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전12:1] 은사는 어디서 오는가?

'코이네' 2016. 11. 30. 16:56

은사는 어디서 오는가  

 

고전 12:1

 

 

앞장에서는 은사의 의미와, 영적인 은사와 일반적 재능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적인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특정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특정한 일을 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고린도전서 12장과 에베소서 4장의 몇 구절을 중심으로 영적인 은사에 대해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고린도전서 12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여기서 "신령한 것"이란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영적인 은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나오는 "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절을 쉽게 풀어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영적인 은사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여러분이 분명히 알기를 원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다

고린도전서 124절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는 다른데, 그 받은 은사의 근원은 성령님 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가진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일도 역시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개념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은사를 질투할 필요도 없고 나의 은사에 대해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갖거나 불평을 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일전에 어느 도시에서 목사님 여러 분이 오셨습니다. 1년에 한 번씩 한국의 중요한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그 교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돌아보고 노회에 보고할 의무를 띤 노회 시찰단이었습니다. 이것저것 질문하는 대로 제가 답변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평신도 목회"라는 용어를 자주 썼는데, 그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목회는 목사가 하는 것입니다. 평신도는 사역은 할 수 있지만 목회는 하지 않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평신도들도 목회를 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역이나 목회나 똑같이 ministry 아닙니까 ? 그러니까 평신도 목회라는 말도 가능합니다. 목사님들이 하는 것을 평신도들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법상 축도나 성례 같은 것은 목사만 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 것은 할 수 없지만, 서로 서로 축복해 주는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성령께로부터 다양한 은사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역의 모양은 다르지만, 그 섬김의 대상은 동일합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다

고린도전서 126절입니다.

"또 역사(役事)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여기서 "역사"history가 아니라 operation입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일을 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통로에 불과합니다. 수도꼭지를 틀어 물이 나올 때 그 수도가 중요합니까, 수도꼭지를 튼 사람이 중요합니까 ? 하나님께서는 `'라는 수도를 사용하셔서 수도물이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성취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은사의 목적은 유익함이다

고린도전서 127절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께서 우리의 은사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한 유익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유익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유익입니까 ?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란 성도들의 모임이므로 성도에게 유익이 된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은사를 사용할 때 나 자신의 이름만 자주 드러나고 내가 칭찬받으려 하면, 그 은사는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한 것입니다. 또 자신의 은사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그들을 낙심케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은사는 반드시 교회에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유익"이라는 단어는 어떤 영어 성경에 "common good"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동의 선(), 즉 교회 전체에 유익을 주기 위함이란 뜻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수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오후에 전부 다 같이 뛰어 노는 시간이 있었는데, 한 사람만 나무 밑에 외롭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님, 저 분도 오시라고 해서 같이 놀자고 하세요"라고 했더니, 그 집사님이 "저 분은 안 오십니다. 워낙 기도를 많이 하는 분이라서 지금도 나무 밑에서 기도하고 있답니다. 절대로 저희들과 어울리지를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예이긴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의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은사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게 주신 은사를 통하여 주님의 교회에 유익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은사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고린도전서 1211절입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11절 앞에 여러 은사들이 나열됩니다. "이 모든 일"이란 바로 그 은사들을 가리킵니다. 11절에서는 뒷부분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은사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제게는 이런 은사를 주십시오"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사의 종류를 결정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달란트의 양을 결정하는 사람은 그것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나중에 "당신은 심보가 고약해서 저 사람한테는 다섯 주고, 이 사람한테는 두 개 주고, 나한테는 하나밖에 안 주니 속이 상해서 묻어 놨다가 가져왔다"고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까 ? 여기서의 교훈은, 내게 주신 은사에 대해 불평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주님께 바치는 일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 가진 사람과 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을 칭찬했습니다. 그때 그 칭찬의 내용이 같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자기가 받은 것으로 열심히 일해서 한 달란트를 남겨 가지고 왔다면, 아마 다른 두 사람과 똑같이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들을 주셨지만, 그 은사들은 모두 교회를 세우는 데 똑같이 필요하고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은사는 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나타내는 색깔과 같습니다. 똑같은 빛이 들어왔는데 나타나는 색깔은 일곱 가지로 나뉩니다. 이때 노란색이 빨간색보다 우월한 색깔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은사가 다른 은사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에베소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47절 말씀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우리"는 믿는 사람 모두를 가리킵니다. "선물"이라는 말은 은사, 은혜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영적인 은사가 이미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됨을 위하여

에베소서 413절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바로 앞 절인 11,12절을 보면 여러 은사들이 나열되고 그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곧바로 13절 말씀이 이어집니다. , 여러 은사들이 사용됨으로써 신앙에서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어느 한 그룹의 사람들이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를 갈라 놓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은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예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대로 은사를 적절하게 사용하면 깨졌던 교회도 하나가 됩니다.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고 할 때, 그것은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하나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에베소서 415절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진리만 혹은 사랑만 강조하기 때문에 교회 내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영적 은사가 나타날 때는 그 둘이 함께 나타납니다. 한국 교회의 슬픈 모습 가운데 하나가 보수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몇십 개로 나눠졌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개신교 교파가 120개 이상이라고 합니다.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좋지만, 사랑이 없이 진리만을 강조하다 보니 결국 분열하게 됩니다.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고 되어 있는 부분은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라고 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때 13절에 언급된 것처럼 우리가 다 하나가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운동이고 예수의 운동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 모두가 각자 가진 은사를 사용함으로써 서로 유익을 주고 도움을 주어서 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의 특징입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라

에베소서 416절 말씀에 보면 "그에게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각 마디는 믿는 사람들 각각을 가리킵니다. 앞 장에서 은사의 목적을 언급할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과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고 은혜를 끼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은사를 사용할 때 상대방이 도움을 얻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은사로 인하여 내가 도움을 얻습니다. 그럴 때 성령의 은사로 인하여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6절 후반부의 말씀인데, 이것이 바로 각 사람의 은사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입니다. 내가 나의 은사를 제대로 쓰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는 방법은 "내가 사용하고 있는 은사가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양육하고 있는가" 하고 질문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은사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성도들이 도움을 받고 있는가"를 자문해 볼 때,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의 분량에 따라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여, 내 은사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시기 원합니까 ? 내가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내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당신의 은사를 정확히 발견하게 하시고 또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저희 각 사람마다 성령님이 원하시는 대로 은사를 주셨다고 했는데, 우리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여 주시고 발견케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모든 은사를 사랑 안에서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