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전4:14] 능력이 나타나도록 삽시다

'코이네' 2016. 6. 15. 19:07

 

능력이 나타나도록 삽시다.

 

고린도전서 4:14-21

 

 

서론 : 요즈음 저의 마음속에는 눈물이 자주 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이 민족의 앞날과 우리 한국 교회의 미래를 생각 할 때에 고여 오는 것같습니다. 최근 고맙게도 근검절약을 국민 사회 각 단체들이 스스로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일제하에서도 고당 조만식 선생이 물산장려회라는 이름으로 전개해 오던 운동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치와 허영 과소비를 막자는 것입니다. 모든 부분에서 검소하고 절약하자, 부지런히 일하여 남을 도우며 인간답게 살자는 운동입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 연방에서 이러한 운동을 한국 정부가 조종한다고 하며 자기들 나라의 물건이 한국 안에서 잘 안 팔린다고 은근히 압박을 하며 내정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을 정부의 꼭두각시로 보는 무식한 판단이요, 우리 국민을 깔보며 우리 정부를 우습게 여기는 건방진 자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골프를 얼마나 좋아하고 그게 건강상 얼마나 유익한지 모르겠지만 꼭 골프를 미국 골프채나 일제 골프채로 쳐야 하는가 말입니다. 지난해 미국 골프채가 400억원어치가 수입되었는데 세계 제 2위로 미국 것을 수입하였다는 것이요, 일본 것은 130억원어치인데 그것도 지난해 8월부터 5개월 사이에 수입한 것으로 세계에서 일본 골프채 수입을 제1위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합니다. '아 답답한 이 민족을 주여 일깨워 주소서'하며 절로 눈물이 납니다.

 

여러분 옛날 이 승만 대통령에게 이 강석이라는 양자가 있었는데 주변의 아첨하는 정치 인사들이 그를 "귀하신 분"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제 5공화국 시절에 대통령의 동생을 "대군님"이라고 불렀답니다. 그리고 지금 대통령의 차남을 아첨하는 정치 인사들이 무엇이라 불러 주었는지 이미 아시고 계시지요, '소통령', '부통령', '황태자'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거기에다가 총리, 당대표, 국가 방송국 이사 등등의 공적인 일에 개입되어 개골 망신을 당하는 것은 보고 있습니다. 겨우 4년밖에 안되는 기간에 모든 명예와 존경심을 다 잃어버리고만 그리스도인 대통령의 가족입니다. 독일의 헬모트 콜 수상은 지금 15년간 총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의 거인이라고 불려지며 여지껏 친인척으로 인한 비리나 가족의 프라이버시를 떨어트린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재작년에 아들이 결혼을 하였는데 어디서 했는지를 전혀 밝히지 아니하였고 콜 수상도 아들의 결혼식에 의도적으로 참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메스콤에 가족 관련사가 언급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맑은 정신이 들여다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대통령의 가족과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국 대통령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국민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정치를 해도 어려울 판인데 사과를 하고 저같이 신망을 완전히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물론 대통령의 가족이 한국 그리스도인의 대표는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 그리고 이 민족을 구원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지장과 손상을 줄 것인지 대단히 염려스럽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요즈음 어떠하실까?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고여옵니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며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중 주님의 감동하심을 받은 성경 말씀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본래는 괴로움을 기뻐하며 삽시다로 하였다가 이 괴로움을 기뻐하는 것은 능력을 나타내는 것임으로 "능력이 나타나도록 삽시다"로 조종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있으나 능력이 없으면 결국은 패배 당합니다. 돈은 있으나 남을 위하여 쓸 줄 아는 능력이 없으면 그것으로 괴락의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보세요(고전5:-6:) 가진바 재산과 건강으로 음란죄를 짓고 있습니다. 많은 지식과 학벌이 있으나 능력이 없으면 그것으로 교만을 떨며 남을 무시하거나 비판을 일삼으며 인기에 휩싸여 시간만 낭비하는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이 문제를 고전1:19-2: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은사도 많고 구변 곧 말도 대단히 잘합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은사와 그 말재간을 가지고 사람을 끌어 모아 당을 만들어 자기들의 신령성과 모임의 숫자를 뽐내며 서로 자기들의 지도자가 제일이라고 자랑하며 선전하기에 모든 것을 투자하다가 혹시 자기들보다 더 유명해 보이는 파가 나타나면 서로 깎아 내리고 시기하며 다툽니다. 이것이 고전1:4-17에 나타난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요 장로의 가정이요, 부족한 것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능력이 없어 저렇게 부끄러움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능력입니까? 어떤 사람이 능력을 받은 사람입니까? 그 대답이 골1:24입니다.

 

1. 남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이 능력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능력은 전능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 곧 만민을 위하시는 데서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능력을 받은 자라면 다른 사람을 조건 없이 위해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기만을 위하는 사람 고작해야 자기 가족의 안일만을 위하는 사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능력자가 아닙니다.

 

2. 능력이란? 남을 위할 뿐 아니라 남을 위하다가 괴로움을 당하면 그 괴로움을 기뻐할 줄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만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을 기쁘게 당하셨습니다. 물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돌려 주십시요,하고 기도하시기도하였지만 그것은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요, 결코 만민을 위하여 죽는 것을 슬퍼하고 불평하며 당신을 팔아먹은 유다나 못박는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몸과 마음에는 고통과 아픔에 쌓여 있는 십자가상에서도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게 능력입니다. 내게 괴로움이 오지만 그것이 남울 위하다가 온 고통입니까? 주님에 대한 신앙과 진리 실천을 위하다가, 주님이 맡겨 주신 일을 수행하다가 당하는 괴로움입니까? 그 때에 그것을 기뻐 할 줄 아는 사람이 능력을 받은 자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미워하고 저주하고 욕하며 걸핏하면 시험에 드는, 이런 사람 아무리 기도 잘하고 말 잘하고 은사 많고 성경 지식 많고 목사 안수 집사 부흥사일찌라도 능력은 없는 자입니다.

 

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에 채울 줄 아는 사람이 능력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개인과 한 지역과 한 민족을 구원하는 공동체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뿐입니다. 바울은 이 교회를 위하여 어떤 고난과 희생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을 합니까? 먼저 믿는 성도가 한 가족 한 형제 자매로서 뜨겁게 피차 사랑하며 대접하며 봉사함으로 깊은 교제를 이루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 전도와 선교입니다. 신앙 인물 키우기, 제자 양육입니다. 사랑의 실천 구제입니다.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나타날 선한 일을 전개하는 곳입니다. 바로 이러한 교회의 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희생과 고난을 받아 드릴 줄 아는 사람이 능력을 받은 자입니다. 그 어떤 고난과 희생도 겁내며 피하며 몸을 도사리는 자들은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과 함께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잔칫집에 참여하여 신기함을 맛봤던 제자들,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하여 군중의 인기를 누려 보았던 제자들, 변화 산에 올라가 예수님의 놀라운 변화를 보는 황홀한 경지를 맛보았던 제자들, 귀신이 물러가고 각종 불치병자가 치료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어마어마한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였던 제자들, 그러나 마지막 고난과 희생의 순간에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부인하고 욕하고 저주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능력이란 적극적인 면에서 교회와 하나님의 일을 위한 고난과 희생의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 능력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하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을 능력이 없어 해마다 잎만 무성한 나무는 주인이 계속 가꾸어야 할 이유가 없고 땔감으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나무는 열매로 능력을 나타냅이다.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인 우리에게도 말만 많이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나 왜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까? 자, 이제 능력이 무엇인지는 알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능력이 나타날까요?

 

1) 일만 스승으로 살지 말고 아비로 살아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본문14-15를 봅시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여러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첫째 이유는 아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믿는 사람의 인간관계는 언제나 아비 아니면 자녀의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불신자를 대할 때에는 아직 태중에 있는 생명 인줄 알고 그들을 조심스럽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할 때까지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의 온기와 친절과 평화의 복음이 심령 속으로 흘러들어 가도록 너그러움과 자비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출석하고 이제 막 믿기 시작 한 사람은 신생아입니다. 신생아는 얼마나 연약합니까? 싸고 뭉개고 울고 보채고 쉽게 배탈나고 정말 정말 얼마나 많은 정성이 필요합니까? 아비는 이런 아이를 깊이 이해하고 씻어 주고 달래 주고 먹여 주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상처를 받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써야합니다. 이와 똑 같이 여러분은 목사가 아니더라도 아기 신자를 아비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들은 여러분을 통하여 양육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아직 헌신 단계에 이르지 아니한 성장 과정에 있는 신자들이 제일 많습니다. 그들에게도 진실한 사랑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수치감과 열등감, 무가치감을 갖기 쉬운 성장 과정의 신자들이 많습니다. 무엇을 해봐도 잘 안되고 자꾸만 실수하고 세상의 유혹에 끌려 죄를 짓습니다. 이들에게 보다 깊은 대화와 믿어 줌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너희를 부끄럽게 아니하려함이라. 사랑하는 자녀들을 권면하듯이 권면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포근한 말입니까? 여러분, 스승이 되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별난 교회 이 남하 목사님은 아비가 되기 위하여 스승이 되기를 포기하였다고 고백하였는데 정말 깊은 깨달음입니다. 바울사도는 스승과 아비의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일만 스승보다 한 명의 아버지가 더 도움이 되고 유익을 줄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르치고 권면하고 앞길을 제시하고 좋은 말을 많이 하면서 정말 어려움을 당할 때 전혀 도와주지 않는 일만 스승보다는 한 명의 아버지가 어린아이들에게는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버지는 일만 스승보다는 지식이 모자라고 인격이 모자라다고 해도 늘 함께 살면서 먹을 것을 주고 입을 옷도 사주고 어려움을 당할 때 가까이서 도와주고 시간을 내서 놀아 주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고 때로는 눈물로 책망해 주는 사랑의 아버지가 사랑과 희생이 없이 말로만 가르쳐 주는 일만 스승보다 더 어린아이를 돕는 면에는 더 필요하고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말만 많이 하고 지식과 이론만 많이 가르쳐 주고 사랑하지 않고 희생이 없는 일만 스승보다 희생과 사랑과 도움을 주는 한 아버지가 훨씬 낫다는 입니다. 사랑과 희생이 능력인 것입니다. 목숨 내걸고 낳아 주고 길러주신 엄마 아빠가 자녀를 기르듯이 한 사람을 전도하였으면 영적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서 잘 자랄 때까지 보살펴 주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억 하십시오. 능력은 우리 모두가 아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때 나타납니다.

 

2) 순종하는 삶에서 능력이 나타납니다.

무엇에 순종해야 합니까? 주님을 본받아 말씀에 순종하고 앞서간 사도들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본문 16-17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를 인하여 내가 주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우리는 아비가 아니면 자녀의 입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나 신앙의 지도자들 앞에는 언제나 자녀입니다. 자녀들에게는 부모를 향하여 공경과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실력이 나타나고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순종이란 결코 비굴한 것이나 무지한 맹종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한 자가 옳은 것을 선택한 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많은 성경 이야기를 합니까? 예수님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순종하셨기에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에게 마음이 끌려 들어갑니까? 말만 많이 하고 그래로 살지 않는 사람은 믿어 주지 않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을 신용할 수 없습니다. 말한대로 약속을 지키고 그대로 사는 자가 능력자요, 실력자입니다. 말만하고 자기가 말한 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그 말속에 능력이 없습니다.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음은 바로 말한대도 순종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 곧 능력이 있고 실력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말은 적게 하고 자기가 말한대로 실천에 옮기고 삶을 보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말한 교훈은 따를 뿐 아니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신감과 능력 있는 말은 그가 순종하는 삶,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 1200만명이나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나라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의 말씀을 몰라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알기는 아는데 순종을 안해서 그렇습니다. 만일 김 대통령의 아들이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고 예수님을 본받고 앞서 간 조만식 장로, 남강 이 승훈 선생, 월남 이 상재 선생을 본받았더라면 어떠하였을까요? 그러나 대통령 아들은 물론이요, 많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도리어 부정 부패하는 장소에 끼어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려면 자기를 희생시키려는 태양과 같이 되어야 하고 세상의 부패를 막으려면 소금처럼 말없이 희생하여 자신을 녹이는 순종의 실천이 있어야 겠습니다.

 

3) 겸손과 온유는 능력의 척도입니다.

오늘 본문 18-21을 보세요'진정 능력있고 실력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별 할 수 있는 지혜를 언급합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진정 눙력있고 실력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울님은 겸손한 자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사람 앞에 서는 자라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 사랑과 온유는 없이 남의 잘못과 약점만 발견하여 매를 들고 때리려 하는 자, 자녀를 몽둥이로만 키우려는 부모 모두가 능력이 없어 그런 것이라는 말이요 실력이 없다는 증거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후한 까르로스 목사님의 멋진 간증이 생각납니다. 한번은 아들을 체벌했습니다. 아이가 울며 제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목사님 마음도 몹시 아팠습니다. 한 시간 뒤에 목사님은 아들의 방문 앞으로 가서 문을 살짝 열어 보았습니다. 책상 앞에서 아직도 눈물을 조금 흘리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 "아빠가 밉지?" 아들은 "아니요" "아빠가 너를 때렸는데도 안 미워?" 아들은 "아빠가 나를 사랑하니까 때렸지요" 이것이 바로 능력이요 실력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다른 사람의 수준 이하로 낮추고 굽혀 그들을 섬기는 힘입니다. 결코 남에게 무안을 주지않습니다. 사람이 몰라주고 칭찬을 안 해줘도 낙심이나 실망, 섭섭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주님이 은밀한 중에 보고 계셔서 상도 주고 위로도 해 주시고 인정도 해 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없으면서 있는 체 하고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가지고 있는 체 하는 자 입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열매 없으면서 열매 있는 척보이는 실속이 없는 사람입니다. 실천적인 삶이 없으면서 입으로 사는 것처럼 말하는 자가 교만한 자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말이나 생각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가 아니고 남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자들입니다. 실력이 없으면서 스스로 자기를 높혀 실력 이상 자신을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들은 그들의 그럴듯한 말을 알아 볼려고 하지 말고 그들의 삶을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말장난에 놀아나지 말고 참고 기다리면서 삶의 열매를 보고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말을 알아보려고 하지 말고 능력이 나타나는가 그 능력을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말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 봐야 합니다. 그의 인격과 삶이 형편 없으면 그가 무슨 그럴듯한 아름다운 말을 할지라도 믿어서는 안되고 비록 말이 매끄럽지 못해도 그의 삶의 열매가 있으면 그 중심을 보고 그 말을 받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그럴듯한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고 죽게 되었습니다. 사단의 능력을 알아보지 않고 말만 알아보고 행동에 옮김으로 멸망 길로 간 것입니다.

 

* 16세기에 빌립네리라는 아주 훌륭하고도 지혜로웠던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교황이 로마 부근 수도원에 있는 어느 수련 수녀가 갈수록 명성을 얻게 되자 빌립네리를 시켜 그 이유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성녀로서 평판이 나있었습니다. 네리는 노새를 타고 한겨울 진흙과 수렁 속 길을 달려 수도원에 다달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켜 그 수련 수녀를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그녀에게 오랜 여행 때문에 진흙 범벅이 된 그의 신발을 벗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화가 나서 뒤로 물러나서는 그런 천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명성을 얻고 있는 자신이 그런 일을 요구받다니, 그녀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났습니다. 네리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수도원을 떠나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이젠 놀라실 것 없습니다. 거기는 성녀가 없어요. 왜냐하면 겸손히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이 없으면 능력도, 성자도, 영웅도, 그 어떤 유명도 다 없는 것입니다. 남 앞에 나서는 일, 칭찬이 몰려오는 일 말만 화려하게 떠버리는 사람, 선생으로 은인으로 어른으로 왕초로 대우나 대접만 받으려는 사람, 몸과 마음 때로는 물질까지 다하여 섬겨야 할 자리에는 수단 방법 다 동원하여 빠져나가는 사람, 희생과 온유로 남을 보살펴보려는 마음이 전혀 없이 남을 잘못과 약점만을 지적하고 몽둥이질하는 사람 혹시 나는 여기에 걸려들지 않는지요?

 

본문 21절처럼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일만 스승으로 말만하며 살겠습니까? 아비의 마음으로 뭇 사람을 살리며 키워 주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가르치며 비판만 하는 잎사귀만 무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말한 대로 순종하여 삶의 본을 남기는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쭐대며 대접받고 남을 몽둥이 질하는 교만한 삶을 원하십니까? 겸손히 사랑과 온유로 뭇 사람을 받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선택 하십시오. 다 함께 기도함으로 우리 의 앞날을 주님께 부탁하십시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