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7:21] 반석 위에 지은 집 / 박조준 목사

'코이네' 2016. 3. 2. 17:54

반석 위에 지은 집

마태복음 7 : 21 - 29

설교 : 박조준 목사


 우리는 오늘저녁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설교의 결론을 읽었습니다. 지난 8개월에 걸쳐서 저녁 기도회 시간에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절절이 읽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생각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교훈이야말로 우리 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단순하고도 명료해서 듣는 우리에게 잘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론으로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옳게 생각하여 ‘주여 주여’ 하면서 그 말씀과 상관없는 생활을 한다면 아무런 의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주의 이름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일군 중에 구원을 못받는 자들이 많다고 하니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지라도 그리스도만 계신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시카고에 대 화재가 나서 무디 선생의 가산이 불에 몽떵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디 선생에게 묻기를 “선생님, 이번 화재에 그만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지요? ” 그때 무디가 기쁜 낯으로 대답하는 말이 “아니요, 그리스도는 아직 내게 남아 있습니다” 하였다고 합니다. 세상에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소유한 것이 가장 귀한 것을 의미하는 말인 줄 압니다.


 지난 시간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계에 “입의 종교에서 실행의 종교”를 강조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논조를 그대로 계속하여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마지막 비유에서 산상보훈 전체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반석’은 여기서는 자연석과 같은 감을 주지마는 누가복음 6 : 48에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는’인간 노력면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여간 집을 건축함에 있어서 기초공사를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집’이란 것을 성경에 보면 여러가지 의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령 에베소서 2 : 21 - 22에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였는데 이것은 개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는 디모데전서 3 : 15에 보면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라.’ 즉 여기의 집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4 : 2에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는데 ‘내 아버지의 집’은 하늘 나라를 가리킵니다. 개인의 신앙을 완성함에 있어서나 교회를 건설함에 있어서나 천국을 확보함에 있어서 그 기초적 요소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확실히 우리의 인생의 집을 짓는데 있어서 기초공사를 하는 것입니다. 기초공사는 먼저 하여야 되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노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땅을 파고 돌을 묻는 공사입니다. 좋은 기둥을 세우고 아름다운 창문을 달고 페인트로 칠해서 아름답게 꾸미는 거 같은 지상의 공사는 투자하는 것만큼, 노력하는 것만큼 남에게 보여지는 모양으로 세상에서는 하는 일들이 보기에 화려하고 명예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보이지 않는 일에 노력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쏟는 것입니다. 얼른 볼 때 공연한 수고와 같습니다. 약삭빠른 사람들 생각에는 어리석은 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요사이 어떤 악덕 건축업자들은 보이지 않은 부분인 기초공사는 아주 허술하게 하고 보이는 부분만을 아름답게 꾸며 지어서 팝니다. 얼른 보아서는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노라면 알 수 있게 됩니다.


 기초공사는 결코 낭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가 나타날 때는 평시가 아니라 위에서 창수가 나고 아래서 바람이 부딪히고 옆에서 역경이 닥쳐올 때 기초가 튼튼한 집과 약한 집이 판가름 납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른 보아서는 어떤 사람이 바른 인격의 소유자인지 그렇지 못한지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면으로 접해보고 시간이 흐르노라면 자연 그 사람의 본성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기초는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방면으로 중요합니다. 개인의 인격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진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권면했습니다.


 진실치 못한 사람을 보면 처음 사귈 때는 오히려 더 훌륭하게 보입니다. 유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진실이 기초가 되지 아니한 인격은 얼마 오래가지 않아서 무너지고 맙니다. 인격 뿐만 아닙니다. 사업도 그렇습니다. 사업도 말하자면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기에도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신용의 기초, 성실의 기초가 필요합니다. 물건을 팔 때 한두 번은 속여서 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신용을 지켜서 성실하게 하면 당장은 사기로 하는 사업만큼 잘 되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꾸준히 계속하면 언젠가는 굳건히 설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가정생활도 그렇습니다. 근면과 검소, 사랑과 봉사의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게으름과 사치, 방탕과 미움이 있는 가정은 얼마 가지 못해서 넘어지고 맙니다.


 우리의 사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정의의 기초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회 정의가 구현되어야 합니다. 부정과 부패는 공산주의보다 더 무서운 적입니다. 허영과 낭비, 사치와 방탕은 나라의 집을 무너뜨리는 좀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 국민은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 큰 집을 세워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 하나 하나가 진실과 근면, 사랑과 봉사 그리고 피차 덕을 세우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국민 전체가 단결해야만 합니다. 나 하나의 형편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나라의 전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나라의 안보없이 개인의 자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민국 없는 우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국민 하나 하나는 이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 심각한 현실문제 가운데 하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경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미국 대통령 닉슨 정책에 의해서 「달러」방위시책으로 우리 물품을 미국으로 수출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국 차관을 빌어다가 공장을 설비하고 어떤 부분은 생산과잉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더구나 이제부터는 외채원리금 상환액이 늘어나기 때문에 문제는 심각하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빚을 더 가져다가 우선 진 빚을 갚으려고 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멀지않는 내일 다시 더욱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놓는데 불과한 일시적인 미봉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어떤 신문을 보니 어느 고등학교 교장의 부인이 다이아몬드 때문에 큰 문제가 된 기사를 보았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소유에 대하여 누가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도의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당장 끼니가 어렵고 입을 옷,몸둘 집이 문제가 되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 사치품을 경쟁하듯 바꿔가며 추태를 부린 것을 보면 교육자의 부인으로서의 양식이 의심되거나 국민의 입장으로서는 용납 못한 일입니다.


 이 뿐입니까?


 말을 들으니 국회에서는 의장 부의장이 타는 차가 좀 몇해 된 것이라고 외국제 최고급 캐딜락이니 벤츠 600을 사기 위해서 1억원 이상의 예산을 책정해 놓았다고 사회에 물의가 되고 있는데 이거 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닙니까? 당장 빚 갚기에 문제가 된 나라의 고위층 사람들이 외국차 그것도 최고급차를 타고 좁은 거리를 붐벼대며 다녀야 위신이 설는지? 알수 없는 일입니다.


 하여간 국민이건 관리이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캐딜락을 타는 부류는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굉장한 부자요, 다른 하나는 가난한 흑인입니다. 불신과 부정과 불안 이것은 우리나라의 기초를 흔드는 적입니다.


 일본 동경 대지진시에 무너지지 않은 빌딩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빌딩은 미국인 라이트라는 사람이 설계한 것으로 지진도에 맞게 기초 공사에 과대한 비용을 썼으므로 그 당시에는 비난이 많았지만 그 무서운 대지진 속에서도 완전히 보존되어서 그 건축가의 이름은 더욱 높아졌다고 합니다.


 신앙이란 기초공사가 튼튼히 되어 있는 사람은 큰 역경이 위에서, 아래에서, 옆에서 오면 올수록 그 신앙의 빛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경 가운데서도 승리하는 신앙이 어디서 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이 비유는 어린 아이들이 장난으로 집을 지었다가는 무너뜨리고 마는 것을 보시고 하신 말씀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신앙이란 몸소 경험하고 실행하는 것이지 기독교를 하나의 소꼽장난하는 어린 아이들처럼 하나의 취미로나 믿다가는 어려움이 부닥쳐 오면 ‘나는 모른다’ 하고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신앙의 진미가 무엇이며 그리스도의 은총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에머어슨은 “경험은 본인이요 서적은 해석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만이 성경의 참 해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고보 1 : 22에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되지 마시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감상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기를 보고 가서는 제 얼굴이 어떠한가를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잘 살피고 또 그 안에 사는 사람은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행함으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들은 군중은 그의 교훈에 놀랬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늘 들어오던 사기관들의 교훈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권세있는 자와 같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예수님이 권세있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도 아니었고, 공회의 회원도 아니었고, 바리새당의 배경도 없었고, 왕관도 물론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독특한 의미에서 왕이었고 왕중왕이었습니다(요한복음 18 : 37).


 그리스도의 권세는 상속권에서 온 것도 아니며, 국민의 투표에서 얻은 것도 아니며, 하늘에서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그의 권세는 신령한 것이었으며 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권세를 가지고 나섰고 지배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에는 “놀람”이 충만하였습니다. 모세가 호렙산 가의 가시불 속에서 경외를 느낀 것처럼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뽕나무 위의 삭개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 다메섹 도상의 사울이,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람들은 모두 놀람에 사로잡히었습니다. 그리고 ‘놀람이 없는 곳에는 배움도 없다’는 마기니의 말처럼 이 놀람에 이끌리어 구도하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잡으러 온 하속들은 빈손들고 돌아가 보고하기를 ‘그 사람의 말처럼 말하는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 (요한복음 7 : 46) 하였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의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 갈릴리 흉용한 물결을 향하여 꾸짖는 그리스도 ! 그 얼마나 권세에 찬 행동이며 말이겠습니까? 실로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떤 권세자도 본받지 못할 특수한 권세자였던 것입니다.


 한번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예수님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집까지 가시기 전에 그 딸은 죽고 그 집에는 울고 훤화하는 소리에 분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광경을 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개의치 않으시고 방에 들어가신 후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 다굼’ 하셨습니다. ‘딸아 일어나라’는 이 말씀은 다정한 어머니들이 아침에 밥을 지어 놓고 늦잠자는 아이를 깨우는 말이라고 합니다. 아이는 즉시 눈을 뜨고 일어나서 아마 마치 잠에서 깬 사람처럼 눈을 비비면서 걸었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째 하시는 말씀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잠깬 아이에게 아침밥을 주라는 뜻이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죽은 자를 자는 자로 취급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겐 놀람이 넘쳤습니다. 실로 그리스도에게는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것이 어머니들이 늦잠자는 아이를 깨우시는 것보다 쉬웠던 것입니다. 독특한 권세자 그리스도 ! 만일 정당한 지각으로 그를 대하였던들 사람은 누구나 놀람없이 그의 생애와 말씀을 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권세에 중심으로 순종하며 놀람으로 그의 교훈을 대할 때 그리스도는 언제나 살아있는 자로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며 새로운 지시와 힘으로써 우리의 생활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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