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자료

이어령 교수 '로고스는 지성과 영성 모두 있어야 성립한다'

'코이네' 2016. 4. 24. 01:42

로고스, 지성과 영성 모두 있어야만 성립돼

 

-박사님은 ‘지성’의 상징과 같은 분이셨는데, 요즘 강연에서는 ‘영성’을 더 강조하고 계십니다.

 

“당연하지요. 지성은 제가 할 수 있는 몫이고 50년간 책을 읽으며 가르치고 배워온 것이지만, 제게 가장 결여돼 있는 부분이 영성입니다. 근대 합리주의를 뛰어넘지 못하면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가 ‘무한정신’이라고 한 것이 하나님인데, 인간 정신은 ‘유한정신’이지요. 다음에 물체들과 기계들은 ‘확충’만 있지 ‘생식’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무한정신’, 즉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의 ‘생각’은 무한정신이 아니라 ‘유한정신’입니다. 그러니 신을 인정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시계 태엽을 감지만, 움직이는 것은 시계입니다. 그러니 처음에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시고 인간이라는 유한존재를 만드셨지만, 다음에는 간섭하지 않고 우리의 법칙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시계 태엽을 감으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돌아가는 건 우리라는 것이지요. 관여하지 않으신다. 시계가 안 가면 ‘시계 죽었네’ 하고 다시 돌리잖아요? 이것은 유신론(有神論·Theism)이라 하지 않고, 이신론(理神論·Deism)이라고 합니다. 이치로 따진 신, 생각 속에 있는(thinking) 신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무신론보다 더 나쁩니다. 신을 인정하면서도 나와 관계 없다는, ‘죽은 신(Dying God)’이니까요.

 

그러므로 근대 합리주의 지성을 버리는 게 아니라 그 데카르트적 지성을 넘어서는 것, 우리가 이성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라 이성에서 자유로워지고 이성을 넘어설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숫자나 언어가 아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힘 말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 ‘인간이 신 되는 이야기’
기독교만은 어디까지나 피조물로서 가는 것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

 

“그러니까 성서를 보면, 우리가 다 알아듣기 쉬운 말로 돼 있습니다. 이것은 지성의 언어이지요. 로고스, 말씀은 지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멘, 할렐루야, 호산나, 달리다쿰’처럼, 번역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전 세계가 다 번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멘’ 대신 ‘예, 믿습니다’ 해도 통할 텐데, 왜 안 했을까요? 영성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말로는 번역이 불가능합니다. 그건 지적 언어가 아니라, 영성이 붙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지적인 걸 다 빼내면, 주문(呪文)이 돼 버려요.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지성과 영성이 함께하는 것이 ‘로고스’입니다. 말씀은 지성과 영성이 한 몸 되는 것으로, 둘 중 하나를 빼내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 인간이 신 되는 이야기이지요. 나도 믿으면 신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최후 심판에서 영성을 얻는다 해도, 어디까지나 피조물로서, 아들로서 가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친구, 동격(同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게 다른 종교와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신의 입장이 되려는 것이 바로 원죄이고 쫓겨난 이유인데, ‘나는 무죄하고 모든 것이 신과 같다, 그렇게 깨끗한 자다’ 이렇게 원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최후 심판 때 구원을 못 받는 것이지요.

 

원죄라는 게 무엇입니까? ‘신이 되려 했던 욕망’ 아닙니까? 사람들이 자꾸 원죄가 뭔지 모르는데, 딱 하나입니다.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인간이 신처럼 되는 걸 질투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인데, 자격 없는 이들이 조물이 되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비와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싫다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우주 질서를 거역하는 것이지요. 인간이 완전하면 모르겠지만, 자기 판단으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물을 담으려 만든 이 컵이 말하는 능력을 가져서 ‘뜨거운 건 넣지 마’ 하는 것 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지성은 이미 50년간 제가 쓴 글에 다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영성의 세계가 붙음으로써, 제가 옛날에 신을 욕하고 무신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들도 다 해석과 모든 논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같은 성서이지만, 이전에 무신론자로서 읽었을 때와, 영성 있는 크리스천이 되어 읽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마치 시커멓고 괴상해 보이는 네거티브(negative) 필름을 인화시켜 아름다운 포지티브(positive) 필름으로 바꾸듯 말입니다. 영성은 인화지에 자신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해골처럼 찍혔던 것이 제대로 모습을 갖춥니다. 천국은 사진을 인화하는 곳과 같습니다. 거기에 나를 맡기면, 내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게 신은 아닙니다. 어디까지 ‘아담’이지요.”

 

-얼마 전에도 교회에서 강연을 하신 것으로 아는데, 목회자나 신학교수과 만나면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시는지요.

 

“저는 그분들과 충돌하거나 서로 의견이 다른 게 아닙니다. 그분들은 ‘신학(神學)’을 하시고, 저는 거기서 니은(ㄴ)을 뺀 ‘시학(詩學)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텍스트 읽기를 하고, 그분들은 실천하고 봉사하는, 분류하고 적용하고 요리해 내는 역할이시지요. 제가 문학작품에서 보통 독자들이 못 읽어내는 뜻을 발견해 주듯, 신학에서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플라톤도 같은 이야기를 했지요. 시인들은 공화국에서 내쫓아야 할 존재들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이데아’의 세계를 가장 실감 있게 말해줄 사람은 시 쓰는 사람들이라구요.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데(실낙원), 에덴동산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일은, 시인이기 때문에 어느 목사님들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령교수,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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