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가복음

[막9:14]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코이네' 2018. 1. 31. 14:00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막 9:14-29)

 

서론


성경에는 수많은 이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만약에 성경에서 이적을 빼버린다면, 겉표지와 끝표지만 남을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적을 체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사람이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보는 사람의 관점, 또는 관심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외모, 직업, 성적, 출신, 환경 등에 다양한 선을 긋고, 인간은 유유상종하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이와같이 예수님의 안목은 인간의 안목과 전혀 다릅니다.
그러면 예수님깨서 행하신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께서 이적을 베푸시며 칭찬하신 사람들은 누구이고, 책망하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 달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비결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닮은 성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이 됩시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나 내 뜻을 이루게 하리라"(행 13:22)

 

본론


본문의 내용은 변화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께서 산 아래 동네로 내려오시자 발생한 사건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주님은 변화산에서 기도하셨고, 그 동안에 아홉 제자는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온 아버지의 요청으로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오자 큰 무리가 둘러선 가운데 나머지 제자들과 서기관들이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막 9:16) 그 때에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막 9:17, 18)

 

1. 예수님의 반응


우리는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봅시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막 9:19)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아이를 데려오자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아이는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립니다(막 9:20). 예수님께서 그 아비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자 "어릴때 부터 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막 9:21). 이 상황에 직면하신 예수님의 반응은 아이를 고칠 수 없다는 좌절감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세대"를 향한 울분입니다.
이와같은 반응은 이어지는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 9:22) 예수님께서는 보다 분명하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말씀하십니다. 즉, 아이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차린 그 아이의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소리를 지릅니다(막 9:24).
그 후에야 주님은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말라고 명하십니다(막 9:25). 그러나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자 그 아이는 죽은 것 같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 아이는 일어납니다(막 9:26, 27).
예수님의 반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원리는 "이적을 보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이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적은 믿는 자에게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2.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


한 마디로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1) 하인의 병을 고친 백부장(마 8:5~13, 눅 7:~10)
백부장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하인의 사정을 아뢰며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대단한 칭찬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참조, 눅 7:9). 그리고 나서 "가라 네 믿음 대로 될지어다"(마 8:13)라고 말씀하시자 그 시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하인의 병을 고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백부장이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의심많은 도마와 비교해 보면, 백부장의 믿음은 얼마나 훌륭한 믿음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의심많은 도마에게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도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에게는 주님께서 이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2)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마 9:1~8, 막 2:1~12 눅 5:17~26)
마태나 마가나 누가는 모두 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믿음"을 보시고 그들을 칭찬하시며, 병자를 고쳐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에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5:20). 예수님은 언제나 믿음있는 사람들에게 이적을 베푸십니다. 이와같이 믿으면 누구든지 이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3)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마 9:20~22 막 5:25~34)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마 9:21)하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겉옷을 만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강건할지어다"(막 5:34). 12년 동안이나 고생하던 여인은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그녀의 병을 고친 것입니다.

 

(4) 소리지른 두 소경의 믿음(마 9:27~31 20:30~34)
두 소경은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소경들과 대화를 하셨씁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누구든지 믿음이 있는가 없는 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소경을 다 고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소경이 다 고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이 있는 소경만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소경만 이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5) 가나안 여인(마 15:21~28, 막 7:24~30)
가나안 여인 하나가 소리를 지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마 15:22) 마가는 그 여인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합니다(막 7:26). 그러나 주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 15:26, 막 7:27)고 거절합니다. 그래도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막 7:28)라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고, 이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

 


 

 

3. 예수님이 이적을 베풀지 않고 책망한 사람들


예수님께서 책망한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1)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마 13:53~58, 막 6:1~6)
예수님은 자기의 고향에서 많은 능력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 13:57, 58:참조, 막 6:4~6). 결국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함으로써 예수님의 이적적인 은헤를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2) 두려워하는 베드로(마 14:22~33)
여기에 나오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그 날 밤에 발생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따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밤 사경 즈음에 풍랑이 일어 고난을 당하던 제자들에게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줄 알고 놀라 무서워하여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은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마 14:27)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하고, 주께서 "오라"고 하십니다. 물 위를 걸어서 주님께 가던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들어 갑니다. "주여 나를 건지소서" 주님은 손을 내밀어 붙잡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불안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불신앙적 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바다 위를 걷다가 불신앙으로 바다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께 부르짖음으로 건짐을 받고, 다시 바다 위를 걸어서 배로 돌아옵니다. 오늘날도 믿는 자는 얼마든지 이적을 체험할 수 있지만, 두려워하고 믿음이 없는 자는 주님의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3) 떡 가져가기를 잊었던 제자들(마 16:5~1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 16:6)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어버린 줄 아시고 하신 말씀인 줄 알고 의논을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마 16:8)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물고기 두마리와 떡 다섯개로 5,000명을 먹이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를 거두고(마 14:15~21), 떡 일곱개와 생선 두 마리로 4,000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나 거둔 것(마 15:32~38)을 잊어버린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 16:12)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떡은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서 또 떡 때문에 염려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0, 31)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이적을 체험하고 주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믿음이 적은 사람들을 만나면, 더 이상 이적을 행하실 수 없어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4. 믿음의 장애물


그러면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믿음의 장애물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의 장애물이란 때로는 내적으로, 때로는 외적으로 찾아옵니다. 모세 앞에 나타난 홍해나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여리고는 모두 다 외적인 장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마음 속에 여러 종류의 불신앙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내적인 장애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때로는 환경이, 때로는 돈많은 부모나 출세한 형제가, 때로는 건강이, 때로는 물질이, 때로는 지식이, 때로는 권세가, 때로는 미모가, 때로는 취미가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본토(갈대아 우르), 친척(롯), 아비 집(독자 이삭)이 신앙의 장애물입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 하나님의 시험은 계속됩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쳤을 때에(창 22:12),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는 애굽의 모든 학문과 학술이 믿음의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말과 행사가 능한 40세의 모세를 쓰시지 않고(행 7:20~29), 믿음으로 자기의 무능을 고백하는 80세의 모세를 사용하십니다(출 3:11, 12:4:10~13).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에게는 그의 선입견이 믿음의 장애물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다"(왕하 5:11). 만약 그가 자기 생각만 고집했다면, 병을 고칠 기회를 놓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엘리사의 지시를 따라 몸을 일곱번 요단강에 씻음으로써 병을 고친 것입니다(왕하 5:8~14). 때로는 우리에게도 나아만과 같은 선입견이 신앙의 장애물이 됩니다. 문제는 방법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고집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세상적 경험이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눅 5:1~6). 왜냐하면 예수님은 목수 출신이지만, 자신은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림으로써 신앙의 장애물을 멋있게 극복합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재물이 신앙의 장애물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얻었지만, 이 부자 청년만은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 슬픈 기색으로 주님을 떠나갔습니다(막 10:17~22).
백부장에게는 좋은 지위가 있었지만, 그의 믿음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장애인 친구에 대한 창피함이나 부끄러움이 있겠지만, 그것들이 장애인 친구를 주님 앞에 메고 오는 믿음을 막지 못합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세상줄이 다 끊어진 다음에야 전폭적인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습니다. 때로는 소리지르던 소경들처럼,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은 가나안 여인처럼,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절대 믿음으로 장애물을 극복한 사람들은 이적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5. 믿음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이적을 체험하는 방법


우리의 신앙의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입니다. 그리고 싸움의 방법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마 4:1~11 출 17:8~16). 사건이 해결된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28절)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29절)고 대답합니다. 병행귀절인 마태복음 17:21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본에는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우리는 어찌하여"라고 질문했지만, 예수님은 "기도로" 그리고 "금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적은 인간의 힘으로나 능력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쳐 줍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기도"란 나의 무능을 전적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 1:6) "금식"이란 더욱 분명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일을 할려면 먹어야 힘이 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금식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힘을 빼라는 것입니다. 밥도 먹지 않고 힘을 뺐는데 어떤 일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능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루실 줄 믿고 전폭적으로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와같은 믿음으로 기도하고, 금식할 때에 이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결론


인간은 내게 조금만 힘이 있어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남보다 뛰어난 장점과 달란트가 있어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할 때까지는 수많은 연단과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사도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 돌아오리라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아브라함은 기력이 쇠한 100세에 이삭을 낳음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것입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고 있던 것을 다 허비한 후에야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내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여 기도할 때에 이적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지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렘 32:27)

 



by 코이네설교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