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복음

[요20:19] 성령을 받으라 / 강기수 목사

'코이네' 2018. 3. 19. 22:13

제  목 : “성령을 받으라!”  

본  문 : 요한복음 20:19-23  

설교자 : 강기수 목사 (‘97.5.18 한무리 주일 낮)


    요즘 우리는 사건과 사고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는 의례적인 차원을 벗어난 꼭 필요한 안부 인사가 되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집집마다 출입구의 자물쇠는 두 세개씩 설치되어 있으며, 취학한 자녀를 두신 부모님께서는 삐삐(호출기)를 하나씩 사주셨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준비들은 내일에 대한 불안을 미리미리 대비하고자 하는 조치들이 분명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엔 별일 있으신 분은 없으십니까? 여러분은 내일의 삶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오늘의 위기들을 잘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신 후에 제자들의 신앙 상태를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두려움 속에 마음이 닫힌 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요20:19)  
    다시말해서 그토록 의지하고 따랐던 예수님과의 이별 뒤에 제자들의 모습은 비록 모이기를 힘쓰며(안식 후 첫날), 기도하며, 교제하는 생활이었지만, 생명의 위협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였다는 사실입니다. 즉 지휘관을 잃고 도주하는 무기력한 패잔병, 바로 그 자체 였습니다. 아마 닫힌 것은 문이 아니라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별 다를바 없이 상황 논리에 흔들리는 오늘의 현대 교인들과 사뭇 흡사한 상황입니다.


    둘째로 가시적인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20:20)
    부활을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기보다는 보이는 현실에 따라 좌우되는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돈이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던지, 혹은 목표를 위해선 신앙을 차선책으로 이용하는 우리네의 모습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상과 같이 연약함 속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능력으로 찾아오셨으며, 동시에 본문 요20:19-23을 통하여 삶의 수많은 도전들을 극복하는 비결을 제시해 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러한 교훈과 비결은 이미 생전에 말씀하셨던 약속들이었습니다.


    ① 참 평강의 선언이었습니다.(19,21절)
    ② 능력 안에서의 세상을 향한 파송이었습니다.(21절)
    ③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과 명령이었습니다.(22절)  
    ④ 복음 증거의 사명(죄사함의 권세)이었습니다.(23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순간 여러분은 이와같은 주님의 약속과 특권을 누리고 계십니까?
    본문의 “평강이 있을지어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등의 말씀은 주님의 선언이자, 동시에 명령인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주님의 선언(명령)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창1장 참조)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약속에 대한 응답하심의 신실성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주 안에서 축복의 약속을 함께 받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능력 안에서 세상을 이기며 살아 가시기를 소원하십니까? 또한 오늘의 고통을 내일의 승리로 변화시키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본문의 “받으라!”는 명령은 “영접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도구적 수단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인격 안에서의 영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시간 우리의 마음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 앞에 자신을 내어 드리므로 능력과 축복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