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가복음

[십자가 설교]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강동수 목사 설교

'코이네' 2014. 4. 3. 22:45

막14장, 진실한 사랑과 예수의 죽음


마가복음 14:3-11 /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 강동수 목사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이 있지만, 사람도 실상은 사랑의 존재라고 합니다. 아마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태어나 단 한번도 진실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사람됨의 가치를 상실한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예를 들어봅니다. 1844년 독일 레켄에서 출생한 니체(Nietzsche)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의 부친은 목사였지만 그가 5살때 뇌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후 할머니 가정에서 어머니, 이모, 여동생들 틈에서 매우 엄격한 기독교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본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 그는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기독교의 엄격한 규준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사랑을 받거나 사랑을 하는 일, 심지어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오는 질문이나 감정의 표현도 하지 못한 채 자라났습니다. 지나치리만큼 엄격한 기독교 윤리와 규범 가운데 자란 니체는 결국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가장 무서운 무신론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끝내 그는 정신이상자가 되고, 사지(四肢)에 마비증세가 오면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예는 비단 니체에게서만 멈추지 않습니다. 니체처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독일의 히틀러는 유대인 수백만명을 죽인 악명높은 정치가요 독재자였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전범자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이 사랑을 받거나 전신(全身)을 바쳐 사랑해 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동시에 사랑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인생을 더욱 아름답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와 함께 예수님을 돈 몇푼에 팔아넘긴 한 남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일주일 전 토요일 저녁때였습니다. 예루살렘 가까이 베다니라는 동네에 사는 몇몇 가정이 협력해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어느 덧 잔치가 무르익어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마리아라는 한 여인이 준비했던 옥합을 깨뜨려 그 속에 들어있던 "나드"라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립니다. 인도에서 수입한 이 "나드"라는 향유는 적어도 300데나리온(1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노임)은 주어야 살 수 있는 고가의 향수였는데, 이 돈은 노동자가 일년동안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제자 가운데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여인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그 아깝고 비싼 것을 그렇게 낭비하다니, 차라리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였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책망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히려 그 여인을 칭찬하시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위도 함께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한 여자와 한 남자에게서 뚜렷이 다른 두 가지 시각과 두 가지 견해, 서로 다른 행동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I. 사랑은 값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사랑에는 가격도 없고, 국경도 없고, 제한도 없습니다. 사랑에는 그 무엇도 제한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본문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요한복음에는 발에) 향유를 붓고 그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몸을 바치고, 그리고 소유를 바쳐 사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지켜보신 예수님은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일"이란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착한 일(good works)" "사랑스러운 일(lovely works)"입니다. 이는 그 여인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사랑하고 봉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 콜리(Abraham Cowley)는 ""완전한 사랑이란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Love is all capacities)""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완전한 사랑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살아가면서 이러한 사랑의 대상을 찾았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요, 축복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출세를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고, 향락을 사랑하고, 썩어 없어질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 영원한 천국이신 예수님을 이처럼 사랑하였으니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의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요 수사학자인 세네카(Seneca)는 ""오직 지혜있는 자만이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안다(Only a wise man knows how to love).""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을 안 참으로 지혜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에게 전인적(全人的)인 사랑을 보여준 이 일은 후세에 영원토록 교훈이 되고 모범이 되고 기념할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이 여인을 기념하라는 말씀인 동시에 이 여인이 행한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사랑의 헌신을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동시에 주님을 그토록 사랑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죽음을 앞두신 주님은 ""그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요 13:1)""셨습니다. "끝까지 사랑"이란 최선의 사랑을 말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도 이러한 절정의 사랑을 결단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을 향하여 이같은 사랑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이같은 완전한 사랑을 고백하시고 주님으로부터 축복과 칭찬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II. 성공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습니까?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가룟 유다의 시각은 어떠했습니까? 아마도 예수님이 더 이상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유다가 이미 예수님을 팔아 넘기기로 당국자들과 계약을 맺은 상태라고 고발합니다. 요한복음에는 공금을 횡령한 자라고 규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지옥 중의 지옥, 지옥 밑바닥에 갈 사람을 가룟 유다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왜 이같은 예수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도둑질을 하고, 지극히 차갑고 계산적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다는 애초부터 성공을 원했지 예수님을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그의 성공을 찾아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 예수님 자신을 사랑해서 좇아 다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은 갈구하면서도 구원자는 갈구하지 않습니다. 복은 원하면서도 복을 주시는 예수님,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병입니다. 바로 "성공병"입니다. 성공병이 인간을 망치고, 인간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주님없는 성공은 허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성공의 열쇠요 복의 열쇠이신 예수님이 더 소중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유다는 똑똑하면서도 한없이 어리석은 바보 중의 바보입니다. 지혜있는 자만이 어떻게 사랑해야 할 지를 안다는 말은 옳습니다. 성공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세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요, 둘째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요, 셋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는 미국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두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성공을 사모하며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한 가지를 성공하면 다른 성공을 위해 기도하고, 또 다른 성공을 위해 또 다시 기도합니다. 이렇게 해서 성공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한대로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교만의 병이 들고, 고독하고, 새로운 성공을 위해 또 다른 모험이 필요하고, 향락의 유혹에 빠진다고 합니다. 성공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이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성공이 천국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공이라는 것은 잠시 나와 함께 있다가 곧 성공을 기다리는 또 다른 사람을 향하여 바삐 떠나가는 나그네입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공이요, 축복이요, 생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친 마리아야말로 복된 자요, 지혜자요, 참으로 행복한 자입니다.

III.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는 예수님을 유감없이 사랑했습니다. 그의 모든 것으로 남김없이 사랑했습니다. 자신의 성공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행복보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구원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고, 자신의 축복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부족함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미국의 시인이요 문학가인 리차드 브롬은 ""사랑이 있는 곳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로 인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그에게는 성공과 복, 행복, 구원보다 더 귀한 천국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세 살 난 어린 아이가 마당 한 복판에 깃발을 꽂아 놓고, 그 주위를 혼자 돌면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이상히 여겨 물어보았습니다. ""얘야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니?"" 그러자 그 어린 아이는 ""내가 지금 이렇게 깃발을 꽂아 놓고 춤을 추면 이를 보시고 하나님도 나와 함께 춤을 출거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거든.""이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감동을 받은 엄마는 ""하나님과 더불어 춤을 추고""라는 책을 펴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사람을 사랑하는 자,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자, 십자가의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과 더불어 춤을 추는 사람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노래하고, 주님과 더불어 춤을 추는 인생은, 주님이 예비해 두신 천국에서 영원히 춤추고 노래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순절 막바지에 서 있는 오늘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한 여인의 시각과 한 남자의 시각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진실로 사랑합시다. 내 옥합을 깨뜨리고, 내 마음의 머리털을 풀어 주님의 발을 씻겨 드리는 사랑을 고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