는 선교지에 나가게 되어도 타문화권의 압력을 이겨 낼 수 있는 가능성이 큽니다. 직장에서 원통한 일을 당하더라도 집에 돌아와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그 마음을 털어놓게 되면 새로운 각도에서 문제를 볼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대화의 대상은 비단 부부간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형제 자매들간에, 상담자와 내담자간에, 교수와 학생간에, 또 나아가서는 교역자와 교인들간에도 가능합니다. 특히 급속도로 산업화 되어 가며 주위 환경이 나날이 그 모습을 달리하는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딘가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아도 비난을 받지 않고 치유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많은 경우 이런 역활을 교회나 선교 단체의 교제권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갈 때 때로는 심령의 상처가 너무 커서 사람의 위로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는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서 경험하는 따뜻한 이해와 위로와 격려만으로서는 우리 심령의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어떠한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 나의 나의 하나님께 호소를 합니다(5:1-3)

 

본문에 나오는 시편 기자도 아마 인간의 위로만 가지고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시편 기자가 얼마나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는가 대강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부르짓는 소리등이 바로 시편 기자의 마음 상태를 우리에게 알려 주는 힌트가 되고 있습니다. 성서 공회의 성경에서 심사라고 한 말을 새 영국 번역에서는 나의 가장 깊은 생각이라고 번역했고, 예루살렘은 나의 슬픔이라고 각각 번역했습니다. 주석가 키드너는 이 부분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처음에는 겨우 들릴락 말락하는 독백처럼 보였다. 그러나 속에서만 있고 겉으로는 들릴락말락하던 소리가 도움을 구하여 울부짖는 소리로 나타나고, 마침내 응답을 기대하는 명확한 기도로 구사되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그의 그의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5:1,2).

누구든지 이처럼 깊은 대화를 하나님과 나누게 될 때 사람의 위로를 통하여 풀리지 않던 문제까지도 해결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이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 속에 아무리 큰 상처가 있더라도 하나님께 이처럼 심령을 털어놓고 아륄 때에 우리 마음이 치유를 받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는 근3년 동안 동고동락하셨고, 얼마 안있어 주님의 모든 사역을 그들에게 위임해야 하는 마당이었으나, 그들과 대화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 심령의 짐들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그후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용기있게 죽으실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미처 도와 주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오늘날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처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수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반드시 호응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단말마(불교: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 같은 고통이 엄습해 올 때나, 깊은 교제의 대상이 필요할 때나, 아침마다 세상의 소용들이 속에 다시 뛰어들기 전에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우리 속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눔으로써 하나님께 주시는 위로와 치료를 경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힘도 얻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공의앞에 호소함(5:4-6, 9-19)

 

얼핏 보기에는 우리 심령의 상황과 하나님의 공의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실상은 우리 마음의 상황과 공의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공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불의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낄 때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이는

첫째로 인간속에는 공의에 대한 깊은 염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창조된 인간이 비록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공의에 대한 동경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부당하게 손해를 보았다는 원통함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깎이었든, 물질적인 손해를 보았든, 인격적인 모독을 당했든,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심령이 상하게 되기가 일쑤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거짓말’(6)과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독한말’(9)때문에 심령이 상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자신의 심령을 호소할 때 하나님의 깊은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공의를 사랑하시고 공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어떤 희생이라도 치르실 결의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의중을 보는 순간, 아마도 그의 심령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마음도 제 마음과 같군요, 불의를 싫어하시고 곧 불의를 멸하실 것이군요, 그렇다면 제가 당하고 있는 이 불의도 하나님께서 친히 보응하시겠군요. 괜찮습. 그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중만 분명히 알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불의를 알고 계시며, 모든 불의를 증오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작은 악도 미워하십니다. 그리고 커다란 악도 미워하십니다. 그리고 커다란 약도 미워하십니다. ‘거짓말로부터 시작하여 피흘림까지도 미워하십니다. 이런 악에 대하여 현세상에서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주의 날에도 최종적으로 형벌을 하실 것입니다.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9)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형벌이 내려질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있다는 사실을 안 우리는 더이상 상한 마음을 갖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도 시편 기자와 같이 담대하게 이렇게 호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10).

이런 호소는 불의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갖고 있는 개인이 원수를 갚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즉 개인적인 욕심에 입각한 호소가 아니라, 이는 공으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곧 와서 모든 불의가 소멸되고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기를 구하는 호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에 이런 날이 올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시간 문제입니다. 따라서 불의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한 사람들도 더 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날 우리는 이사야가 노래한 대로 노래만 하지 않고 직접 그 노래 내용처럼 경험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며는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며는 사막이 낙원되리라

독사굴에 어린아가 손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호소(5:7,8)

 

우리에게 불법을 행하는 원수라 할지라도 우리의 원대로 처리하면 위험합니다. 우리의 뜻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할 때 우리도 불법을 향할 수 있는 위험을 안게 됩니다. 다해히도 하나님께 호소를 드리는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자세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악인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주의 집에서 경험하게 되면 우리에게 최소한 두 가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고 그 결과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하여 경배”(7)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석가 앤더슨은 이 부분을 원어 그대로 해석하면 나는 당신 앞에 완전히 엎드려겠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그 경배의 뜻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경배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8).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깊은 확신이 있을 뿐만 아니라, 원수들을 대하는 데도 하나님의 뜻을 좇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따라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라도 나의 원대로 하기보다는 주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고,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게 됩니다.

 

이런 삶을 산 것은 비단 다윗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사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즉시 책망하는 것이라면 즉시 채찍을 만들어 쫓아내고, 만일 아버지의 뜻이 오른쪽 빰을 때리는 자에게 왼쪽 빰까지 내어주는 것이라면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불의한 자들의 손에 의해 아무런 불평없이 죽임을 당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을 불법으로 고소하여 가둔 동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용서와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 다음 끝까지 이들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위해 절규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을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

오늘날도 우리 마음에 여러 가지 호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호소들을 처리하는 것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목회자와 성도들, 성도와 성도, 집사와 집사, 남편과 아내,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 때문에 있는 우리의 호소도 말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우리의 모든 싸움이 우리의 정욕(쾌락)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호소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욕대로 하는 것일 때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를 듣지 않으십니다(4:3),

둘째로 우리의 아버지의 뜻을 이 세상에서 이루는 도구로서의 특권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우리의 호소(5:9,10)

 

누구든지 어려운 문제를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호소할 때 호소하자마자 모든 어려움의 안개가 벗겨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참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저 사람은 제게 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지금 즉시 그에게 벌을 내려 주옵소서라고 말씀드릴 때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벌하신다고 가정해 봅시다. 또 우리가 주님께 구할 때마다 그 즉시 필요한 돈을 채워 주신다고 가정해 봅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무모한 호소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고,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없이 쓰여질 가능성이 있는가 생각하여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소에 대하여 응답해 주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문제를 볼 수 있도록 여유를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격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숙하게 해 주시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무한정 우리의 호소를 청취만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은혜로 호응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을 체험하고 돌번하여 확신에 가득찬 태도로써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희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11,12)

 

종종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호소를 듣고 계시다는 확신만 있어도 시편 기자처럼 큰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건제하시며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며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어려움도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면서도 이를 허용하신다면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는 다 이해되지 않지만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주에게 피하는 자’.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 ‘의인이 라고 한 말은 모두 하나님과 우리가 갖는 관계의 정도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이와같은 관계를 갖고 하나님께 호소할 때 하나님께서는 호응하시고 시편 기자가 말하는 기쁨을 오늘날도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루폴이라는 성경 주석가는 이런 기쁨은

첫째, 우리를 애매하게 핍박하는 불경건한 자들이 마땅히 받을 댓가를 받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불경건한 자들이 우리를 상하게 하려고 파놓은 함정에서 우리가 보호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하나님께서 의인의 편에 서서 보호해 주신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은 물질적인 차원으로 국한시킬 수 있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전반에 걸친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주석가 드로운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잊지 않고 은혜로 방패처럼 들러 주신다는 사실은 영원한 진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으너 더 이상 자신의 힘과 지혜와 능력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책임하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따라서 외부의 압력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의 모함이라는 말이 있어도 꿋꿋하게 현실을 이기고 마음 속에 넘치는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오늘날처럼 호소할 것은 많되 호소할 데가 없는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시편 5편은 가뭄에 단비와 같고 사막에서 마시는 냉수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악인이 지배하는 세상인 줄 알고 원통함을 품고 되는 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도,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막 피어올라와야 할 시기에 피어나지도 못한 채 시들어가는 듯하는 사람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도 모두 큰 목청으로 호소하십시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 호소를 들으소서.

 



by 코이네설교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