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을 구하는 세대를 향한 예수의 말씀 (비유가 아니면...)
(마13:34)
우리가 성경에 접근할 때 유념해야 할 사항 이 있다. 그것은 우리는 육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우리가 육과 함께 살고 육을 즐기며 때때로 육이 약하고 병들면 절망하고 육이 강하면 자신만만하 고 생각도 육적으로 하고 먹는것도 육을 위하여 일하는 것도 육을 위하여 하기 때문에 우리의 관 심은 온통 육적일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항상 경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우리가 익숙 해 있는 육적인 방향으로 해석을 할 수밖에 없고 육으로 이해하려 하고 육으로 부딪치려는 시도를 자동적으로 한다. 이 때문에 성경은 이해 할 수가 없는 책이 되고 있다. 성경책 처럼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해석이 난무한 책이 없다. 읽는 사람마 다 각기 딴 소리를 하고 제 나름 대로 해석하고 설교를 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오히려 성경 의 수렁에서 방향을 잃게 된다.
성경은 육적인 얘기가 아니요 영의 말씀이다. 영이란 육에 익숙한 사람으로써는 알 수가 없는 세계이며 이 땅의 얘기가 아니고 하늘들 위의 하 늘에 대한 이야기이고 육신의 귀와 이성으로는 이 해가 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대한 말이 다. 이렇게 철저히 육적인 사람에게 철저히 영적 인 이야기를 하자니 소 귀에 경읽기 보다 더 어렵 지...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 점을 경계했어요.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깊다..." 고 말이지... 소가 아무리 생각이 깊어도 여물을 씹어먹고 싶은 생각외에 무슨 생각을 더 할 수가 있으랴...!
성경은 온 통 비유로 가득차 있다. 어쩌면 성 경 전제가 다 비유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 이겠다. 그럼 왜 성경엔 비유가 그렇게 많냐? 땅 에 사는 사람에게 하늘의 일을 말하려니 할수없이 비유로 말 할수밖에 없는 거다.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을 보고와서 하는 말이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도다!" 그랬죠?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기엔 너무 부족하니까 기껏 표현한다는 말이 '말로 표 현할 수가 없다' 고 말할수밖에 없거든, 인간의 언 어론 이 세상의 모습이나 처녀 총각의 첫사랑이 꿈틀거리는 속 마음도 제대로 표현할수 없거든 하 물며 하늘의 모습을 어찌 표현할수 있겠냐?
예수도 마찬가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듣는 신기한 하늘의 복음을 들으려고 예수앞에 모여든 많은 무리를 앞에 두시고 '비유' 외에는 달리 설명 할 방법이 없어서 고민하신 예수의 심정이 '비유 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라고(마13:34)에 기록ㄷ다구요. 땅에 사는 사람에 게 하늘의 일을 직설법으로 암만 지껄여 보시라, 그게 되나... 수천 수만년전 동굴에서 살면서 돌맹 이로 사냥하며 그날 그날을 연명하는 사람에게 오 늘 날의 컴퓨터에 대해서 이해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을 해 보시라, 486 이 어떻고 팬티엄이 어떻 고 CPU 가 어떻다고 강의하면 그들이 알아 먹겠 수? 무지무지 힘든 일이지만 그들의 삶속에 관계 된 동굴, 돌, 짐승, 뼈다귀, 물, 흙, 하늘, 구름... 등 을 가지고 비유로 설명을 시도해야 할 꺼다. 원시 시대, 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어요. 난 지금도 우리 마누라에게 컴퓨터에 대하여 설명 하고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거의 포기했다구요. 컴 퓨터를 자기 눈 앞에 놓고서도 못 알아 먹어... 왜 그렇겠수? 생각이 달라요, 관심이 달라요, 삶이 달 라요, 익숙해져 있는 개념이 서로 달라요, 마누라 만 그런가? 못 알아먹기는 나도 마찬가지요. 우리 마누라는 나에게 아무리 요리하는 요령을 말해도 나 역시 못 알아 먹어... 왜? 내 관심은 요리에 있 는게 아니고 먹는데만 있으니까....
오죽하면 예수님 자신도 '너희가 땅의 일을 말해도 알아 먹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알겠냐?' 고 하신적이 있어요. 그래 서 예수도 하늘의 일을 말하실 때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천국은 마치..." 이러 이러 하단다... 하고 말이지. 그렇게 비유로 해도 못 알아 먹기는 마찬 가지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어서 코걸이 로 둔갑을 시켜버리니까 예수님도 하다하다 안돼 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게 너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라고 꽝꽝 못 밖으셨다. 육신에만 관심이 있고, 세상에만 관심이 있고, 자기 자신에게만 관 심이 있지 하늘의 일에, 영의 사안에 눈을 돌리려 는 관심이 전혀 없으면 그런 사람 예수도 어쩌지 못한다. 죽을려면 뭔 짓은 못허겄냐
그러니까 성경을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그래서 성경을 읽으려고 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 준비되어야 할까? 나는 항상 육적인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경계해야 한다는 거야. 다같이 복창해...! "나는 위험하다." 열번 복창, 실시...!!! 그리고 성경은 전체가 다 일단 '비유' 라는 관점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세상과 육신에 쩔어있는 나에게 하늘의 일을 말하기 원하는 저자가 '비유' 라는 방법으로 나를 이해 시키려고 하는 시도로 성경을 보잔 말이지...
그러면 성경의 모든 기록은 사건, 인물, 세상, 하늘, 영에 대한 기록이요 또한 비유가 된다. 하나 님이 왜 사건을 일으키셨냐? 어떤 특정한 인물을 등장시킨 이유는 뭐냐? 하는 모든 것들은 다 하늘 일에 대한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이다. 왜 하 나님이 430년간 애급에서 살고 있는 히브리 백성 들을 이끌어 내셨을까? 애급, 홍해, 광야, 요단강, 가나안이라는 이 세상의 무대에서 역사적인 사건 을 지나는 동안 히브리 민족은 죽을 고생을 했는 데 이는 모두가 나를 이해시키려는 저자의 시도라 는 거다.
애급, 거기에 살면 않된다는 거지, 애급에서 아무리 떵떵거리고 살아도 아무리 거룩하게 살아 도 하나님은 내가 애급에서 사는걸 원치 않으신다 는 거지. 왜? 애급은 육적, 세상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비유' 이니까.... 광야? 광야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없고 전갈과 독충, 그리고 뜨 거운 해와 추운 밤이 날마다 교차되는 곳이다. 그 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수가 없는 곳이 다. 반드시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살 수가 있는곳 이 바로 광야다. 이 광야에서 만나로 반석의 생수 로 히브리민족이 40여년간 살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다.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히브리의 죄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ㄷ 다. 그러니까 광야란 무엇을 보여주는 비유일까?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을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 이 경험하는 모습의 비유이다. 애급이 하나님의 도움없이 사는 모습의 비유라면 광야는 반드시 하 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사람의 모습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애급과 광야사이에 홍해가 있다. 홍해 는 뭘 비유하는 걸까? 침례(세례라는 번역은 대표 적인 오역이라 그러대, 남들이....)를 의미한다고 베드로와 바울이 가르쳤다.
침례란 예수의 죽으심에 죄인도 동참하여 연 합되고 또한 예수의 다시 살아나심에 죄인도 같이 연합한다는 의미의 비유이다. 예수와 죄인과의 이 러한 연합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 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 수와 함께 내가 죽는다는 것을 전제로 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각오과 결단이 없으면 여전히 애 급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와 무관하 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가 바로 침례이다.?
그러나 침례를 물을 몇 방울 머리위에 떨어 뜨린다고 혹은 온 몸이 물속에 다 잠긴다고 해서 그게 진짜 침례를 받은 거냐? 다시 한번 말 하거 니와 침례는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에 대한 비유인가 하면 바로 '내' 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하심에 동참한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과 각오가 바로 침례이다. 이러한 각오와 깨달음이 없이 침 례를 수백 수천번 받아도 말짱 헛거다. 이런 형식 적이고 교리적인 침례가 정말 침례인줄로 알고 자 기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착각하여 예수를 믿는것 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서 드러나느냐 하면 홍해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광야' 라는 과정에서다. 광야라는 과정 에서 필수적으로 일어나는 고난, 징계, 훈련, 인내, 소외...를 견디지 못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다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거다. 예수와 함께 죽 었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못한채, 혹은 거부한채로 광야로 들어가 봐야 괴롭기만 하다. 차라리 애급 에서 사는게 더 낫지... 하고 후회하고 두려워 하 다가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인들은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왜 애급출신의 이스라엘 백성 제 1 세대에서 단 두 사람만 제외하고 몽땅 광야에서 죽었을까? 애급을 잊지 못하고 애급을 그리워 하고 애급에 돌아가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 듭난 후에도 우리의 삶은 육신적인 습관과 관심에 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요. 예수를 믿는다는건 예수 께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예수께 관심이 없고 오직 나 자신, 육신, 세상에만 관심이 있다면(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 부분이지만...) 집사, 장로, 목사가 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다.
이 광야생활을 좀 않하고 막바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갈수는 없을까? 바로 이런 질문 자체가 육신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질문이다. 애급에서 가나안까지의 모든 과정은 객관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말하지만 바로 이 객관 적인 사실이 주관적인 나의 삶이 되지 않으면 않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유이다. 철저한 육신적인 내가 육신적인 관심을 다 벗어 버리고 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나타내는 비유란 말이지. 육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가 없 으니 육적인 생각을 벗어 던지기 위해서는 홍해도 필요하고 광야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광야 라는 과정을 좀 면제해 달箚?..? 하나님은 애급 에 있는 백성을 부르시고 광야에서 의롭게 하시고 마지막 가나안에서 영화롭게 하신다는 비유를 이 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보이시는 것이다. 즉 육 신에 속한 나를 부르시고 고난과 징계를 통해서 의롭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안으로 들어 가서 영화롭게 하신다는 과정이 나 개인의 삶에서 경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르심과 의롭게 하심, 그리고 영화롭게 하시는 과정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일찐데 의롭게 하시는 과정이 없이 부 르심에서 막바로 영화롭게 되기를 바란다면 그건 도둑놈의 심보외엔 아무것도 아냐...
! 자,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예수의 일으키신 표적을 추적하자. 신약의 4 복음서는 역시 비유의 창고이다. 예수의 일으키신 굉장한 표적들... 우리 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 죽은자 나사로를 살리심, 귀신을 고 병을 고치심, 바다위를 걸으 심...등등은 그 표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즉 병 을 고치신 표적은 병 자체를 고치심이 목적이 아 니며, 죽은 자를 살리심도 그렇고 오병이어 사건 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거다. 표적 그 차 체가 목적이였다면 예수의 사역犬?사도들의 사 역이나 초대교회의 모든 사역들의 기록의 내용이 표적위주로 기록ㄷ을 것이다. 자, 마태복음 12:39...을 보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와서 표적을 보여 달라고 청했더니 예수의 대답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것이 없다고 거절하셨다. 요나의 표적 이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비유한 것 이다. 그런데 과연 예수가 보일 표적이 자신의 죽 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외에 없던가? 위에도 언 급을 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표적들이 얼 마나 많이 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요나의 표적만을 말씀하시는 거다. 왜 그러셨을 까? 그 말썽꾼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잘 사귀 면 손해될게 없을텐데, 이들이 오죽하면 예수께 와서 그런 부탁을 다 했을까? 보여 달라고 요청하 지도 않던 때엔 잘도 표적을 행하시더니 왜 보여 달라는데 못하?시겠다는 걸까?
? 왜 이들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구했을까? 이 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 적을 구한다고 하셨는데 아니 서기관과 바리새인 들이 악하고 음란해?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 대로 살려고 기를 쓰?사람들인데... 그리고 예수 의 일으키신 수 많은 표적들은 그럼 다 악하고 음 란한 세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함이란 말인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예수의 대답을 41절에서 보자,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왕부터 길거 리의 강아지 새끼까지 막바로 금식하며 회개했다 는게 예수의 대답이시다. 그들이 요나에게 표적 을 구했던가? 이방인 니느웨사람들은 의외로 아주 단순한 사람들이였어요. 요나의 말로만 떠들어 대 는 전도에 마음에 깨달음이 와서 희한한 표적을 하나도 보지않고 막바로 회개했다. 표적을 본 자 는 오히려 요나쪽 이였지... 니느웨 사람들 보다 선지자 요나가 더 못된 심보이었던가.
..? 그렇다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예수께 달려와서 표적을 구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감이 잡 히시겠지? 이방인 니느웨 사람들 보다 선민 이스 라엘이 더 하나님을 거부하니 '악하다' 는 것이요 그들보다 더 우상숭배가 더 심하니 '음란' 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교계 지 도자들을 우선적으로 포함하여...)의 속 마음에 무 엇이 들어 있을까? 요새도 신유집회를 한다는 부 흥회 광고를 때리면 사람들이 많이 몰리나 몰 러...? 주최자측이나 참석자 쪽이나 바라고 바라는 것은 표적이다. 그래서 정말 표적으로 병이 치료 가 되면 건강얻어서 좋고 헌금 들어오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거든... 이런 사람들을 누가 심판하느 냐? 이런 件은 예수의 결재를 얻으러 서류를 올릴 필요 조차 없이 니느웨 사람들의 선에서 심판을 해 버린다는 41절의 말씀 유념하시면 감사하겠다. <
? 신유의 은사가 나쁘다는게 아니고 치료를 받 지 말라는게 아니다. 각종 표적을 많이 일으키는 게 나쁘다는게 아니요. 표적은 오직 하나?비유 요 비유란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건데 사람들은 실체는 아랑곳없이 오직 표적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있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 다. 그래서 병 고침 받고, 남편 사업 성공하고 아 들 일류대학 입학하고 30평짜리 아파트를 40평으 로 늘리고 목회가 성장하고 어쩌고 저쩌고... 이런 것만 디따 바라니 언제 실체의 가르침을 깨닫게 될꼬...?
모든 표적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나타내 는 비유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란 내가 죽지 않으면, 나의 의가 죽지 않으면, 나의 육신적 세상 岵?관심과 욕심과 야망이 죽지 않으면 예수가 아무리 골백번 죽으시고 부활을 하셨어도 말짱 꽝 이라는 실체의 가르침이 요나의 표적이라는 비유 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를 망각한 표적은 모 두 사탄의 속임수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악하고 음란한 교회들이여...! 당신들의 마음속에 관심이 무엇이 요? 무엇이 당신을 기쁘게 하며 무엇이 당신의 마 음을 안심시킵니까? 깨닫는게 회개요, 깨닫는게 믿음이요, 깨닫는게 구원인줄 깨달으시라...
(설교: 강기원 목사)
by 코이네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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