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장, 어린이주일설교, 옷을 손질하는 방법이 있는 것처럼 아이들을 교육하는 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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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을 내게로 데려오라
본문 막10:13-16
서울부활의교회 /한만영목사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해마다 이 날이 오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오늘이 어린이 날이구나"하고 비로써 어린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어른들은 생존경쟁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생활하다 보면 어린 자식이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무관심하게 지내다가 어린이날을 맞이해서 그 동안 자신들의 무관심에 자책감을 느끼면서 이 날 하루만이라도 어린 자녀들에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앞으로 이 나라와 이 교회의 운명을 짊어질 기둥들이 바로 지금의 어린이들이라 생각할 때 우리는 어린이 날 하루만 어린이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365일을 어린이 날로 생각하고 어린이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바르고 곧게 자라야 내일의 사회가 보다 밝아질 수 있습니다. 모든 농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식 농사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 풍년을 구가한다 해도 자식 농사를 망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자녀들도 이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경우 여러분은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얘! 그 까짓 것 괜찮아. 공부하지 말고 네 마음대로 나가서 실컷 놀아라"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우리의 자녀들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저들을 부지런히 공부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부모된 사람들의 고민과 갈등이 있습니다. 해서 바울은 에베소서 6장 4절에 말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따라서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 원리대로 양육하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가 옷을 사게 되면 어떤 옷이든 목덜미 부분이나 옆 솔기에 꼬리표가 있습니다. '이 옷은 뜨거운 물에 세탁하지 말 것' 또는 '손으로 짜지 말 것'이라든지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붙였습니까? 그 옷을 만든 사람입니다. 그 옷이 어떤 옷감으로 만들어 졌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그 옷 입는 사람이 오래 입을 수 있도록 그런 주의 사항을 붙여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만약에 "내가 내 옷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누가 간섭하느냐?" 하며 맘대로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옷감이 줄거나 쭈글쭈글해져서 그 옷을 입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전에 '아프리카 케냐'에서 집회할 때입니다. 내가 머무르던 교회의 사찰집사가 내 양말과 손수건, 속옷들을 잘 빨아서 다림질까지 해놓았습니다. 하도 고마워서 2달러를 주었더니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낮 집회를 마치고 돌아와 양복을 벗어 놨더니 이 친구가 내 양복을 모두 물빨래를 해 버렸습니다. 양복이 줄어들고 결이 상하고 다 줄어들어서 결국 그 양복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집니다. 누가 우리 사람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만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부모를 통해서 이루어져 나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주의사항으로 제시해 주신 원리에 따라 우리 자녀들을 양육할 때 틀림없이 바르게 키울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3명의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첫째가 부모들, 둘째가 제자들, 그리고 셋째가 예수님 입니다. 이 3명의 모습을 보면서 자녀교육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부모의 모습입니다.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안수하고 기도하심)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유대인들은 축복하는 안수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죽을 때 이삭에게 축복 안수를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고스란히 자식에게 물려주는 거룩한 의식이었습니다. 리브가와 야곱도 그것을 잘 알기에 형 에서를 따돌리고 아버지 이삭을 속이면서 까지 해서 안수 축복을 받습니다. 야곱도 죽을 때 12아들을 일일이 안수하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의 전통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존경받는 선지자나 랍비가 자기 마을에 오면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이 어른을 쳐다보아라 얼마나 훌륭한 분이냐!"하고 하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존경심을 갖도록 가르칩니다. 그리고 축복의 안수를 받게 합니다. 이렇게 축복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탈선하는 법이 없습니다.
전에 잘 알고 지내던 장로님이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고 잘 대접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 아들을 만나 달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교회도 안나가고 학교에서도 말썽만 부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 아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얘기가 여러해 전에 그 장로님이 다니던 교회에 분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쟁으로 교회가 두쪽으로 갈라져 싸우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장로님 댁에서 매일 같이 교인들이 모여서 상대방을 비난하며 목사가 어떻고 아무개 장로가 어떻고 누가 어떻고 어떻고 하며 욕하는 소리를 하도 듣다 보니 그 당시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학생으로서 여간 충격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교회도 안나가게 되고 결국은 문제아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경우에라도 아이들이 듣는데서 교회나 목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에 대하여 비방하는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쉽게 내 뱉는 한마디로 아이들의 운명이 결정지어 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지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저 운동선수, 탤런트, 가수, 맨 그런 사람들입니다. 왜냐면 평소 부모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사람들 비방하는 소리뿐이었습니다. 대통령도 욕하고, 목사도, 장로도 욕하고 또 운전할 때 운전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마구 욕하고 선생님들도 맨 욕하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그러니 자녀들이 누구를 존경하겠습니까? 도대체 아이들 머릿속에 '존경'이라는 단어 자체가 들어있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자신도 이 다음에 커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되리라는 생각을 안 합니다. 다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만 많이 있으면 최고라는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바로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부부사이에도 존경심이 필요합니다. 부모와 자식들 사이 역시 존경심이 있어야 합니다. 무릇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너희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해라. 너의 아버지는 훌륭한 점이 많은 사람이란다. 아버지 말씀 잘 들어야 한다"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엄마들은 "제발 너의 아버지만은 닮지 마라" 반대로 "너의 엄마는 왜 늘 저 모양이냐?"이런 식으로 서로를 욕한다면 그 자녀들이 부모 말을 믿고 순종하겠습니까? 존경과 사랑을 잃어버린 가정이나 사회, 교회는 어떤 축복도 임할 수 없습니다.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안수의 축복을 구하는 부모를 보십시오. 예수 앞에 나와 무릎꿇고 복을 받고자 하는 그 자세,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들은 예수를 존경했기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여기에 축복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제자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꾸짖거늘" 한마디로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귀찮게 여겼습니다.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데 아이들까지 데리고 와서 귀찮게 구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병든 자, 죽어 가는 자들을 고치시고 말씀 전하시고.... 얼마나 피곤하고 고단하신 데 좀 쉬게 해드려야지 아이들까지 데리고 와서 귀찮게 굴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런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 14절에는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귀찮게 여기는 제자들의 태도를 분하게 여기셨습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 하나를 잘 못 인도하는 자는 목에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져 죽는 이 만도 못하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어린아이들을 끔찍이 여기시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가끔 지구예배에 참석해 보면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예배 드릴 때나 음식 먹을 때 이 아이들을 한방에 가두어 두고 나오질 못하게 합니다. 어른들 예배나 식사를 방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역예배든 지구예배든 다 참석시키십시오. 아이들은 장난치고 안 듣는 것 같으나 나중에 물어보면 어른들 보다 더 잘 알아듣습니다. 예배 후에 나는 언제나 아이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드립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2차대전중 유대인을 무려 600만 명이나 죽였습니다. 이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른 데는 그의 불행한 어린 시절이 그 배후에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장사꾼으로 집을 곧잘 비우곤 했습니다. 일단 외지로 떠나면 보통 한 두달씩 집을 비우곤 했습니다. 남편이 집을 비우곤 할 때면 이웃에서 장사하는 유대인이 집에 자주 놀러오곤 했습니다. 어느덧 그 유대인과 그의 어머니는 불륜의 관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안 히틀러는 어릴 때부터 유대인과 어머니를 증오하며 그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머니의 고귀한 희생이나 사랑 같은 말이나 순결한 여인의 이미지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이 여자 저 여자 수없이 여성 편력을 했지만 한번도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한 일이 없습니다. 그의 편견과 왜곡된 가치관이 후에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학살하면서도 눈 하나 까딱 않는 살인마가 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영향이 이처럼 큰 것입니다.
히틀러와 정 반대인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무디(Moody)'의 형제들입니다. 무디는 9남매 중의 하나입니다. 그가 어릴 때 아버지는 죽고 그의 어머니가 9남매를 억척스럽게 키웠습니다. 무디의 어머니는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 손에 손금이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밤에는 9남매를 데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9남매가 잘 자라 주의 종들이 되었고 결국엔 미국과 영국을 뒤흔드는 大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자녀들을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잘 가르쳐야 합니다. 훌륭한 믿음의 자녀로 키우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에게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3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어린아이들을 내게 '오게 하라'. '데려 오라' 주님은 어린아이들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셨든지 마태복음 18:5에는 "단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당신과 똑같은 위치에 올려놓으실 만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일학교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어른만 교회에 나오고 자녀들은 교회 안 나오는 가정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예루살렘 여인들이 울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해 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울며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돌아옵니다.
둘째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이런 자'는 바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childish'가 아니라 'childlike'입니다. 유치한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순수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의 특징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어린아이들은 순수합니다. 두 마음이 없습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르지가 않습니다. 열등감도 없고 우월감도 없고 부함과 천함도 없고 스스럼도 없고 정직합니다.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정직하십시다. 천국은 바로 이런 자의 것입니다. 2)어린아이들에겐 꿈이 많습니다. 소망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들은 꿈을 잘 꿉니다. 날아다니는 꿈도 많이 꿉니다. 무한한 상상력도 있습니다. 꿈은 현실보다 강하고 상상력은 지식보다 강합니다. 희망은 경험을 초월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의 힘이요 생명력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어린이들은 참 영적입니다. 3)어린아이는 사랑에 살고 있습니다. 엄마 등에 업혀서 또는 무릎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불편하게 잠자는 어린아이를 보십시오. 편안히 누우면 좋으련만 엄마를 떠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게 우리 눈에는 불편한 것 같으나 그들에게는 더 없이 편한 것입니다. 무릇 아이들은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고야 잘 수 있습니다. 자다가도 손을 뻗쳐서 엄마를 만지고 엄마의 체온과 사랑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확인하며 살고 있습니까? 천국은 이런 자의 것입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교회에 들어오실 때 2층부터 들르시고 3층에 올라오십니다. 주일학교에 먼저 오셔서 어린이들을 축복하신 후에야 어른에게 오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십니까? 훌륭한 자식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우리가 먼저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훌륭한 부모가 있어야 훌륭한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나아 오십시오. 그리고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by 코이네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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