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통한 믿음
창 23장
23장은 사라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이삭을 낳고 그 후로 37년을 더 살았습니다. 사라는 127세에 죽었습니다. 이삭은 어머니 사라가 죽은 뒤 3년이 더 지난 다음에 결혼을 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자주 갔던 마므레 상수리 수풀 가까이 있는 기럇아르바에서 죽었습니다. 사라는 임종시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는 성경의 유일한 여인입니다. 사라는 혹독한 면도 있었지만 신앙의 어머니로 볼 수 있습니다. 사라는 약속된 씨의 어머니 즉 구약의 마리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의 할머니로 나이를 나타내서 존경을 표시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슬피 애통하였습니다. 사라가 장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의 죽음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127년의 세월도 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래 이 땅에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기에 나이에 관계없이 어느 때든 찾아 오는 이 죽음은 무자비한 침입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위해 애통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라를 깊이 사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장차 그리스도가 오실 그 날에 일어날 죽은 자의 부활을 알지 못하였따면 어떻게 이 슬픔을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날이 이를 때 사라는 죽음의 속박에서 자유로와질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이 죽었을 때 그들은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사라는 죽어 아브라함을 떠났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사라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라는 주님과 함께 거하다가 어느 날엔가 홀연히 새롭게 변화된 몸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사라 역시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 안에서 사라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들판 아무 곳에나 사라를 장사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아브라함은 자기 후손들이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할 것이라는 표시로써 사라와 자신과 그 후손들에게 까지도 사용될 수 있는 묘지를 마련하였습니다.
땅에 묻히는 것은 육체의 물리적인 파멸을 뜻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신자들이 땅에 묻혀 보존되는 것은 장차 모든 신자들이 그 땅과 함께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사라를 헷 사람들과 함께 매장하기를 거절하고 자기 소유의 가족 묘지를 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 곁에서 일어나 그 땅의 성문에 앉아있는 사람들한테 가서 돈을 주고 그 땅에서 묘지를 샀습니다. 마므레 상수리 나무 근처의 밭을 막벨라 굴과 함께 샀습니다.
여러분 저 미국 땅에다가 묘지 살 사람 있을까요? 만일에 그 노인들이 미국에 갔어요. 그리고 아들들이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자기 묘지를 돈주고 사서 비석을 딱 세워놓을 사람이 있을까요? 소위 아무도 제사지낼 사람이 없는데? 지금 이 방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 다 아들 낳을려고 하는 것 아니요? 제사 지내게 할라고! 아마 자기 아들이 한국에 한 명 살아있으면 자기 아들이 미국 오리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아마 하겠지요. 그런 비슷한 방식입니다.
헷 족속들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방백, 즉 하나님이 위대하게 만드신 자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주변에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께 순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살면서 하나님과는 떨어져 지내기를 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할 묘지를 줄 수 없겠느냐고 했을 때 헷 사람들은 말하기를 아무 무덤이든지 한 곳을 택하여 무덤으로 쓰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직접 거절한 것은 아니지만 정중한 말로 아브라함의 청을 거절한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막벨라 동굴을 무덤으로 쓸 수 있도록 충분한 값에 팔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상인들은 산다거나 판다는 말을 아주 천한 용어로 여깁니다. 이런 말은 고귀한 손님에게 모욕적인 언사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드리겠다’ ‘선사하겠다’고 말함으로써 그처럼 넓은 도량을 보임으로써 상대방을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는지를 나타내므로 손님을 더욱 붙잡아 놓습니다. 이런 점잖은 말씨로 보아서 아브라함은 값이 대단히 비쌀 것이라는 것을 곧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특별히 절박한 어조로 그 땅을 팔 것을 말한 다음에 에브론은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부가적으로 액수를 언급합니다. 가치 개념이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 액수를 현재의 화폐로 환산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상당히 비싼 가격인 것 만은 분명합니다. 후대에 사마리아 성이 된 이 지역 전체를 오므리가 두 달란트(6,000세겔)에 산 것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비싼 가격인 것입니다. 더 협상해 볼 것도 없이 아브라함은 그 액수에 동의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땅이 없습니다. 단지 아비멜렉과 조약하고 거기 그 샘을 자기의 샘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땅은 한 평도 없습니다. 아직도 나그네 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함께 약속받았던 사라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곧 죽을 것입니다. 여전히 가나안 백성이 그 땅의 주인이고 자기는 나그네 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사라에게도 그 땅을 상속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살아서 그 땅을 상속하는걸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죽었는데도 바로 묘지를 돈주고 샀습니다. 자기들은 죽어도 하나님의 구원약속은 그 땅에 성취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자기는 죽어도 자기 씨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 씨는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에 보았던 것처럼 비유컨데 죽은 자가 도로 받은 것이라!. 단순히 아브라함은 이삭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삭을 그림자로 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령한 씨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내 때를 멀리서 보고 기뻐했다”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단순한 자기 상속자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씨를 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늘 도성을 바라보았다”고 히브리서는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의 소망 때문에 자기는 죽어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고 그 땅은 아브라함과 그 씨의 땅으로 주셨으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신다” 하는 부활의 소망 때문에 돈 주고 그 땅을 사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을 사게 됨으로 이 가나안 땅이 장차 아브라함의 땅이 될 것이라는 보증이 되었습니다. 모든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기의 땅이 될 것임을 인쳐 놓은 것입니다. 막벨라 굴과 함께 그 주변을 사게 됨으로 그 온 땅이 장래에 아브라함의 땅이 될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사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묻히게 되어 그 땅은 장래 이스라엘의 소유가 될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소유로 삼으시므로 온 세계가 자기의 것임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족장들은 죽을 때에 그 묘지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셉을 보면 “나를 이 땅에 장사하지 말고 너희들이 반드시 나갈 것인데 나를 내 조상들의 묘실에 묻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습니다(창 50:25).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가나안 땅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지요. 우리들도 죽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표본적으로 보여준거 아닙니까? 우리들도 죽습니다. 우리의 수고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죽으면 누가 먹습니까? 다 없어집니다. 누가 우리 이름을 기억해 줍니까? 그래도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봉사하는 일의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땅의 티끌에서 다시 불러 일으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들의 부활안에서 확실한 보장이 있습니다. 확실한 보장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에서 저주받는 죽음을 죽으셨어도 부활은 아들의 상급입니다. 지금 부활의 생명은 보좌 우편에 있습니다. 역사에는 보이지 않아도 그 생명이 나타나면 우리가 주님과 함께 그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죽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세상의 환난을 이기고 정말로 당당하게 사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 안하면 어떻게 우리가 삽니까? 바로 아브라함이 그런 믿음이라! 이삭의 모리아 산의 사건 안에서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 씨의 죽음과 부활을!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땅을 사서 사라의 묘지를 준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언제나 사라가 곁에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생명이 영원히 끊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장차 그리스도가 오실 때 부활할 것을 믿었습니다. 약속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모든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와 함께 영광 중에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세 속한 모든 자들을 위해 죽음의 올무를 끊어 버리실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백성들은 주를 믿는 사랑하는 자들을 죽음 가운데로 먼저 보냈을 때에도 위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위로는 우리가 죽음에 이를 때에도 큰 힘이 됩니다. 확실히 믿는 것은 자기들이 비록 산 자의 세계에서 떠나 가지만 어느 날엔가는 땅에 속한 자기들의 유업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사라의 죽음을 통해 믿은 내용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 모두 역시 하나님의 위로와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죽음을 이겨 승리하신 주님과 함께 항상 기쁨과 감사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 아멘 -
by 코이네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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