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후4:16] 보이지 않는 것을 돌아보자

'코이네' 2016. 6. 15. 19:12

 

보이지 않는 것을 돌아보자.

 

본 문: 고린도후서4장16-18

 

 

중심내용: 잠시 받는 환란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이루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다.

설교목표: 영원한 것을 추구하도록

내용요약:바울은 낙심할 수 있는 여러 환경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아니한 것은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지금의 환란은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기 때문에.

 

본 문: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나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서 론.

 

낙심이 무엇인지 잘 아시죠?

사람은 감당하기 힘든 최악의 경우를 맞이하면, 결국 생각하는 것이 “죽어버려야지”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렇게 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리고 말로는 “죽어야겠다”하지만 막상은 못 죽습니다. 말뿐이지...

말로는 죽겠다, 죽는다고 하지만 죽지 못하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목을 매달아 죽으면 “목이 얼마나 아플까” 해서 그만두고, 또 물에 빠지면“그 많은 물을 죽을 때 까지 어떻게 다 마실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니 “그 해답이 아직 안나와서 죽지 못했다”하는 분도 우리 중에 있는 줄로 압니다.

사람이 어쩔때 자살을 생각합니까? 어디서 부터 자살할 생각을 시각합니까? 낙심이 왔을 때 부터 입니다. “낙심” 결코 반갑지 않는 손님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 나가 한번이상은 경험하고 겪어야 할 거부하거나 피할 수 없는 손님입니다.

 

어려운 문제로 낙심을 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물거품 되는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갑자기 사람이 싫어지고, 하던 일이 싫어지고, 꿈도 비전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다 싫어지는 것을 경험해 보았습니까?

“낙심”

세상을 살아가는데 피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낙심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낙심할 일들이 많은 우리 현실 속에서 낙심하지 아니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을 아십니까?

그리고 또하나

뜻하지 않은 환란이나 역경이 찾아 왔을 때 우리의 눈은 어디를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와 삶의 어려운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안목은 어떠해야 하며, 그와같은 상황이 우리앞에 놓여있을 때 믿음을 가진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과 캄캄한 어두움으로 마음은 낙심 가운데 있었습니다. 좌절로 인해 가슴이 미어지고 터질 것 같은 현실을 바울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후1:8-9)라고 기록하면서도 그가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았다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그가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환란과 심한 고생으로 살 소망까지 끓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라고 말하면서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던 그 이유는 무엇이 였을까요?

 

첫째로

바울이 낙심하지 않은 이유

 

먼저 바울이 낙심할 수 밖에 없었던 첫번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였을까요?

 

그것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이였다.

 

사랑하시는 여러분이시여!

혹시 믿었던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고 돌아서는 배신감을 느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 또는 믿고 무조건적으로 섬기고 양육해 왔던 제자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을 배반하고 목장을 떠날 때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첫 번째 바울이 낙심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바울 직접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수고하여 복음을 전한 결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뒤 고린도교회에는 거짓교사들 즉, 삯군 목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또 그들은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자기들이 헌금한 돈을 바울 자신의 주머니에 챙겨 넣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어린 양떼들은, 양무리들은 잘못된 거짓교사들에 의해서 잘못인도되고 있었습니다. 결국에 일부 어린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성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바울은 낙심이 되었을 것 입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고후11:23-27)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르는 일이 있으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기 양무리들이 “목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 분명 이것은 낙심할 수 밖에 없는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또 바울은 “내일 내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삶의 역경 맞이하고 있습니다. 가운데서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는 그와같은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과연 무엇이 였을까요?

“그냥 여기서 인생 끝내?”하고 자살을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이판사판이니까 될대로 되라!” 하고 세상으로 나갔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답하고 있습니까.

 

(16절)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저와 여러분이나, 사도바울이나 낙심 할 수 있는 일은 찾아보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낙심하지 않았던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까?

왜죠? 무엇 때문에,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A.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14절)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죽은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부활!

부활의 소망 그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지 아니고는 극복할 수 없는 낙심이라는 인간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바울은 또다른 사실로 인하여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B. 은혜로 받은 사도의 직분 때문이다.

(4:1절)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어떤 직분을 말하는 것일까요? 목자의 직분입니다. 사도바울은 목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은혜로 주어진 사도직분, 목자의 직분 때문에 환란과 역경을 많이 겪었지만, 그는 또 그 직분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다라고 4: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도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직분도 은혜로 받았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한 귀한 직분! 그 직분이 무엇이든지 감사하십시다. 모든 직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당시 바울에게 주어진 직분과, 오늘에게 주어진 직분은, 세상에서 돈주고 산것이 아니고, 노력하고 시험에 합격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는 사람이 낙심할 수 있는 이유 가운데 또 하나의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이 낙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같은 것 때문에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6절) 겉사람은 후패하나...

 

무슨 뜻인가요?

사전적 용어로는 “썩어서 못쓰게 됨. 썩어 문드러짐. 또는 철저하게 부패하다. 파괴하다. 전적으로 썩다.”라는 뜻 입니다.

 

“후패” 자신이 늙어 간다는 것을 느끼는 세대들만이 느낄 수 있는 “비애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젊고 싱싱한 세대가 어떻게 이 사실을 이해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어린이목장의 총목자이니까 늙는다는 이야기를 전혀 이해 할 수 없다(?)”

 

건강하고 탄력이 있던 자기의 육체가, 촉촉하고 그 아름답던 육체가 쪼글쪼글 해올때 느끼는 비참감은 분명히 사람을 낙심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화장품을 사서 발라도, 육체는 때가 되면 늙어가는 것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몸에 좋다는 것은 다 먹어도 우리의 육체가 어느 시점에서 부터 서서히 늙어가는 것을 우리 눈으로 확인 한다면 낙심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초라한 자신에게 은혜로 주신 귀한 직분과 먼 훗날 주께서 무덤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실 부활의 소망이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이렇게 우리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를 사랑하시는 여러분의 속 마음이 날로 새로와 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도 속사람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겉사람도 있으십니까? 다 안녕하십니까?

그러면 속사람은 언제 지음을 받으셨습니까? 그리고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져 가십니까?

우리의 속사람은 무엇을 먹어야 자라납니까?

우리가 하루 세끼 식사를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끼듯이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속사람을 위해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여야합니다. 또 하루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영적인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자라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세상의 것들로 우리의 외모를 치장해도, 우리의 영혼은 결코 참만족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날로 새로와 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느날 낙심할 일들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찾아왔을 때, 바울처럼 우리에게 아무런 값없이 주어진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부활의 소망을 기억하시고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날이 갈수록 후패해 갈 것 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겉사람이 후패한다는 사실로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는 부활의 소망을 굳게 잡으시길 바랍니다.

모든것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죽으면 끝이다!” 라고 생각하는 죽음 저편,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못자국 난 손으로 우리를 영접하실 주님 예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될 소망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라는 믿음으로 자신의 겉사람은 늙어가나 거듭난 속사람이 날로 날로 새로와지는 사실을 인하여 결코 낙심하지 않았던 바울에게서 오늘 우리가 분명히 배울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바울의 영적인 안목

 

(18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그는 바라보았다.

 

사람마다 문제나 사건을 바라보는 자기 관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를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린이는 언제나 자기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 말합니다.

 

만약 “꼭 돈이 있어야 행복이다” 또는 “꼭 명예를 얻어야 행복이다” 아니면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행복이다” 라고 행복을 정의한다면, 사도바울이 (고전15:19) 에 기록한 말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라는 성경 말씀이 틀린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판단하고, 바라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영적인 세계이다.

섬김용서사랑을 실천하는 힘이 어디서 부터 공급이 되는 것인지를 거듭나지 아니하면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정말 천국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죽음이나, 이별이나, 눈물이나, 고통이 없는 그 나라, 황금 길과 온갖 보석으로 만들어진 그 나라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우리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을 과연 믿고 계십니까?

 

그때에는 우리가 서로 미워하지 않을 것 입니다(시기, 원망, 투기,)

그때에는 우리가 서로 온전한 사랑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정말 지옥도 있다고 믿으십니까?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 그리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저주만이 있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된 지옥을 과연 믿으십니까?

그러나 천국도 지옥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영적인 안목입니다.

 

바울은 오늘 자신에 닦아온 환란을 통하여 그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바라본 것 입니다. 때문에 그는 환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라고 (행14:22)에 기록하고 있으며, 또 오늘 본문 17절에서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기록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바울이 환란을 너무 많이 겪어서 정신이 잘못되어 버린것 일까요?

바울사도 같이 환란을 많이 겪은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환란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잠시받는..... 경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 였습니다.

 

어린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고 섬기는 사역이야말로 끓임 없는 수고와 희생을 수없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감당하기가 힘든 일 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일이 “힘들다”라고 느껴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이시여!

오늘의 현실만을 보지 말고 눈을 들어서 앞으로 우리에게 닦아올 영광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데반이 바라본 그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이시여!

환란과 역경이 왔을때 주변의 환경만 바라보고 낙심하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통치하고 계시는 왕중왕되시는 우리주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말한 돌아본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돌아본다”는 것이란? “주목하다”“관찰하다”라는 뜻이다.

 

본문18절에 바울이 돌아본 것은 무엇이 였을까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바울이 추구했던 삶이였습니다.

 

세 번째로

바울이 추구했던 삶

 

요즈음 여러분이 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즈음 여러분의 돌아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당시 바울의 매일 관심사는 무엇이 였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새로 유행하는 이 무엇인가? 헤어스타일은 무엇인가? 요즘 살만한 아파트는 어떤 것인가? 요즈음 즐길만한 것이 무엇인가? 아니면 요즈음 새로 생긴 음식점은 어디며, 입에맞는 음식은 무엇인가?를 주목하고, 그와 같은 것들을 관찰하였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무엇일까요?

 

바울은 잃어버린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와서 구원 얻도록 그는 쉼없이 그리스도를 전파하였고, 최고의 학부를 나왔어도 마땅히 알아야할 하나님과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서 어리석게 살아가는 영혼들과, 하나님의 양무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고 섬기는일에 자신의 재물을 허비하였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영혼들을 돌아본 것 입니다. 바울은 자기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데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교회에 더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교회를 더 잘 섬길 것인가를 기도하면서 환란과 고난을 거부하지 않고, 그날 주께서 주실 영광스러운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 이였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도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돌아보고 계십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히11:1)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 나라를 믿음으로 보고 계십니까?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에 비교해 보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눈에 보이는 피조의 세계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의 환란이 아무리 견디기 어렵고 힘이 들지라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에 비교하면 잠간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비쳐 보이는 지금의 피조의 세계가 아닌, 우리 눈에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죽음 저편에 준비되어 있는 그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 입니다.

영원한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1.하나님

2.하나님의 말씀

3.영혼 이세가지가 영원한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가 우리 눈에 선명하게 다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것 입니다.

 

A. 우리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 십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타락한 눈으로, 이미 범죄한 죄인의 위치에서 그분을 알 수도 만날 수도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인류의 첫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영적인 죽음이 와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죄 가운데 살다가 결국은 무서운 심판과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그 나라로 다시 올 수 있도록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시고 죽게 하셨다.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값없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계시는 분이 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영원합니다.

 

B.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합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마24:3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말씀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있어서 여전히 미스테리의 책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합니다.

 

C.영혼이 영원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원은 죽지 않고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 즉, 무서운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의 죽지 않고 영혼은 영원히 영원히 살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이 영원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의를 행하시다가 뜻하지 않는 환란이 오고, 생의 위기 찾아 왔다면 지금 눈앞에 당면한 문제와 환경만을 바라보지 마시고 오늘의 역경과 환란뒤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 영원한 나라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바울의 삶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감옥에 보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로 생각하고 그 가운데서 생의 의미와 행복과 만족을 누리고 했던, 어리석게 살아가는 사울 이였던 바울 이였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가 자신의 죄를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음으로 모든 죄를 눈과 같이 희게 씻어 내렸다는 복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는 자신이 살아왔던 삶에서 180도 전환을 합니다. 그가 추구하던 모든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걸어가신 가시밭길을 걸어갑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좁은 길로 그는 들어선 것입니다.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가치를 발견하자 그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그는 좁은 길로 달려간 것 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면 영원한 것을 바라 볼 수 있는 안목이 지금 보다는 훨씬 더 넓어질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영적인 안목이 넓어져야만 바울처럼 살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야만 더 큰 사랑을 베풀 수 있고, 용서를 할 수 있고, 관용을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 성장을 멈추지 마십시요. 더이상 어린아이로 머물러있지 마십시요.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영적인 것을 얻기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기를 마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꾸준히 성장하는 사람 이였습니다. 바울처럼 성장을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삶을 살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낙심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우리를 낙심케 할 때마다, 환경만 바라보지 마시고 오늘 여러분에게 주어진 직분을 인하여 오히려 감사하며, 예수를 무덤에서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그 어느 날 나를 완전케 해주실 것이다라는 부활의 소망을 확신하시고 낙심과 절망과 좌절의 자리에서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내 삶 가운데 다가온 문제로 인하여 좌절과 낙심에 빠지지말고 오히려 오늘의 환란이나 어려움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하면 너무 작은 것”이라고 여기고 환란과 역경 가운데서도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사실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고 오늘을 살아가는 천국 나그네임을 명심하시고 영적인 성숙과 안목을 넓혀 가는데 여러분의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시기를 바랍니다.

 

유럽 속담에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관에 구멍을 뚫어 손을 밖으로 내서 장사를 지내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 인생의 어느 날 갑자기 닥치게될 죽음 앞에서는 오늘 우리가 수고하여 얻은 모든 것이 다 아침안개와 같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를 위하여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위하여 투자한 물질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환란을 통하여 연단 되어진 우리의 성격이 주님 닮은 성품으로 변화된 우리의 영혼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오늘 나에게 주어진“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보이지 않는 곳에 투자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로 주신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어디에다 투자하시겠습니까?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