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겸손, 믿음 그리고 봉사
마태복음 8 : 5 - 17
설교 : 박조준 목사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사랑하신 것 즉 법과 율법을 초월해서 그냥두면 비참하게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겨 무서운 전염병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고쳐주신 일을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도 크시지만 나병환자의 믿음 또한 훌륭하였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존경하는 심정으로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올 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비참한 병인 문동병에서 완전히 고침을 받아 새사람된 사실을 생각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대로 마태복음 5 장, 7 장 산상보훈은 예수님의 말씀의 지혜를 기록한 부분이고 8 장은 예수님의 사랑의 행동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8 장은 주로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보아도 문둥병을 고치신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 들어가셔서 한 백부장을 만나 그의 종이 병든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병든 사람 귀신들린 사람을 낫게 하여 주셨습니다.
먼저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다 ( 5 -13).
백부장이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인물가운데 퍽 매력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백부장은 로마군대의 장수입니다. 로마군대의 한 군단이 6 천 명이었는데 이것을 60개 단위로 100명씩을 한 부대로 하여 그 지휘권이 백부장에게 있었습니다. 이 백부장들은 장기 복무자들로써 로마군대의 정규 군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직위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폴리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백부장은 위험한 일을 일으키는 모험보다 오히려 행동에는 침착하고 믿음직스러운 지휘자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쓸데 없이 전투에 돌입해서도 안되지만 공격을 받았을 때는 그 지점을 고수하고, 자기들의 부서를 사수할 각오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백부장은 로마군대의 중추의 역할을 하는 우수한 군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백부장은 모두가 훌륭한 사람들만 나타납니다. 가령 마태복음 27 : 54 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실 때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부장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달리야 대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하여 자신 뿐만 아니라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생활을 하였고 베드로를 만나 이방인으로는 처음 기독교로 개종한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3장에 보면 바울을 해치려 하는 폭도들의 습격에서 구한 백부장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과 가이사랴 사이에서 바울을 죽이려고 음모한 것을 알고 그들의 계획을 미연에 방지하여 바울을 구한 백부장 펠릭스의 영향을 받고 바울을 보살펴 안전하게 호송할 백부장, 바울이 로마에 마지막 여행을 할 때에 바울과 동행하였고 모든 예의로 바울을 대하였고 배가 폭풍을 만났을 때 바울을 지도자로 세운 백부장들을 사도행전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백부장 역시 특수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의 종에 대해서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정도로 사랑과 동정으로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종이 병이 들었는데 불쌍하게 생각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띄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 제국에서의 종이란 병난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당하거나 죽거나 살거나 관심할 것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생명이 없는 물건에 대해서는 우정도 정의도 있을 수 없다. 말이나 소도 그렇고 노예도 마찬가지다. 주인과 노예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인정적인 관계는 없다. 도구는 생명이 없는 기구요 노예는 살아있는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즉 노예는 하나의 물건에 불과하였습니다. 노예에게는 법적 권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주인이 자기 마음대로 학대할 수도 있고 처분할 수도 있었습니다. 로마의 법률에서도 ‘주인이 노예의 생사를 주관할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전에 로마의 저술가 바로는 농업에 대하여 말하면서 농업에 쓰는 도구가 셋이 있는데 언어를 가진 도구, 언어가 없는 도구, 소리없는 도구 즉 언어를 가진 도구는 노예를, 언어가 없는 도구는 가축, 소리없는 도구는 운반하는 수레나 그밖의 기구를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노예는 단지 말할 수 있는 것 하나 차이 있고는 다른 기구나 짐승이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축을 잘 키워 팔고 남은 기름과 곡식은 파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면서 맥빠진 소, 흠있는 가축, 낡아빠진 마차, 낡은 농구 그리고 늙고 병든 노예는 팔아 버리라”고 로마의 저술가인 카토는 말했습니다.
그 당시 사회제도상 노예에 대한 것이 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백부장을 볼 때 노예를 하나의 도구로 보지 아니하고 인격으로 대하고 더구나 그 노예를 지극히 사랑한 것을 보면 백부장 자신이 특별한 인격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와서 그처럼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은 이러한 아주 예상할 수 없는 그의 온유한 성품과 사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는 큰 힘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주님 가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백부장은 그의 종에 대하여 사랑이 컸을 뿐 아니라 자기자신의 신앙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백부장은 예수님의 능력이 자기의 종의 병을 고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이요,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면 이방인과 유대인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배운 일이지만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이방인의 사는 곳은 더럽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갈 수 없이 되었습니다. 미쉬나에는 분명히 기록되기를 ‘이방인의 거주지는 불결하니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따라오며 부르짖는 가나안 여인을 향하여 ‘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짐이 합당치 않다’고 하신 말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 좀 달라는 예수님께 ‘보아하니 당신은 유대인인 것 같은데 어떻게 사마리아인인 나더러 물 좀 달라고 하십니까? ’ 이 말은 당신들 유대인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취급도 안하는데 사람같지 않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필요합니까? 하고 비꼬는 말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관계가 이러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고쳐 주시기를 원한다고 간절히 소원하는 겸손하고도 사랑에 넘친 백부장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 당시의 율법 규칙을 몰라서 하신 말씀은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시험해 본 것입니다. 이 때에 백부장의 믿음은 정점에 달했습니다. 그는 군인장교로써 부하에게 명령을 하면 그 명령이 지체없이 그리고 무조건 시행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 주님께서 제 집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 집에 오심을 제가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하신 일을 명령만 하십시요. 그러면 그 명령이 이행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발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성서학자인 욀리암 바클레이는 이 신앙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과 기쁨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의 비자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신앙은 천국의 비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비자가 유대인 국적에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국적 여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가 선민에 속해 있고 자기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귀족 민족이므로 필연적으로 구원 받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란데 여기서 예수님은 이런 관념을 완전히 깨뜨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유일한 귀족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 귀족인 것을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특수한 민족의 소유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민족에 관계없이 마음 속에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감격하셨습니다. 그래서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지금까지 내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러면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됩니다.
그런데 그 시간 바로 그 종이 나았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간격이 없습니다. 이렇게 겸손과 사랑 그리고 믿음은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죽게 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다음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일입니다(14 - 15).
베드로는 결혼했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의 아내는 후일에 베드로가 전도하는 일에 조력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크레멘트는 베드로와 그의 아내는 함께 순교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틴 근방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열병으로는 세 종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파상열이라고 불리우는 것인데 허약과 빈혈에서 생기고 여러달 동안을 앓다가 이 병에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둘째는 간헐열이라하는 병인데 장티푸스와 비슷한 열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라리야가 있었습니다. 요단강 가에 숲지대가 있는데 여기에 학질모기가 자라서 번식해서 그 지방에는 학질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어떤 열병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이 세가지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고 매우 고생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좀 쉬려고 가셨던 예수님은 그가 앓아 누운 것을 보고 고쳐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있어서 기적을 행하시는 일은 상당한 희생을 지불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고치실 때 마다 능력이 나와야 하므로 예수님은 매우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집에 장모가 앓아 누운 것을 보고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기적을 바라보고 놀라고, 감탄하고, 선전할 대중도 없었습니다. 그저 소박한 오두막집과 열병으로 고생하는 노파 한사람 뿐이었습니다. 이런 조건하에서도 예수님은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피곤한 가운데도 남을 도왔습니다.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예수님은 고통으로도 성가신 것으로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대중 앞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사사로운 데서는 되는대로 하는 식의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쓸모없는 것 같이 보이는 곳에서도 기쁨으로 도와주고 칭찬해 준 사람이 없어도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군중 가운데서나 오막살이 안에서나 그의 능력은 필요한대로 부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의 손길이 베드로의 장모의 손에 닿자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자기가 낫게 된 것이 예수님의 능력 때문이고 자기는 봉사하기 위해서 낫게 해 주신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유일한 소망은 자기가 새로 회복한 건강을 가지고 예수님과 이웃에게 봉사하는데 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어떻게 써야 하겠습니까? 오스카 와일드가 쓴 「주옥의 단편」이란 작품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거리를 통과할 때 머리 위에서 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쳐다본즉 창턱에 술에 만취하여 누워있는 청년이었습니다. ‘왜 그대는 술에 취하여 영혼을 쇠하게 하는가?’ 했더니 그 청년 대답이 ‘주여 과거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나를 낫게 하였습니다. 이것 밖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예수님은 그 동네를 지나 좀 더 가다가 창녀를 쫓아 다니는 한 청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왜 젊은이는 음행으로 그대의 영혼을 망치는가? ’ 했더니 그 젊은이의 대답이 ‘주여 나는 과거 맹인이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 외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 드디어 도시 가운데 들어와 땅바닥에 쭈그리고 울고 있는 한 늙은이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대는 왜 우시오? ’ 그때 그 노인 대답이 ‘주여 나는 죽었다가 당신이 일으켜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나는 우는 일 외에는 무엇이고 무엇이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선물과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이 어떻게 쓰고 있는가? 하는데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 베드로의 장모는 회복된 건강의 선물을 예수님과 이웃을 봉사하는 데 썼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선물을 써야 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을 어떻게 쓰십니까? 하나님과 사회를 위하여 쓰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 육신을 위해 쓰십니까? 건강, 지식, 재물, 기술, 지위, 권세, 생명을 어디에다 쓰십니까?
끝으로 16-17절에 예수님의 봉사정신을 배웁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도움을 구하고 고침을 받기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 예수님은 결코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다른 사람을 봉사하는 동안에 자기의 피곤이 회복되고 연약함이 강해지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일하기를 요구당할 때 그것을 해낼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일하는 힘이 어디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사이 슈퍼맨(Super man) 이란 말을 흔히 씁니다. 초인간이란 뜻입니다. 전적으로 다른이를 위해 봉사할 때 초인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사용할까?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런 권면을 합니다. 베드로전서 4 : 7절 이하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고 각각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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