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설교, 마가복음 11장,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 그리고 승리의 입성
막11:1-10, 승리의 입성
인류가 살아온 역사 중에 가장 크고 위대한 일이 일어났던 때가 언제쯤이었을까?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에 명성을 떨친 철인, 영웅, 학자, 예술가...등 이런 사람들이 살고간 시기를 말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센트헤르나 섬에 정배되어 갔을 때, 말하기를 '나는 나의 모든 생애를 잊을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잊혀질 수 없다'고 했듯이 좁은 나라에서 비록 화려하지 않은 극히 천박한 삶을 살고 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간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신 33년은 역사의 중심이며 전환점이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더 중요한 기간은 공생애 3년 3개월이었을 것이고 다시 이 기간 중에 더욱 중요한 기간을 말한다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1주일간의 기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간에 해당하는 종려주일(Palm Sunday)로부터 부활주일(Easter day)의 한 주간을 특별히 거룩한 주간(Holy Week) 혹은 고난주간(Passion Week)으로 지키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회개하는 자세로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오늘은 세계적으로 모든 교회가 뜻있게 지키는 종려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 제일 즐겁고 화려한 날의 한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 제자를 보내어 나귀를 몰고 오게하여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기분이 좋아서 어쩔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옷을 벗어 안장을 만들고 남은 것을 길가에 깔아 카페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기뻐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환란과 핍박이 겹쳤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많은 무리들이 "찬송하리로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라고 영접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셔야 할 십자가를 바라보며 올라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능하신 일을 인하여" 하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통하여 행해진 기적으로 주어질 행복만을 위하여 이렇게 왕으로 모시려고 옹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보니까 죽었던 사람을 살리고 보리떡 다섯개로 많은 사람을 먹고 남게 하고 바다도 잔잔케 하는 등 여러가지 이적을 볼때, 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잘못된 사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슥 9:9에 예언한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지금 입성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수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길가에 펴고 나무가지를 꺾어서 손을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왕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에서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의 한 장면을 연상시켜 줍니다.
우리는 이 날을 종려 주일로 기념하여 지킵니다. 이 날은 승리적인 입성의 날(The triumphal entry)임에 틀림없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네 왕이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리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그리스도는 왕입니다. 그러나 그의 왕국은 지상에서의 그의 선교기간동안 사람들에게 잘못 이해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왕으로 군림할 자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그러한 왕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왕으로서의 상징의 의미는 인간 영혼의 깊은 요구에 응답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나귀와 예수와 나무가지의 관계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An ass's Colt)를 탔습니다.
여기 나귀새끼의 의미를 스가랴 9:9에서 찾아보면 나귀새끼는 '겸손의 상징'(Marksof his humiliation)이며 그리스도인의 승리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기본적인 자세는 마치 주님이 쓰시는 이 새끼나귀와 같이 되는데 있습니다. 비록 힘이 모자라 끙끙 앓으면서도 힘을 다해 주님을 등에 모시고 사는 생활입니다. 이 새끼나귀의 삶은 때로는 예수 믿는 것이 괴롭고 부담스러울찌라도 오히려 예수님(십자가)을 등에 진 기쁨으로 사는 삶입니다. 만일 등에 진 이 십자가가 싫다고 내려 놓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미는 없어집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이 겸손히 엎드려져야 주님이 내 위(속)에 왕이 될 수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못참고 엎드려 있지 못하겠다고 벌떡 일어서면 그만 내 등에 탄 주님은 떨어질 것입니다. 즉 나의 삶은 예수가 없는 모습이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 없는 신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사는 자세가 아니라 혹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정도이거나 장식품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혹 십자가를 짓밟고 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종려 주일,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모습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해서 이 찬송가의 가사와 같은 결심과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367장)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하여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하던 이들이 몇일 사이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아우성치는 행동으로 바꿔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요 1:11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행동입니다. 이렇게 영접지 아니한 백성이었지만 이러한 백성들에게 주님은 오히려 자신을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로마의 투기사들이 야수들과 싸우기 위해 투기장에 섰을 때, 그들은 원형 극장에 모인 많은 군중들에게 '죽을 사람이 문안합니다'라고 인사했듯이 예수님은 죽음을 기대하시며 사셨으나 그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이 없습니다. 그는 그 죽음을 결코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요 10:17, 18에 있는대로 '내가 목숨을 버림이나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는 자의적 죽음의 선언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한가지 중요한 교훈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이 어디까지 미쳐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 답은, '죽기까지의 충성'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들 하면서 그들의 충성이 그들의 안락과 인기와 안이와 쾌락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안에 국한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주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건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을 재확인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들이 사용한 나무는 두가지 대조적 의미를 가진 나무였음이 주목됩니다.
종려나무는 기쁨의 상징(레 23:40)이며 의에 대한 전망(시 92:12)으로 결혼식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버드나무는 슬픔과 포로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장례식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이 두가지 나무를 함께 사용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고난의 신비'(The Mystery of Suffering)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가지를 연결시켜 보면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이 깊은 슬픔의 심연 속에서 인내함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욥 2:10, 13:15).
여기에 승리적인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리적인 입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귀새끼를 통해서 겸손을 보여주며, 예수님께서 하신 입성의 결단을 통해서 충성을 보여 줍니다. 또한 나무가지의 의미에서 인내를 보여 줍니다. 이 종려 주일 후 한주간 즉 고난 주일 동안 예수님의 고난의 승리적 의미를 이 3가지면으로 다시 한번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보고 우리 자신의 생활 원리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폈다고 하는 것은 최고의 존경과 최고의 존귀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가 기뻐하시는 일, 그를 존귀케 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도 각오하고 드릴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갈 1:10에 보면 바울도 '나는 사람에게 좋게 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산다'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오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 이것은 곧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어떤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 심판주로 나의 구주가 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예수님의 지배만 받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by 코이네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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