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낚는 어부
마태복음 4 : 17 - 25
설교 : 박조준 목사
5월은 전도의 달로 우리교회 온 식구가 개인 전도에 힘쓰는 중에 있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저녁마다 여러분이 모여서 개인 전도에 대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까? 오래 떨어져 있던 친구를 만나는 것, 멀리 갔던 남편이 돌아오는 것, 기다리던 자녀를 낳은 것, 사랑하는 자녀가 성공하는 것, 계획하던 사업이 이루어지는 것, 이 모두가 기쁜 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기쁜 것이 무엇일까? 하나의 심령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인격이 변화되고 새 사람이 되어 구원받는 것을 보는 것, 이 이상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 3 서 3 절에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기뻐하노라 내가 내 저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의 솔직한 심정인 줄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은 사랑하는 친구가 사랑하는 자녀가 예수 믿어 구원 얻고 그 생활이 변화하는 것을 볼 때처럼 기쁜 것이 없습니다. 즉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자리를 잡고 있던 생활에 새로운 빛이 자리를 잡게 될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 이런 기쁨, 이런 영광을 누려 보셨습니까?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권세로 누릴 것이 못되며 지식으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누리는 특권입니다. 봄철에 심은 씨앗이 움이 트고 싹이 나서 매일 아침 볼 때마다 점점 자라는 것을 보는 농부에게 기쁨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한 심령의 마음의 밭에 떨어져 그것이 싹이 나고 자라는 것을 볼 때 복음의 씨를 뿌려본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기쁨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교역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교인의 신앙이 점점 자라나는 것을 볼 때입니다. 반대로 가장 가슴아픈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의 심령이 신앙을 떠나서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볼 때입니다. 그가 아무리 세상적인 번영을 누린다고 해도 그 심령을 생각할 땐 가슴이 답답하고 아픈 것이 교역자의 심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다른 하나의 심령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사람 낚는 어부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호수가를 걷고 계셨는데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태복음 4 : 1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를 때 그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하루 설교할 때 3 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 믿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위대한 설교가 챨스 스펄젼과 같지도 못합니다. 디 · 엘 · 무디 같은 유명한 부흥사도 아닙니다. 빌리 그레함 같은 전도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안드레와 같을 수는 있습니다. 요한복음 1 장에 보면 40절에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쫓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베드로 같은 사람은 큰 그물로 많은 고기를 잡는 어부요 안드레는 낚시대로 고기 하나씩을 낚는 어부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수백, 수천, 수만이 모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사람 한 사람에 낚시질하는 사람이 고기를 한 마리, 한 마리 낚는 것처럼 한 심령을 낚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내가 인도한 하나의 심령이 나가서 수백, 수천의 심령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위대한 전도자가 될는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킴볼이 D.L 무디를 인도한 것을 생각해 보세요. 오늘 우리 가운데 사실 킴볼이라는 사람을 아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D.L 무디는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하나님의 종 D.L 무디를 누가 주님께로 인도하였어요? 킴볼 한 사람이 D.L 무디를 주님께로 인도한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12 제자 가운데 7 제자는 개인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세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명령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약속으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책임이라는 영어 낱말은 레스폰스(response)와 애비리티(ability)의 합성어라고 하였습니다. 즉 반응과 능력이란 말이 합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우리의 반응이 무엇인가 ‘주님을 따르는 것’ 그러면 능력은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개인대 개인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친척에게 그리스도를 권하면 그리스도 앞으로 이끄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사실 예수님 자신도 물론 많은 무리 앞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인적인 증거를 하신 때도 많으십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는 동안에 복음서에서 기록된 것만 보더라도 9번이나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며 증거하였습니다.
가령, 요한복음 4 장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그 여인을 한 걸음, 한 걸음 진리에 이끌고 들어가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여인이 사마리아 동리에 들어가서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하게까지 되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동리에 들어오시다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보시고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구원이 내 집에 이르렀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한 번은 유대인 종교지도자인 니고데모가 밤에 주님을 찾아와서 주님께서는 그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의 심령을 귀중히 보셔서 저희를 하나님께 이끌기 위하여 애쓰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의 심령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9 : 19절 이하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을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 하였습니다.
한 두 사람의 심령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썼습니까? 사실 하나의 심령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 구원 받게 하는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한 은혜 중의 은혜요, 특눠 중의 특권입니다. 누가복음 19 : 10에 주님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사실 주님 자신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셨습니다. 오늘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천사에게도 안 맡긴 사명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우리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그런데 어떤이는 “아, 전도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 성경학교 학생, 신학생, 혹은 선교사. 전도사, 목사나 하는 것이지 우리 평신도가 무슨 전도를 하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칩니다. 모든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도요,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즉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여러분이나 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며 전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간호원은 환자를 간호하면서 전도합니다. 교사나 교수는 학생을 가르치면서 전도합니다. 운동선수는 운동을 하면서, 장사하는 이는 물건을 사고 팔면서, 학생은 학생대로, 군인은 군인으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로써, 사무원은 사무원으로 누구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다 전도할 수 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예수믿는 것을 공부도 못하고 세상적으로 의지할 데 없는 사람,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만이 믿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가정부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예수믿는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세상으로 볼 때는 별로 부족함을 못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답하는 말이 “저는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예수믿는 것은 불쌍한 사람들,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믿는 것이지 나는 그렇게 불쌍한 사람이 아니예요. 우리 애기 아빠 돈 잘 버는 사람이지요, 우리 아들 딸 공부 잘 하지요, 몸도 식구마다 건강하지요, 우리는 부족한게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 죽으면 천당간다고들 하는데 천당 가 보아야 지금 우리보다 나을 것이 있겠어요?” 하고 대답 하더랍니다. 세상에 예수 믿기 어려운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자기마음 속의 갈급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실 복음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다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 장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하였습니다. 이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해야 하겠습니다.
자, 여러분 !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무덤에 묻혔을 때 갔던 여자들이 예수님 부활하신 사실을 자기들만 알고 가만히 비밀을 지키고 있었습니까? 아니오. 뛰어와서 다른 제자들에게 전했고 다른 제자들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같은 제자들은 공회에 붙들려가 전하지 말라는 제재를 받게될 때 담대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말 듣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의 말 듣는 것이 옳은가 너희가 생각해 보라, 우리가 친히보고 들은 것을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다 사람 낚는 어부의 책임을 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요, 또 나아가서 전도도 해야겠는데 도무지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단 말이에요, 다른 말은 다할 수가 있는데 예수 믿자는 말은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안다고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시인할 것이요,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부끄러워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부끄러워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시인하고 고백해야겠는데 도무지 힘이 나지 않거든요, 그래서 친구(학교)들 사이에서 공부하는 이야기, 여학생 같으면 요사이 봄철 옷해입는 이야기는 하면서도 예수 믿는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단 말입니다. 왜 그럴까?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마음 속에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확신, 능력이 어디서 옵니까? 사도행전 1 : 8 을 여러분 잘 기억하시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증인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8 장 25 절 이하에 보면 집사 빌립이 훌륭하게 전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하루는 먼지나는 사막의 길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뒤에 병거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병거를 타고 있는 사람이 후에 안 일이지만 아프리카 이디오피아의 한 정부를 대표하는 고급 관리였습니다. 그 관리에게 빌립이 전도했습니다. 그는 세상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가지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지막엔 이 이디오피아 관리가 감화를 받고 병거에서 내려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전도입니다. 이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몇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이 역사하였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둘째는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없이 전도 못합니다.
세째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고 전도하지 못합니다.
네째는 복음을 전할 열심이 있었습니다.
다섯째는 기회있을 때마다 가까운 데서부터 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민족의 지상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업이 무엇입니까? 80년대에 100억불 수출하는 것입니까? 경제성장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겨레 5 천만을 북음화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여러가지 방면으로 이 복음화 운동을 방해하려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축될 필요도 없고 되어서도 안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선포에 힘써야겠습니다.
오늘 우리 겨레는 비상한 때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 일수록 우리는 일어나 빛을 발해야겠습니다. 오늘 저녁 나는 전도의 달에 누구를 전도할까?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분을 특별히 위해서 기도하세요. 성령의 역사를 위해 기도합시다.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기도합시다. 복음을 전할 열심 주시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내게 가까운 사람에게부터 전할 수 있는 힘얻기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는 사람 낚는 어부입니다.
by 코이네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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