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출애굽기

[출3:12]지존자 하나님의 숨겨진 사랑 표현

'코이네' 2016. 6. 14. 21:59

  지존자 하나님의 숨겨진 사랑 표현

 

(본문 : 출애굽기 3:12-14, 역대하 20:17 참고)

 

(Ⅰ)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해서 이삭, 야곱, 요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구속사를 이뤄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역시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인물에게 호렙산 떨기 나무 가운데 초자연적으로 현현하시어 고통받는 이스라엘(7-8절)의 구원자로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모세가 기쁨으로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왜 이제 오셨습니까?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한 마디는 “I Can't do it.”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데‥‥‥

‥‥‥ 이스라엘 자손을 ‥‥‥ 인도하여 내리이까?”

11절의 말씀은 이러한 말이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제가 왜 갑니까?”

잘 보십시오. 잘 보시면 모세의 반응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이 상황은 꿈 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신 정도가 아닙니다. 꿈이 아닙니다. 벌건 대낮에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 않고 불이 올라붙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린 벌써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라고 말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모세는 하나님께 말을 함부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관데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제가 며칠 있으면 군인이 되는데 제가 고참한테 이렇게 대꾸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내 콧구멍으로 시뻘건 시냇물이 흘렀을 텐데 하나님은 모세의 말대답을 끝까지 아무런 화냄 없이 받아 주고 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14절)

그러나, 모세는 요나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욥바로 도망가 버린, 거의 같은 수준의 똥고집으로 계속해서 그의 부르심에 맞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4:1)

결국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라는 권위의 상징물인 지팡이를 주면서 보내려 하지만 이번에는 “무대 공포증”이라는 마지막 히든 카드를 내보이면서 “I can't do it.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10절)라고 또 대꾸합니다.

여러분!! 성경의 사건을 잘 살펴보시고 그 때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참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서서히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모세가 가겠지요! 아닙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고집에 반항합니다.

“하나님! 제가 뭐라고 말씀드려야 알아듣겠습니까? 전 못합니다. I can't do it!!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라니요. 하나님 미안하지만 잘못 찾아오신 겁니다.”

결국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셨습니다.

“레위 사람에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다.”

마침내! 결국! 드디어! 하나님의 고집은 모세를 완승으로 무릎꿇게 만들었습니다.

 

4장 2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고집입니다.

(하나님의 고집 ex : 창세기 25-30장의 야곱의 생애를 비롯해 욥, 베드로, 요나, 다윗)

 

(Ⅱ)

그렇다면 출애굽기 3장부터 4장 19절에 이르는 긴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은혜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3장부터 4장 19절에 이르는 모세의 부르심과 모세의 반항의 내용을 단 몇 구절의 내용으로 요약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자신은 약한 자라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계속 반항하자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록하지 않음에는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우리의 영혼을 감격하게 할 하나님의 강렬한 은혜의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 번 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맘으로 함께 고민합시다.

 

(Ⅲ)

먼저 우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말할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self-existent)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궁극적 원인자로서 인간의 판단 없이 스스로 홀로 존재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들이 존재하기 위해 그에게 의존하는 반면에 하나님은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존재하시고 결정하시는 하나님은 스스로 충분하신(self-sufficient) 분이기도 합니다. 고로 신(神)은 인간과 협력하고 인간은 신과 협력하며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상호 의존 관계라는 개념은 인간의 가치가 신과 동일 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통속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성경의 진리일 순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자라는 것이나 변호해 줄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때로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 앞에서 하나님을 변호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변호하지 않는다 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꽝!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변호를 받아야 비로소 하나님이 된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돕는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속성과 우리의 헌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이러하시다면 굳이 하나님의 일을 모세에게 하라실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나님은 단 한 마디의 말씀(“죽을지어다”)으로도 골리앗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다윗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로 하여금 물매돌을 돌려 골리앗을 죽이는 방법을 택하셨을까? 하나님이 째려봐도 와르르 무너질 여리고성을 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성 주위를 돌려 무너뜨리는 방법만 고집하셨을까? 그 일은 모세라는 인물만이 해야만 했는가?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제한 받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우리 인간들은 시간(우리는 역사의 한 시점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장소(교회와 안방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 힘, 지식에 제한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면에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이 방법이 아닌 수백만 가지의 방법들을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 왜 굳이 모세를, 다윗을, 우리를 자신의 전쟁에 동참케 하는 방법만을 고집 하십니까?

 

사실 이러한 하나님의 고집 속에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 숨겨져 있습니다(스바냐 3:17). 하나님께서 모세를, 자신의 백성을, 케냐로, 우간다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아니면 직장으로, 학교로 보내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 곳에서 하나님의 선한 싸움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는 “승리의 영광”을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누리고자 하는 우리를 향한 지존자의 사랑 표현인 것입니다.

 

(Ⅳ)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표현이 내 맘에 들지 않다고 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치 모세나 요나처럼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까요? 아닙니다!! 그 분은 또 다시 요나를 삼켜 버렸던 거대한 물고기를 출동시켜 우리의 똥고집을 삼킬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까? 심심해서? 아니면 우리의 힘이 필요해서? ‥‥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은 아직도 많은 것을 원하시지만 결코 부족한 것이 없으시며, 아직도 많은 것을 찾으시나 실상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며,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나 찾을 때마다 기뻐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하다면 결국 하나님의 고집은 그 찬란한 홍해 바다를 가르는 영광의 승리에, 모세와 자신의 백성들을 참여케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소리 없는 강렬한 사랑 표현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Ⅴ)

그렇다면 출애굽기 3장 13-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지금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을 시키시기 전에 이러한 얘기를 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 말은 이런 말입니다.

“내가 네게 나의 일을 맡기기 전에 네게 필히 할 말이 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며, 너의 변호함이 필요치 않는 만군왕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네게 나의 일을 맡기노니 가라. 이유는 묻지 말고!”

결국 하나님께서 노하시면서까지 모세를 보내심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노하심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십니다.

 

(Ⅵ)

여러분! 이제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사로, 집사로, 권사로, 평신도로 부르시고 “내 증인이 되라” 명령하시면서까지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동참할 것을 고집하신 그 이유를 알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 표현 앞에 겸손히 무릎 꿇어야 합니다.

더 이상 싫다고 도망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과 핍박으로 지금 당장은 울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거부할 수 없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쟁이므로(삼상 17:47)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하나님의 금빛 찬란한 보좌에서 할렐루야를 외치며 그 분과 함께 영광스런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승리의 영광을 누리고 있을 자기 자신의 모습을 곧! 볼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에 지금 당장 응하십시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받으소서”라고 고백하십시오. 이 고백과 함께 새 역사는 열릴 것이며 이 고백은 결국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이 하나님께 드렸던 진정한 사랑의 고백으로 바뀔 것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8:1)

우리로 일하게 하신 이유!!

모세로 일하게 하신 이유!

바로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지존자 하나님의 잔잔한 사랑의 고백인 것입니다.

 

 


by 코이네자료실

 

'설교자료 >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4:1] 나를 통해  (0) 2020.06.29
[출3:14]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0) 2016.06.14
[출3:10] 모세의 겸손 세 가지  (0) 2016.06.14
[출3:7] 모세의 파송  (0) 2016.06.14
[출3:7]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0) 2016.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