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9:14] 새 술은 새 부대에 / 박조준 목사

'코이네' 2016. 3. 4. 11:57

새 것과 낡은 것

마태복음 9 : 14 - 17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유대인들은 종교의식과 생활이 철저하였습니다. 보통 자선과 기도와 금식 이 세가지가 큰 행사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얼마의 구제품을 준비해 가지고 거리에 나가서 나팔을 불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품을 나눠주었습니다. 그히고 네거리에 나가서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데서 손을 들고 길게 듣기 좋은 낱말을 늘어 놓으며 기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주일에 두번씩은 꼭 금식하였습니다. 그때는 머리를 빗지 아니하고 세수를 하지 아니해서 누가 보아도 금식하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무슨 특별한 목적과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의식처럼 되어 있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으례히 이런 생활형식을 따라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이미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형식 아닌 올바른 내용의 신앙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가령 기도하는데 있어서도 외식하는 사람들처럼 회당과 큰 거리 어구에 서서 하지 말고 오히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또 어떤 사람들처럼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즉 아무런 간절한 마음도 없이 형식적으로 기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구제할 때에도 외식하는 사람들처럼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하는 것같이 하지 말고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한 중에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는데 있어서도 예수님은 새롭게 교훈하였습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은 금식하는 표시가 나타나게 슬픈 기색을 내고 얼굴을 흉하게 하는데 너희는 금식하려면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발라 말끔하게 빗고 얼굴을 깨끗하게 하여 사람이 보기에는 금식하는지 안하는지 알 수 없게 하라. 그러나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서도 보시기 때문에 네 금식함을 보시고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다 금식하는데 종교의식이 있는데 왜 선생님과 제자들은 실제로 금식하지 않습니까? ” 이때 예수님은 비유적으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같이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겠느냐?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우리 버역에는 ‘혼인집 친구’ 라고 하였는데 새번역에는 ‘신랑의 친구’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신랑의 친구가 헬라어 원문에 맞는 번역입니다.


 유대인들은 결혼식이 말하자면 특수한 축제였습니다. 요사이 우리나라에서도 서양 풍습이 들어와서 결혼식을 하면 의례히 신혼여행을 떠나지만 유대인의 결혼식은 전에 우리나라의 결혼식 풍습과 비슷하였습니다. 물론 지방에 따라서 좀 다르지만 과거 우리 한국의 결혼 풍습은 신랑이 들러리와 더불어 신부댁에 장가들어 여러 날을 지냅니다. 요사이처럼 호텔에 가서 밀월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신부댁에서 잔치를 하고 머물러 밀월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짖궂은 아낙네들이 손끝에 침을 발라 창호지 창문에 구멍을 뚫고 밤을 새워가며 숨소리를 죽이고 신랑 신부의 첫날 밤을 구경하는 것 또한 재미있는 풍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얼마동안 신부집에서 지내다가 신부가 시집을 가서 거기서 또 얼마 동안을 잔치하며 지냈습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잔치 기간은 두 주일이었습니다. 첫 주간은 가장 친한 친구들과 같이 지냈습니다. 이 친한 친구를 ‘신랑의 친구들’ 이라 불렀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일생에 한번 밖에 없는 일이라고 하여서 많은 비용을 써가며 이런 즐거움을 축하하며 지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그의 제자들을 신랑의 가장 친한 친구에 비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말하자면 우리는 혼인집 신랑과 신랑의 친구와 같은 사이에 신랑이 있는 동안 잔치하는 것과 같은데 잔치 때는 금식을 위한 때가 아니고 일생에 한번있는 즐기기 위한 때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에도 얼마나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일은 더 없이 기쁜 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은 감격의 생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기독교는 기쁨과 감격의 종교입니다. 어두움의 종교가 아니라 빛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믿는 사람으로 슬퍼하거나 절망하거나 어두움 가운데 거할 수 없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친구들이 결코 슬퍼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행복한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불행하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간나해도, 부해도, 건강해도, 병들어도, 젊어도, 늙어서도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은 행복한 생활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 기쁨이 영원하게 계속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하여 줍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슬픔의 때가 이미 왔습니다.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와 같은 슬픔의 때가 분명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예수님은 내다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가진 기쁨이 끝날 때가 온다는 것은 하나입니다. 에픽테투스라는 사람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입을 맞추며 ‘언젠가 너는 반드시 죽는다’ 라고 속으로 말해보시오” 하며 쓸쓸해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이가 누굽니까? 그가 여러분에게 기쁨을 줍니까? 행복하게 합니까? 그분이 사랑하는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자녀입니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언젠가는 이 기쁨이 끝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꼭 알고 믿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변치않는 분이십니다. 가장 친밀한 인간의 관계는 끝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기쁨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 기쁨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 기쁨은 세상 무엇과 바꿀 수도 없습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 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의 도전이기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옆에서 이 말씀을 들으며 얼른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지금은 나를 따르는 기쁨을 경험하나 이제 앞으로 닥쳐 올 어려움과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느냐?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기쁨이 있으나 동시에 십자가의 길 피와 땀과 눈물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는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십자가 이 둘을 다 받아들일 준비가 있느냐?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용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어떤 환상 속에서 사신 분이 아니고 가는 길의 끝이 십자가인 것을 그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정해진 길에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희생의 길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길을 따라 나아가는 사람의 용기입니다.


 그러면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문 16절을 보세요.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진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주려고 왔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개념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사실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유대인이라도 잘 이해할 수 있는 예를 드셨습니다.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깁는 사람이 없다고, 왜냐하면 새로운 조각이 그 옷을 당기어 더 못쓰게 찢기어지기 때문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생태를 가만히 보면 (대개 다른 사람들도 그런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아주 열정적으로 집착해 있었습니다. 가령 종교생활에 있어서 율법이 하나님의 최후적이고도 결정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거기에 한 말씀을 더하거나 빼는 것은 죽을 죄로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그대로 살려고 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고 또한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너무 문장에 치우치다 보니까 율법의 정신과는 동떨어진 문장주의와 형식주의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자기들과 같이 살지 않는 것은 죄로 인정하고 정죄하게 되어 독선주의자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앞으로 생각하겠습니다마는 가령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 먹을 때 손을 씻지 아니하고 먹으니까 하는 말이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장로들이 전해준 관습을 어겨 음식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까? ” 이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너희는 어째서 너희 관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느냐? ” 하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뱃속을 거쳐 뒤로 나가는 것인 줄 모르느냐?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모독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사상은 죄로 여겼습니다. 그런 정신이 지금은 없는 것도 아닙니다. 혹 어떤이는 새로운 사상이나 새로운 방법론이나 어떤 변화가 암시된 때에는 “전에는 안그랬는데” 하는 태도로 새 것을 반대하는 것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보면 교회는 옛 것에 집착해 있는 적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낡은 옷에 헝겊을 대고 깁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세상 도덕의 교훈 잘못된 것을 점점 고쳐 나가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옛 사람은 죽어 버리고 완전히 새 사람으로 다시 나야한다고 합니다.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요새처럼 병에 포도주를 저장하지 않고 가죽부대에 저장했습니다. 새 포도주를 가죽부대에 넣을 때는 아직 완전히 발효되지 않은 것을 넣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생기는 가스가 가죽부대에 압력이 가해지기 때문에 새 가죽부대에는 신축성이 있어서 개스가 생겨도 부대의 손상이 없으나 낡은 가죽부대는 굳어졌고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발효되지 않은 새 포도주를 넣으면 가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해서 터지고 맙니다.


 요새 말로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새 것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데 마음의 신축성이 있어야 합니다. 전진하는 역사란 폐쇄된 마음의 편견을 뛰어 넘는 역사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새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에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지구를 도는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어려움을 겪은 일을 기억하시지요?


 개인이고 교회이고 간에 성장하기 위해서는 새 것을 받아드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어떤 생물이라도 성장을 멈추면 그것은 이미 죽음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닫힌 마음을 거두시고 열린 마음을 줍시사 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겠습니다. 그것은 급격하게 소용돌이치는 이 변화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1870년에 출생한 비스카운트 사무엘 백작은 런던의 소년시절을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자동차니, 버스니, 택시니, 지하철이니 하는 것은 없고 자전거도 없었습니다. 그저 키가 높은 마차 밖에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전기불이니 전화니 영화니 라디오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때란 100년 전입니다. 오늘 우리는 변화와 팽창과 성장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교회나 과거에만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새롭게 선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경계하시는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 저녁 우리는 예수님의 이 교훈을 들으며 우리 스스로를 반성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에 유대인들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 내용없는 형식 생명없는 문자에 사로잡혀 결국 ‘외식하는 자’라 하는 주님의 책망을 받은 입장에 서 있지는 아니합니까?


 우리 마음의 자세가 새 포도주를 담을 만한 새 부대로 되어 있습니까? 아집과 편견이 사로잡히고 독선에 붙들려서 괴거에만 머물러 있는 성장이 정지된 상태는 아닙니까?


 산 사람은 움직입니다. 산 교회는 성장합니다. 급변하는 세대에 서 있는 교회는 새로운 문명의 이기와 방법을 총 동원하여 썩어져가는 세상에 붙잡혀 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겠습니다. 누가 새 사람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오 주님 !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  

 

(박조준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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