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복음

[종교개혁주일] 회복되어야 할 종교개혁정신(요2:13)

'코이네' 2017. 10. 28. 18:28

 종교개혁의 정신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본문 : 요한복음 2장 13절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의 공생애의 첫 번째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상업화, 시장화 되었으며, 세속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적 행동으로 과감하게 성전의 상인들과 환전상을 내어 쫓아내셨습니다. 그것은 메시야적 권위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은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와 제자들에게와 당시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놀라움과 충격이었습니다.


첫째로, 교회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하나님 앞에 경건히 예배드리는 처소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구원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이미 타락했습니다. 이미 상업주의가 강하게 침투되었습니다. 유월절 절기가 하나의 상업상의 대목 경기로 바뀌어졌습니다. 경건하고 신성해야 될 성전 안은 양과 소를 파는 우시장이 되었고, 관심은 오직 상거래뿐이었습니다.
종교가 세속화 될 때 무력하게 됩니다. 그것을 제재할 아무런 기력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타락했습니다. 금전 수수를 통해서 예물을 바치는 순서를 바꾸는 등 실로 원초적인 부정행위가 자행됐으므로 성전 안에 들어온 상업주의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 2:16에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 들어온 상업주의가 성전을 부패하게 했다는 예수님의 예리한 분석이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지 485년을 지난 지금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현실적인 상황을 진단하고 평가하는 참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선교2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는 괄목할 만한 급격한 교회성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세계교회로부터 주목을 받으며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수적성장은 질적인 성숙을 동반하지 못한 면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급성장에서 찾기도 하고 유교적 가치관과 혼돈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분석은 교회의 윤리적 타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수치요, 마땅히 바로 잡아야 할 교회의 과제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떠한 위험수위에 있는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① 교회내의 상업주의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상업주의가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올 때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물질주의가 교회에 들어올 때 진리의 표준을 잃고 표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세기에는 교회가 포도주를 만드는 양조장을 수도원에서 시작하고 양곡장사와 모리장사를 동시에 함으로 외형적으로 교회당의 건물은 화려하고 크게 되었으나 교회는 냄새나는 타락하는 교회가 되고 결국은 비교회로 되어 생명없는 단체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은 제사 용품을 팔고, 돈을 바꾸는 장터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상업주의는 지금의 교회에서도 만연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들을 이끄는 신이라도 했습니까? 금은 가장 값진 것이기에 하나님은 값진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배금주의, 상업주의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두드러지는 윤리적 타락의 요소입니다. 교회의 재산은 재산 증식 수단이 아니라 재산의 분배의 수단임에도 오늘날의 현대교회들은 앞을 다투어 많이 가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는 예배당, 교육관, 기도원의 순으로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재산축적은 중세 교회의 타락요소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며 한국교회의 중세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물질적 타락은 윤리적 타락뿐만 아니라 세상의 빛도 소금도 되지 못하게 되는 본질적인 타락인 것입니다.


② 교회내의 혼합주의입니다.
지금 교회는 교회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성전으로서 헤롯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지었고 당시 교권자들은 성전완공을 위해서 온갖 야합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종교와 정치의 야합, 그리고 사회적 방법이 판을 치는 종교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교회로서의 순수성을 이미 상실하고 정치에 인기를 얻기 위하여 사회적 공실이 일반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적으로 지은 교회 건물도 수없이 많고,교회의 업무를 위해서 뇌물을 주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교회 이름을 붙인 차들이 일반 차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교통위반을 해도 가책조차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가 추구해야 방법은 적어도 사회의 방법은 아니어야 합니다. 결과 뿐만 아니라 과정도 중요함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③ 교회내의 교권주의입니다.
당시의 성전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교권주의자들이 득실거리는 자리였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것이며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성전의 이권을 주었습니다.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교회가 교권주의에 흐르게 되면 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가속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타락하면 교회도 타락하고,성직자들이 타락하지 않으면 교회는 타락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윤리적 약점은 교권주의입니다. 교회가 권위주의로 흐르고, 성직자들의 생활이 윤택해짐으로 소명의식보다 직업의식이 앞서고 교회가 대형화됨으로 그 다음 순서인 명예심이 교회를 지배하여 교회도 박사인 목사를 원하며, 목사라는 직분도 시시하고 박사라는 칭호를 얻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총회에서는 [장](長)자리에 대한 욕구로 수억을 주고 총회장 자리를 사기도 합니다. 중세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성직매매(聖職賣買)가 성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키며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는 요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권주의 혹은 권위주의는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분명하게 배격되어야 합니다.


⑷ 교회내의 형식주의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성전 앞에서 파는 제사용품은 여행자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얼마 후에는 일반인들이 제물을 준비하지 않고 성전 앞에서 적당히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흠이 있는 비둘기는 반액으로 깎아 팔고 제사장은 이들 상인들이 판 흠이 있는 것들도 제사용으로 합격시켜 주었습니다. 상업주의와 교권주의는 결국 교인들로 하여금 형식주의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름은 분명 그리스도인이지만 사회에서 작은 그리스도로 살지 못하고 까닭이 여기에 있고 주일에는 교인이지만 평일에는 휠씬 비윤리적인 집단으로 전락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윤리적 타락이 우리의 아픔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형식주의와 편리주의가 성전 안에 들어 왔을 때,그것은 생명없는 종교로 시장화되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생명을 잃을 때 형식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진리운동,말씀운동이 약화될 때 요란하게 옷을 입고, 요란하게 책상과 의자를 꾸미게 되는 것입니다. 요란하게 건물을 꾸미고 외형을 단장하는 형식주의가 일어납니다. 세속주의적인 편리주의도 마찬가지 입니다.본래 멀리서 온 유대인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성전 뜰에서 소와 양을 팔고 히브리 돈인 세겔로 바꾸는 편리한 제도를 만들었으나 결국 그것은 성전 안을 점령하고 깊숙히 세속주의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편리하게 보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도 진리가 아니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 반대로 노끈을 만드시고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행위 즉 예수님의 개혁운동은 교회를 참 교회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를 참 교회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과제입니다. 그것은 16세기의 개혁자들의 과제인 동시에 오늘 우리의 과제입니다. 지정한 개혁은 언제나 교회되게 해야 합니다. 형식보다는 진리와 은혜가 있는 교회로 겉모양보다 내용을 지켜 나가는 교회에 되어야 합니다. 의식주의, 형식주의, 유물주의, 편리주의 사상에서 깨어나 주님께 향하여야 하겠습니다. 현대신학에 있어서 교회란 가능성만 보려하고 진정한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버립니다. 선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른 원리를 갖고 선교를 해야만 인간이 자랑이나 공로가 들어나지 않고 주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오직 주님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드신 채찍은 마땅히 현대교회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의 주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행 5:42) ② 말씀을 가르침(행 2:42) ③ 성도의 교제(행 2:42-46) ④ 성만찬과 세례 집전(고전 11:23,24) ⑤ 권징(마 18:17) ⑥ 구제(행 6:1-3) 등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루터의 개혁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면 현재의 개혁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어야 합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며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일도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로 돌아가려는 의도였습니다. 성전에서 장사꾼과 환전상을 내쫓은 것은 성전에서의 제사를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악행을 하고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보호받으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의 개혁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본문에서 행하신 것은 자기의 성전 청결사건은 구약의 약속성취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개혁사실은 구약의 성취이며,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운동입니다. 요 217에 보면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개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사상으로 되돌아가는 운동입니다. 교회가 타락하는 과정에는 말씀보다 다른 것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성경보다 사람의 이름이,성경보다 돈이, 성경보다 사업이, 성경보다 사랑이, 성경보다 정의가 강조되어 집니다.성경보다 사람의 소리가,성경보다 전통이, 성경보다 이적이, 성경보다 꿈이, 성경보다 다른 무엇이 강조됩니다. 성경보다 전통과 편리주의와 의식주의가 강조되었을 때 천주교는 타락했고 18세기와 19세기 교회는 성경보다 합리주의, 과학주의를 강조하다가 자유주의 신학을 만들어 유럽교회는 다시 멍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을 성경으로 바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 지상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과 행위의 유일법칙임을 깨닫아야 할 것입니다.

요 2:22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개혁운동은 말씀을 성취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오늘 많은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 중에는 성경 없는 기독교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역사를 보면 결국 중세교회가 성경 없는 기독교를 만들다가 썩어 냄세나는 교회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도 성경 없는 기독교를 만들다면 그것은 머지않아 교회는 깊은 타락의 구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찍이 정통신학자 사무엘 박사의 말처럼 "성경 없이는 교회가 없다. 성경이 없이는 오래 전에 한 이해할 수 없는 만화로 퇴화해 버렸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정곡을 찌른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으로 바로 선포되어질 때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이며, 이것이 참된 개혁의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공로신앙이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업적이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께서만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사건 현장에서 그의 개혁의 합리성을 따지면서 '무슨 표적(이적)을 우리에게 보일 수 있는가?'라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성전된 자기의 몸과 십자가를 통한 구속을 제의했습니다. 즉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실 자신을 제시했습니다. 이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통한 그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사실을 제시했습니다. "오직 은혜로(Sola Gratia)" 말미암아 성도가 살 수 있음을 제시했습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어두워지면 인간의 공로와 노력을 상당히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지식과 자연과학이 마치 신앙의 해석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때 교회는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은혜되게 할 때 참된 기독교는 지켜집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문제는 '은총의 종교'를 '율법의 종교'로 바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주의 사상은 또한 자율주의 사상입니다. 자율주의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은총의 복음을 깨닫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의 복음으로 바로 선포되고 바로 믿는 한국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by 코이네설교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